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8화 (8/222)

8화

“…네놈은 목숨이 여럿이라도 되나 보군.”

“그래 보여?”

슬슬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검을 쥔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몰락해 가는 백작가라 해도 귀족은 귀족이니까. 화 좀 난다고 막 죽였다간 여간 귀찮아지는 게 아닐걸?”

“…….”

잠깐이나마 녀석의 낯빛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자꾸 귀찮게 구는 이 미친 공자 녀석을 죽일까 말까 하는.

“꺼져라. 이 이상 귀찮게 한다면 그땐 참지 않는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렇담 다음은 이놈을 설득하는 건데.

“하지만 진짠걸? 기사단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난 알고 있다구?”

녀석은 그제야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원하는 게 뭐지?”

“이해가 빨라서 좋네.”

녀석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앞으로 한 달 후면 결투 재판이 열릴 거거든. 거기에 대행인으로 나서 줘야겠어. 그럼 기사단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정확하게 지도에 표시까지 해서 말이야.”

“하.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솔직히 말하면 근거 같은 건 없다.

‘사실 전 소설 속 세상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알아요. 하하.’라고 한다면 미친놈 취급받을 테고.

난 자신 있게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내 말이 사실이란 근거는 없지.”

“…….”

“하지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 방금 네가 나한테 멀쩡한 연고를 준 것처럼.”

거짓말이란 건 대부분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다.

뭔가 득이 된다거나, 아니면 그저 재미있어서 한다거나.

방금 녀석은 내게 통증을 줄여 주는 연고를 건넸다.

굳이 독이 든 연고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난 녀석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굳이 영겁의 기사단이나 되는 녀석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괜히 그랬다간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 모두가 녀석의 검에 목이 달아날 텐데.

“난 목숨이 하나라고. 괜히 영겁의 기사단한테 거짓말을 했다간 단칼에 죽어 버릴 텐데?”

“그건 그렇지.”

“…….”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날 죽일 수 있다는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 정도로 놈과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일단은 참자. 지금 중요한 건 자존심 따위가 아니니까.

“…일단 믿어 봐라. 앞으로 한 달 뒤. 결투 재판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반드시 알려 줄 테니까. 정 못 믿겠으면 그때 내 목숨이라도 걸지.”

“흥. 이깟 깡촌에 백작 따위 죽여 봐야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나?”

“계속 그렇게 생각할 거면 그러고.”

“…….”

녀석은 고민되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고민되긴 할 거다.

우연히 들린 시골 깡촌에 백작 아들놈이 유물의 위치를 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지난 십수 년간 온 대륙을 뒤져 봤지만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을 거다.

그런 와중에 생긴 실낱같은 단서.

고작 한 달만 기다려 준다면 그 단서를 주겠다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가 없다.

“자~알 생각해 봐. 어떻게 할지.”

내가 할 건 다 했다.

떡밥도 적당히 풀었고 큼지막한 미끼도 던졌다.

이걸 무는 건 물고기한테 달렸지 나한테 달린 게 아니다.

“어때?”

“…결투 재판이라고 했나?”

‘오케이!’

여기까지 왔으면 미끼를 문 거나 다름없다.

그야 관심이 있어야 물어보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난 간략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콕콕 짚어 가며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째서 결투 재판이 열리게 됐는지부터 베네르 백작가에서 내세울 대행인이 검술 랭크 5의 괴물이란 것까지.

“…그렇게 된 거야.”

“음.”

녀석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잔머리가 꽤나 돌아가는 놈인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이었군.”

맞는 말이다.

모든 건 이안이 무작정 사람부터 패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니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난 멋쩍은 듯 어깰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녀석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상대가 랭크 5라는데도 전혀 걱정 안 하네.’

역시 영겁의 기사단 출신이라 그런가?

랭크 5의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데도 꿈쩍 않는다니.

어쩌면 난 상상 이상의 거물을 앞에 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름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대뜸 물어본다고 알려 줄 리도 없고.’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았다.”

“정말? 크하핫! 잘 생각했어!”

“하지만 명심해라. 만약 결투 재판이 끝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알았어. 그땐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

“아니. 단순히 네 녀석의 목 하나로 끝나지 않을 거다. 너와 연관된 모든 이들을 죽이고, 그다음 네놈을 처치해 줄 테니.”

“으응…….”

새끼. 말 한 번 무섭게 하네.

허언으로 하는 협박은 아닐 거다.

고문은 기본일 테고 어쩌면 임페라 백작가에 속한 다른 이들에게까지 손을 댈지도 모른다.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악인이 되기도 마다하지 않는 자. 그게 방랑기사다.

하지만 꿀릴 건 없다.

약속했던 대로 유물의 ‘위치’만은 반드시 알려 줄 거니까.

“그럼 한 달 뒤에 보지.”

“그때까지 뭐하게?”

