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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7화 (7/222)

7화

꿀꺽!

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만한 거목을 일합에 베어 버렸다는 건 보통내기가 아니란 증거.

대체 뭐하는 놈이지? 뭐하는 놈이길래 저런 검술 실력으로도 이딴 깡촌에 떠돌아다니는 거지?

그런 내 심중을 아는 듯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라.”

녀석은 짧게 말하곤 다시 내게서 신경을 껐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

지난번 블랭크한테 빵을 쥐어 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다.

괜한 소란을 일으킬 바엔 먹다 남은 빵이라도 쥐어 주는 걸로 끝내자. 그런 거겠지.

지금 난 녀석에게 블랭크마냥 그저 ‘귀찮은 일’ 수준이었다.

살짝 기분 나쁜 말이지만 어쩌겠나. 내가 약해빠진 망나니 공자놈인 건 변함없는 사실인데.

“…….”

하지만 날 가만히 내버려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산적이었다면 날 죽이고 가진 걸 털어 갔을 테니.

어쩌면 의외로 좋은 녀석이라든가…….

“…어어!”

방금 잠깐이지만 녀석을 좋게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놈의 앞에 놓인 불더미를 보곤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고기!”

놈은 방금 내가 사냥한 뿔돼지를 제 것인양 구워 먹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돼 가며 겨우 사냥한 뿔돼지를!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처먹다니!

“…크악!”

홧김에 녀석에게 따지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몸을 움직이자 다친 상처 부위가 타는 듯이 아파 왔다.

“끄윽…….”

“하. 흙을 퍼먹질 않나. 이젠 혼자 끙끙 앓기까지 하는군.”

“이, 이 개자식이… 그건 내 거라고……!”

아픈 와중에 끙끙대며 발악해 봤지만 놈은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지? 이건 내가 눈여겨봐 둔 사냥감이다. 끼어든 건 오히려 네놈이고.”

“이그윽…….”

욕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통증 때문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받아라.”

놈은 품 안에서 조막만 한 상자 하날 내게 던졌다. 그 바람에 녀석이 걸치고 있던 거적때기가 펄럭였다.

은빛의 풀 플레이트 메일과 검 한 자루가 잠깐이나마 드러났다.

저 검은?

일단 받아 들고 보니 안에는 하얀 연고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알싸한 박하향 비스무리한 게 코를 간질였다.

“…이게 뭐지?”

“상처 부위에 발라라. 통증을 줄여 줄 거다.”

“…….”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굳이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속는 셈 치고 왼팔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 봤다.

“으음…….”

상처 부위가 화끈거리긴 했지만 끔찍했던 통증이 한결 가셨다.

난 이내 온몸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곤 빈 상자를 녀석에게 던졌다.

“이걸로 고깃값은 치른 거다.”

“…흥.”

“어디 있는 집 자식놈이 뭣 모르고 나대는 모양인데.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러니 조용히 꺼져라.”

놈은 여전히 날 경계하지 않은 채로 고기 굽기에 바빴다.

놈에게 난 딱 그 정도였다. 지나가는 새 한 마리.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 내버려둘 그런 존재였다.

방금 연고를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이 이상 선을 넘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난 녀석을 물끄러미 살폈다.

한눈에 봐도 어중띤 방랑기사는 절대 아니었다.

거기다 방금 연고를 건넸을 때 언뜻 보였던 놈의 검.

그건 흔히 볼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선.

‘이 새끼 이거…….’

난 다른 의미로 침을 질질 흘렸다.

‘방랑기사라.’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하나다.

한 달 뒤에 있을 결투 재판에서 이기는 것. 그것도 검술 랭크 5의 괴물을 상대로.

그게 내가 됐건, 아니면 그만한 괴물을 어디서 초빙해 와야 했다.

일단은 내 자신의 랭크 업을 목표로 하곤 있지만, 결투 대행인을 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거기서 제일 가능성을 두고 본 게 방랑기사다.

