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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9화 (9/222)

9화

임페라 백작령의 작은 산골 마을 크리젤. 한 여인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안 들어온담!”

어느덧 해가 저물어갈 때가 됐는데도 아이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해서였다.

“설마 뒷산에라도 간 건…….”

마을 뒷산은 지금 뿔돼지 한 마리가 들쑤셔 놓는 바람에 들어가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난번엔 뒷산에 놀러 갔다 크게 다친 아이가 있던 터라 더욱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엄마!”

“아델린! 어디 갔다 이제 들어온 거니!”

호되게 다그쳐 봤지만 아이는 여전히 천민난만 했다.

“얼굴엔 또 뭘 이렇게 덕지덕지 바르고 와선…….”

“나 고기 먹고 왔어!”

“고기?”

고기라니? 요즘 같은 세상엔 밥 한 끼도 얻어먹기 힘들 땐데.

세상 형편 좋은 사람이 다 있다. 이런 꼬맹이한테 고길 나눠 주다니.

“응! 뒷산에 가 보니까…….”

“뒷산? 너 엄마가 뒷산에 가지 말라고 말 했어 안 했어!”

그제야 아이는 제 잘못을 깨달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치만… 뒷산에서 자꾸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그래서?”

“그래서 가 봤더니 먹다 남은 고기가 산처럼 있어서…….”

아이는 제 엄마가 혼내는 줄 알곤 술술 이야길 늘어놨다.

‘뒷산에 고기가 있다고? 그건 또 무슨…….’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손이며 얼굴이며 기름 같은 걸 잔뜩 묻히고 왔으니.

“여보! 이리 와 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

남자는 좀 쉬나 했더니 마누라 등쌀에 못 이겨 나왔다.

“아델린. 다시 한번 말해 볼래?”

“그러니까…….”

아이의 말을 다 들은 둘은 긴가민가했지만 일단 짐을 꾸려 나왔다.

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는데 안 가 볼 수가 있나.

혹시나 뿔돼지가 나타나면 바로 도망쳐야 하니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꾸렸다.

그리곤 이내 잘못 선택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우야…….”

가죽이 벗겨진 채 덩그러니 버려진 거대한 뿔돼지의 사체.

아직 사냥한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채 썩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 이거 그 뿔돼지 아니에요?”

“맞는 거 같은데…….”

그런데 이놈을 누가? 그것도 퇴치했다고 보수도 받지 않고?

궁금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내 생각하길 멈췄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고길 옮기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가서 촌장님 모셔 와!”

“그, 그래요!”

그날.

크리젤 마을에선 파티가 열렸다.

누군지 모를 모험가가 잡아 놓고 간 뿔돼지 고기를 먹으면서 말이다.

“크하하! 모험가님 만세!”

“모험가님이 영주님보다 낫네! 촌장님이 그렇게 탄원서를 보내도 꿈쩍 않으시더니만!”

“예끼! 이 사람아! 그런 불경한 말을!”

“알게 뭐람? 어차피 우리 마을 같은 깡촌엔 별 관심도 없을 텐데!”

“그렇긴 하다만…….”

“떠들 시간 있으면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드셔!”

“허븝…….”

두툼한 고기 한 점을 입에 물고 나니 괜한 걱정도 사그라들었다.

* * *

“일레느!”

“네! 도련… 꺄악!”

일레느는 돌아온 날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뿔돼지의 피에 범벅이 되었으니 그럴 만했다.

“도, 도련님! 대체 이게……! 누구한테 맞고 오신 거예요!”

“으윽……. 일단 내 피는 아닌데…….”

“도련님 피가 아니라면 설마… 살인?”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으윽……!”

옷에 묻은 건 대부분 뿔돼지의 피다.

대신 크로드한테 받았던 연고의 약효가 떨어져 통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통 더 달라 그럴 걸…….’

“으흐흑……! 대체 어쩌시다가 이런 일을…….”

일레느는 마치 저가 다치기라도 한 듯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참으로 충성스런 가신이다.

나 같은 망나니 공자놈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다니.

“이, 일단…….”

신관을 불러 달라다가 참았다. 그게 다 돈이다.

이 정도 부상은 몇 밤 자고 일어나면 고쳐질 텐데.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저번에 쓰다 남은 멜람 이파리 좀 있지? 그것 좀 다져서 가져다줘.”