“원래대로라면 여길 뜨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이 근처에 머물러야겠지.”

방랑기사 입장에선 임페라 백작령만큼 좋은 데가 또 없을 거다.

후미진 깡촌이라 왕국 연합의 손길도 적을 테고.

“그래 그럼. 혹시나 일정이 바뀌기라도 하면 여기로 오면 되나?”

녀석은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난 조심스레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은 그닥 별로였지만, 앞으로 잘 부탁하지. 내 이름은 이안 임페라. 말했다시피 이곳 임페라 백작령의 후계자야.”

이렇게 얘기하면 저쪽도 이름을 알려 줄 거다.

“…….”

“뭐해? 팔 떨어지겠다.”

녀석은 마지못해하며 제 손을 내밀었다.

“크로드다.”

잠깐. 크로드?

악수를 하려던 손이 우뚝 섰다. 아무래도 이거 여우 피하려다 호랑일 만난 꼴인데.

‘크로드라고?’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내 귀를 의심했다.

크로드가 왜 여기서 나와?

‘…아이고.’

그제야 눈 앞에 녀석을 다시 보게 됐다.

잔뜩 풀어해친 검은 흑발.

거적대기를 뒤집어쓴 채로 돌아다니는 방랑기사.

멍청했다.

흑발에 영겁의 기사단이라 하면 눈치챘을만도 했는데.

‘아니지. 크로드씩이나 되는 놈이 왜 이딴 깡촌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야?’

솔직히 그 이유가 컸다.

크로드는 이깟 깡촌에 있기엔 너무나도 비중 있는 캐릭터.

이안 같은 주인공의 경험치 몹이 아닌 주조연급 캐릭터니까.

‘크로드라니…….’

쾌검의 기사 크로드.

주인공 디아와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다. 그것도 수년간 이어지는 질긴 악역으로.

그저 영겁의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 A쯤으로 생각했는데.

이놈이 크로드였다고?

‘랭크빨로 세계정복!’은 크게 세 가지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뺑이 치는 첫 번째 파트.

멸망한 카잔 제국의 망령들과 엮이는 두 번째 파트.

피나는 희생 끝에 제국의 부활을 막아 내는 마지막 파트.

쾌검의 크로드가 등장하는 건 여기서 두 번째에 해당되는 스토리 라인이다.

빠르면서도 묵직한 검술로 적들을 일순간에 처치해 버리는 쾌검의 달인.

소설 읽었을 때도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크로드와 이를 막으려는 디아.

둘의 라이벌 구도 덕분에 소설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쥘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결국엔 주인공 버프에 듬뿍 절여진 디아에게 패배하고 만다.

주인공의 손에 목숨이 끊어지고 말지만, 그렇다고 마냥 나쁜 놈이라 보기도 어려운 녀석이다.

제국이 멸망했는데도 충성을 다하는 지고지순한 충성심.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살생은 절대적으로 피하는 기사도 정신까지.

직접 만나 본 바로는 그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성격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가 바라는 건 카잔 제국의 부활. 또다시 온 대륙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위험한 사상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는 전쟁고아다. 때문에 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카잔 제국이 부활한다는 건 또다시 온 대륙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쓸려 나간다는 걸 의미했다.

또다시 의미 없는 피가 대륙을 적실 테고, 디아처럼 부모 잃은 아이들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될 거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주인공 디아도 가급적이면 목숨을 빼앗진 않으려 했지만, 끝끝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크로드를 죽여 버리고 만다.

‘하……. X팔. 하필이면 크로드가 여기서 나오냐…….’

영겁의 기사단에 소속되었던 기사가 어디 한둘인가? 그래서 더욱 안일하게 생각했다.

단순히 ‘기사단의 유물’을 찾는 수많은 망령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뭐지? 갑자기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나?”

크로드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였다. 악수 하려다 말고 머뭇거리자 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졌다.

녀석도 어이가 없을 거다.

방금까지 자길 설득하겠다고 별짓 다하던 녀석이 이름 한 번 댔다고 태세를 바꾸려 하니 말이다.

‘이거 똥 밟았네.’

여기까지 와서 내빼기도 뭐하다.

사실 난 녀석에게 ‘결투 재판’ 하나만 부탁할 생각은 아니었다.

적당히 내가 아는 정보들을 이용해 잘 구슬려 내 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몸 댈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기사라면 꼬드기기도 한결 쉬울 테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주인공과 척을 지게 되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왕국 연합 따위가 아니다.

여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세상.

그런 세상에서 ‘주인공’과 척을 지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끄응……. 그런 놈한테 ‘기사단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까지 알려 주기로 했으니…….’

그나마 괜찮지 싶기도 하다.

기사단의 유물이 있는 ‘위치’만 알려 준다 했지, 그걸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하진 않았으니.