멀쩡한 기사가 임페라 가문마냥 다 쓰러져 가는 가문 편에 설 리는 없고, 그렇다고 어중띤 기사 지망생으론 랭크 5와 결투에서 승리할 리가 없었다.

남은 건, 실력은 있지만 모종의 연유로 인해 제대로 된 기사가 될 수 없는 자들.

방랑기사.

지금 내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컸다.

그들이 방랑기사로 전락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간혹 방랑기사들 중엔 중범죄를 짓고 도망친 놈들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방금 녀석이 찬 검을 슬쩍 봤을 때 알아차린 게 있었다.

검의 손잡이 부근에 새겨져 있던 장식. 그건 분명 하나를 뜻했다.

그가 비열한 조무래기가 아니라, 실력 하난 어마 무시한 괴물이란 걸.

그렇다면 놓쳐선 안 된다.

반드시 저 녀석을 잡아 날 돕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봐.”

“…뭐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녀석에게 말했다. 놈도 달라진 태도를 눈치챘는지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은 방랑기사다.

그 이유가 뭐가 됐건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존재.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검을 뽑는 그런 자다.

그런 자와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거다.

그렇다면 친해지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너. 영겁(永劫)의 기사단이지?”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녀석의 검이 내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피부를 얕게 베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궤적. 수십 년간 수천, 수만 번 검을 휘둘러야만 가능한 경지였다.

깔끔한 검로가 눈에 들어오긴 했다만, 이를 피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워낙 빠른 터라 눈으로 좇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흐읍!’

검은 내 피부에 얕은 상처를 남기고 멈춰 섰다. 붉은 피가 녀석의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흠.”

방랑기사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거뒀다.

“검에 반응조차 못하는군.”

묘한 기분이다.

검로가 뻔히 보이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반응조차 못하는 몸뚱이라니.

보통 이런 대목에선 “피하지 않는군!”, “그야 살기가 없었으니까!” 이딴 말이라도 주고받아야겠지만.

방금 상황은 전혀 달랐다. 명백한 살기가 느껴졌으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 죽이려다 손을 거뒀다.

“크흠.”

기분이 뭣 같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목덜미에 난 피도 대충 훔쳐 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얘길 꺼낸 이유가 뭐지?”

녀석은 굳이 자신을 도발한 이유가 뭔지 물었다.

일단 첫 번째 발자국을 떼는 데는 성공했다.

녀석의 흥미를 잡아 두는 것. 그렇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난 그냥 ‘있는 집 자식’이 아니야.”

“…그렇다면?”

“난 이 땅의 주인이 될 사람이지. 덕분에 주워들은 것도 많고.”

“주인? 후후. 다 망해 가는 거지 백작령 따위의 주인?”

“…….”

백작가 도련님을 앞에 두고 상당히 불손한 언사다.

어중띤 기사라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할 게 없지만, 아마 지금 이 근방에 그의 목을 칠 만한 이는 없을 거다.

아니, 없다고 자부한다.

이자는 ‘영겁(永劫)의 기사단’에 속했던 자니까.

“어디서 괜한 소문이라도 들은 모양이군. 어디서 들은 거지?”

놈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궁금증에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내가 자신들의 세력에 반하는 존재라면, 그 끝을 추적해 지워 버릴 생각이란 게 느껴졌다.

이럴 땐 한 가지 더, 녀석이 놀랄 만한 주제로 대화의 흐름을 가져와야 한다.

“기사단의 유물에 대한 소문도 안다만?”

“…….”

내 말 한마디에 녀석의 태도가 돌변했다.

방금까지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흉악한 살기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마치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이라도 건드린 듯 기세가 매서웠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 왔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방금 뭐라 했지?”

“뭐긴. 니가 들은 게 맞아.”

츠츠츠!

방랑기사의 손에 들려 있던 검에서 푸른 오러가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저걸로 날 베어 버리면 아마 두 동강 나는 게 아니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전기 파리채에 지져진 날파리마냥.

“5초 안에 내가 널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라.”

꿀꺽!

녀석은 매서운 살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난 그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야 난 그게 어디 있는지 아니까.”