“멜람 이파리요? 아, 알겠어요!”

“으윽…….”

멜람 이파리는 환각 작용이 있는 풀이다. 덕분에 약용으로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이안의 경우엔 약용보단 환각 작용에 더 관심이 컸지만.

‘내일부터는 무조건 힐부터 익힌다.’

다친 뼈들이며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다행히 랭크 2가 되었으니, 힐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일레느는 얼른 이파리를 챙겨 내게 가져다줬다.

부상 입은 부위에 덕지덕지 바르자 다시금 통증이 가라앉았다.

“…흐! 좀 살겠네.”

“저,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됐으니까 이제 볼일 보라구.”

“네에…….”

일레느는 걱정스러웠지만 주인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물러섰다.

‘…뭔가 조용한데.’

이안의 기억대로라면 지금쯤 에이먼 백작이 나타나 불호령을 내렸을 거다. 그럼 이안은 또 똥 씹은 표정으로 제 방에 들어가고.

그런데 에이먼이 나타나질 않았다.

주섬주섬 남은 이파리를 챙기던 일레느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주무시나?”

“네. 오늘은 좀 피곤하다고 하셔서요.”

‘피곤하다고?’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한 양반이 피곤하다니.

“…혹시 무슨 편지라도 받으셨나?”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낮에 웬 편지 한 장을 받으시더니 그 뒤로 줄곧 표정이 안 좋으시더라구요.”

‘이런.’

올 게 왔다.

임페라 백작가의 몰락을 알리는 편지가.

“어디서 온 편지지?”

“봉투에 박힌 인장은 베네르 백작의 인장이었어요.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문양이요. 죄송하지만 내용까진 저도 잘…….”

“그래. 알았다.”

고갤 끄덕이자 일레느는 멜람 이파리를 챙겨 자릴 떴다.

이만한 대저택을 홀로 관리하니 할 일이 꽤나 있을 거다. 그러니 일레느는 자기 할 거 하라 하고.

문제는 베네르 백작령에서 왔다는 편지다.

‘정황상… 이안이 쥐어 팼다던 그 자식 때문이겠지.’

며칠 전.

늘상 들리던 술집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평소대로 이안은 고삐 풀린 개마냥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웬 처음 보는 외지인 녀석이 고래고래 소릴 지르는 게 아닌가.

‘여긴 술 맛이 쓰레기 같구만!’

거기까진 이안도 별 생각 없이 넘겼다.

‘안주도 쓰레기고!’

여기서도 넘어갔다.

‘임페라 백작이 다스리는 곳이라 그런가? 크하핫!’

이건 못 참았다. 다분히 도발적인 말에 이안은 금세 꼭지가 돌아가 버렸다.

‘뭐 이 새끼야?’

‘넌 또 뭔데?’

이안도 꽤나 미친놈이다.

이 집 술을 모욕한 건 참아도 이 땅의 주인을 욕한 건 참을 수 없다! 그런 이안은 곧바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들 투성이였다.

괜히 이안의 옆에서 그딴 소릴 내뱉은 것부터, 녀석의 얼굴이 곤죽이 될 때까지 반격 한 번 안 한 것까지.

덕분에 일방적인 린치가 이어졌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안은 제풀에 지쳐 되돌아갔다.

‘노렸구만.’

아마 그게 맞을 거다. 일부러 얻어맞으려고 이안의 성질을 긁은 거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소란은 진정됐다.

알고 보니 그는 베네르 백작의 가신이었던 자작 중 하나였다.

자작이 에이먼을 모욕한 건 베네르 백작이 사과를 하며 끝이 났지만, 고작 백작의 아들이 자작을 팬 건 결이 달랐다.

에이먼은 억울했으나 그게 바로 정치적 힘의 차이였다.

그 사실을 안 이안도 잔뜩 쫄긴 했지만 술 몇 병 마시곤 깔끔하게 잊었다.

물론 이안이 잊었다고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게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이 지경에까지 온 거다.

‘으이구.’

가뜩이나 망나니 새끼 몸에 들어온 것도 화나는데, 이젠 이놈이 싼 똥까지 내가 치워야 한다니.

뺨따귀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봐야 나만 아프겠지만.

난 서둘러 에이먼의 서재로 향했다.

끼익.

내일 따로 물어봐도 되겠지만 지금 당장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불이 꺼진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편지지 한 장을 발견했다.