“…아니.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크로드와 깊은 연만 맺지 않으면 될 거다. 내가 녀석에게 제공하는 건 ‘기사단의 유물’의 위치뿐.

그리고 녀석은 나 대신 결투 재판에 나서 준다.

거기까지다. 그 이상 녀석과 인연을 맺지만 않으면 된다.

임페라 백작령은 지금 처한 상황만 해도 바람 앞의 호롱불마냥 위태롭다.

더 이상의 리스크를 져선 안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크로드와의 손을 맞잡았다.

‘결투 재판까지만이다. 이 이상 녀석과 엮이는 건 사절이야.’

“흥.”

크로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한 듯 험악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뭐. 계약서라도 한 장 써 줄까?”

“쓸데없는 소릴.”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크로드라면 랭크 5의 대행인 때려눕히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왜 이 녀석이 결투 대행인 얘길 듣고도 덤덤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럼. 간다.”

“오케이. 약속 시간에서 늦으면 큰일 나는 거 알지?”

“…….”

크로드는 입을 한 번 이죽거리곤 숲속으로 떠났다.

“…아!”

그러고 보니 녀석이 굽고 있던 고기가 있었지.

놈은 뿔돼지의 가죽만 챙기곤 자릴 떴다.

그렇다는 건…….

* * *

“맛은 굉장히 안정적이구만.”

산에서 살던 놈이라 누린내가 많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살점 한 조각을 먹어 본 결과 예상외로 맛있었다.

과일만 주로 먹고살던 놈이라 그런가? 씹을수록 달짝지근한 게, 딱 입에 맞았다. 뭐 누린내가 난다고 해도 똑같이 맛있는 고기겠지만.

더군다나 고기가 더욱 맛있던 건 크로드가 구운 덕이 컸다.

고기는 은은한 불에 속까지 깊숙이 익힌 덕에 분홍빛으로 예쁘게 익어 있었다.

거기다 마지막으론 센 불에 겉을 익혀 바삭함까지 챙겼다.

“크로드 이놈 이거. 맨날 떠돌아다니다가 요리 솜씨가 늘은 건가?”

어느새 입 한가득 침이 고였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고기냐.

자그마치 십수 개월 만에 먹는 고기다.

그마저도 썩은 내가 진동하던 괴수의 고기를 먹었던 걸 제하면 까마득하다.

일단 한국인의 입맛.

삼겹살부터 뜯어냈다. 비계와 살코기의 환상적인 조화!

이게 맛이 없을 수가 있나.

“허윽…….”

고길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를 맡고 산짐승들이 몰려오진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이 뿔돼지 녀석이 다 쫓아낸 듯 보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이놈을 맛있게 먹는 것뿐이다.

“쩝쩝”

한입 더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육즙과 풍미가 폭발했다.

“…어흐흑!”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누가 보면 웃을 거다. 백작이나 되는 놈이 고작 고기 한 점 먹는다고 질질 짜고 앉아 있으니.

그럼 뭐 어떤가. 눈물 젖은 빵 한 번 안 먹어 본 이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랬는데.

빵이 아니라 고기긴 하지만.

“개맛있어… X팔…….”

이 행복함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삼겹살을 베어 물고 씹기를 반복했다.

우적우적!

손과 입 주변에 기름이 잔뜩 묻었지만 그게 대수랴.

어느새 묵직하게 들려 있던 잘 익은 삼겹살이 동났다.

“끄억!”

배를 땅땅 두드리며 만복감을 즐겼다. 고기만으로 배를 채웠는데도 아직 고기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이번엔 어느 부위를 먹어 볼까?

그렇게 반나절 동안 배 터지게 먹고 나서야 식사는 끝났다.

“후아!”

내장과 지방을 다 발라낸 연분홍빛 살코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만하면 한 달은 족히 먹을 거다.

일단 크로드가 결투 재판에 나서 준다곤 했지만,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는 결투 재판뿐이 아니다.

이번 재판을 잘 넘긴다 해도, 베네르 백작놈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수작을 걸어올 터.

그때마다 크로드한테 도와달라 할 순 없었다. 그가 도와줄 확률도 적을 테고.

이를 막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강해질까.

비싼 영약이나 스승을 모셔 랭크 상승을 꾀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임페라 백작가는 찢어지게 가난했으니까.

그럼 몸이라도 만들어 놔야 한다. 이 몸을 만들려면 제일 중요한 게 고기고.

“첫 단추는 대충 꿰었다고 봐야 하나…….”

귀족이란 놈이 고작 고기 좀 얻었다고 첫 단추니 뭐니 하는 것도 웃기다.

그래. 웃기면 어떤가? 강해지면 그만이지.

“끄흐응… 차!”

뿔돼지가 이만한 덩치일 줄은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수레라도 하나 가져왔을 텐데.

하는 수 없이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만큼만 짊어지고 영지로 향했다.

남은 건 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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