“…농이 지나치군. 역시 안 되겠어.”

놈은 금방이라도 날 죽일 듯 검을 겨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거다.

내가 그저 미쳐 가지고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진짜로 뭘 알고서 하는 소린지 모를 테니까.

“그래. 그럼 죽여 봐. 대신 유물이 어디 있는지는 평생 모르겠지. 지금까지처럼 말이야.”

“…….”

한참이나 지속된 긴장은 녀석이 검을 치우고 나서야 끝났다.

‘휴!’

이제 거의 다 왔다.

녀석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알고 있는 거지? 그 대단하신 임페라 백작령의 귀족님께서 말이야.”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하! 그것 참 대단한 사정이로군.”

녀석은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물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론 궁금증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을 거다. 아니, 오히려 궁금해 미칠 지경일 거다.

기사단의 유물이라면 영겁의 기사단 놈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거니까.

영겁(永劫)의 기사단.

이들을 설명하려면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랭크빨로 세계정복!’에서 이들이 등장하는 건 200화가량의 과거 회상 씬에서였다.

지금은 멸망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카잔 제국.

소설 속에선 카잔 제국의 멸망 과정을 수백 화에 걸쳐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때 웬 쓸데없는 회상 씬이 200화나 되냐고 욕 엄청 달렸지.’

수백 화 동안 나오는 카잔 제국은 뭐랄까… 미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대륙의 모든 왕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날리고, 심지어 거의 이길 뻔하기까지 한 미친 나라였다.

그랬던 걸 생각하면 화끈하다 하는 게 맞나?

뭐 덕분에 지금은 화끈하게 사돈의 팔촌까지 모조리 숙청당하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겁의 기사단은 여기 나오는 카잔 제국에 속한 주력 기사단이었다.

아마 이들이 모두 무사했다면 제국은 승리했을 거다.

‘오베론’이라는 미친 먼치킨 마법사 하나 때문에 끝장나 버렸지만.

지금 눈앞의 방랑기사는 그런 정신 나간 제국의 기사단 소속이었다.

방금 전 녀석이 검을 뽑아 들었을 때 슬쩍 봤다.

놈이 차고 있던 검.

그리고 검의 손잡이 부근에 박혀 있던 특이하게 생긴 뱀의 조각.

제 꼬리를 물고 늘어진 뱀, 우로보로스의 조각이었다.

영원한 순환을 상징하는 전설 속의 용 우로보로스.

지금은 거의 금기되다시피 한 장식이다.

그런 게 새겨진 검을 가지고 다닌다면… 답은 하나다.

이자는 영겁의 기사단에 속했던 인물이라고.

한때 온 대륙을 통일할 정도로 강성했던 제국. 거기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만이 모인 영겁의 기사단.

그런 곳에 속했던 자라면 실력만으론 그 누구보다 강할 거다.

아마 검술 랭크로만 따지면 최소 랭크 5 이상?

문제는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미 제국이 멸망한 지 십수 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연합 왕국에선 제국과 관련됐던 인물들을 색출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영겁의 기사단원의 목이라면 아마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 거다.

덕분에 그에게 걸린 현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아마 이깟 거지 백작령에서 1년간 거둬들이는 수익 정도는 뛰어넘지 않을까?

그런 이와 인연을 짓는다?

그것만큼 위험한 짓은 없었다.

하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이자와 인연을 맺었다가 걸리면 그 즉시 연합 왕국의 추적대에게 죽을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걸리면’이다. 안 걸리면 안 한 거다.

반대로 이자를 그냥 보낸다면?

백이면 백 우리 가문은 몰락한다. 그건 확정사항이다.

가능성과 확정사항의 문제.

“…….”

녀석은 ‘기사단의 유물’이 궁금한 듯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어디 있는지 온 대륙을 뒤져 봐도 아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을 거다.

바로 나.

이 소설의 마지막화만 빼고 다 정독한 사람.

나만이 기사단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 있느냐면…….”

“…….”

“…안 알려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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