똬리를 틀고 있는 뱀 한 마리의 문양.

표독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는 게 베네르 백작을 연상시켰다.

‘이거구만.’

베네르 백작.

어렸을 적 이안도 몇 번 본 적 있는 자다. 생쥐처럼 기른 수염이 인상 깊었던 걸로 기억한다.

“흐…….”

나는 차분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잘한 미사여구는 건너뛰고. 음, 그때 쥐어 팬 놈 이름이 다브네스 마지엥이란 이름이었구만. 음, 그래.’

귀족이라 그런지 예의 갖추는 말이 많았다.

‘친애하는 임페라 백작’이라든가, ‘양해를 구한다’든가. 그래 봤자 본질은 나, 정확히는 이안을 향한 비난으로 가득했다.

“…얼씨구?”

한창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치료비가 천 골드?”

이 새끼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 세상에선 소작농 한 달 임금이 1골드다. 그 말인즉, 천 명이서 한 달간 겨우 일해야 버는 돈을 치료비로 내란 소리였다.

그것도 일시불로 말이다.

웬만한 규모의 영주라면 충분히 가능은 하겠다만, 임페라 백작령은 거지 중의 거지. 상거지 백작령이다.

이런 상거지 백작령에서 천 골드는 마련하는 것조차 빠듯한 금액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도 아니고… 천 골드나?”

사람 하나 패는데 천 골드를 태워?

에이먼이 편지를 받자마자 표정이 썩은 게 이해가 갔다.

절대로 에이먼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게 왕국 법관들한테 판결을 부탁하는 걸 테고.

하지만 이미 법관들한텐 뇌물 작업까지 마친 뒤일 테니 판결은 뻔했다.

결투 재판.

거기서 에이먼은 패배하고 블랭크가 된다.

지난날 주점에서 블랭크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온 터라 기분은 더 더러웠다.

‘이런 양아치 새끼가 다 있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잘못이야 사람을 팬 이안이긴 하지만, 애초에 시비도 계획적으로 걸었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자작이란 놈이 그 허름한 곳에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책상 한편에는 몇 장의 구겨진 종이들이 있었다.

난 혹시 몰라 그중 하나를 펴서 읽어 내려갔다.

‘이런… 썅…….’

대부분 에이먼이 베네르 백작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자존심을 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베네르 백작은 이걸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다음은 예상한 대로 흘러갈 테고.

일은 내가 소설에서 읽었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지만… 실제로 겪으니 상상 이상으로 뭣 같군.’

내 랭크는 제일 높은 마법 랭크가 고작 2. 줄거리대로라면 상대는 검술 랭크 5의 괴물이다.

아마 지금의 나를 천명을 가져다 놓고 싸워도 내가 질 거다.

랭크 5와 랭크 2의 벽은 그만큼 높았다.

심지어 마법 랭크 4인 에이먼이 나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랭크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이가 극명해지니까.

이대로 결투 재판까지 가면 승산은 제로다.

‘랭크 5라…….’

공교롭게도 랭크 5를 단숨에 달성해 버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네크로노미콘.

시전자의 흑마법 랭크을 영원히 5로 고정시키는 아티팩트. 대가로 시전자의 영혼을 가져가는 악랄한 놈이다.

그걸 쓴다면 혹시 모른다.

같은 랭크 5끼리면 승산이 있을 테니까.

“…그건 안 돼.”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어찌어찌 결투 재판에서 이긴다 해도 그게 끝.

흑마법에 의해 내 정신은 조금씩 잠식되다가, 결국엔 미쳐 버리고 만다.

그러다 일레느와 에이먼을 제물로 바치고, 결국 주인공이나 누군가에게 죽을 거다.

그런데 오히려 그걸 써 버린다고?

그만한 멍청한 짓도 없다.

“끄응…….”

그렇담 천 골드를 줘 버릴까? 당연하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다.

성이라도 팔아서 준다 해도, 또 다른 구실로 시비를 걸 게 뻔하다.

그땐 더더욱 가난해져 있을 테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배는 이미 끝났다.

‘크로드.’

쾌검의 기사 크로드.

결국 그놈을 섭외한 게 다행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크로드를 섭외한 건 자충수가 아니었을까?

그것도 기사단의 유물 위치까지 알려 주면서? 소설의 미래가 뒤엉켜 버릴지도 모르는데?

“…젠장.”

영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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