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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6화 (6/222)

6화

엎드리고 있는데도 키가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꼬리 끝부터 대가리까지 재면 3미터는 되고도 남았다.

가지고 온 단검 길이를 슬쩍 재 봤다. 손잡이까지 합쳐 봐야 팔뚝만 한 짧은 길이.

이걸론 백날 찔러 봐야 가죽 조금 긁히고 말 거다.

‘끄응…….’

난 더욱더 몸을 낮추고 소리를 죽였다.

한참을 경계하던 뿔돼지는 안전하다 생각했는지 먹기 좋게 널브러진 과일들을 열심히 처먹기 시작했다.

뒷덜미가 훤히 보이긴 했지만 짧은 단검으로 처치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기.

하지만 먹는 데 눈이 팔려 앞뒤 못 재고 나댔다가 죽으면 말짱 꽝이다.

‘다음에 다시 와야 하나…….’

“…푸륵?”

그냥 돌아갈까 생각이 들던 그때.

열심히 코 박고 먹기 바쁘던 뿔돼지의 움직임이 멈췄다.

“킁킁!”

녀석은 먹다 말고 코를 킁킁대며 주윌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결국 녀석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숨 죽여 상황을 살피던 나와 녀석의 눈이 마주쳤다.

“꾸이익!”

이내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놈은 위협적인 울음소릴 내질렀다.

‘하… X팔.’

이건 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기척은 완벽하게 지웠다. 문제는 이 몸뚱이인 것 같았다.

수년간 물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주정뱅이.

가만히 있어도 알콜의 냄새가 배어 나온 듯했다.

‘하는 수 없지. 적당히 뻐팅기다가 돌아가야…….’

“푸륵! 푸르륵!”

별안간 뿔돼지 놈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경계심 많은 녀석이라 금방 도망칠 줄 알았는데. 녀석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날 바라볼 뿐이었다.

“푸륵! 푸르륵!”

묘하게 기분 나쁜 울음소릴 내면서.

“설마… 이 새끼가……?”

녀석이 인간의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느껴졌다.

지금 저놈은 날 무시하고 있다.

자신을 사냥하러 온 사냥꾼이 아닌, 그저 산짐승을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간 불쌍한 나그네쯤으로 보고 있었다.

“하.”

이젠 산짐승한테까지 무시당하는 팔자라니. 서럽다.

“구륵! 구륵!”

녀석은 투레질을 몇 번 하더니 내가 올라탄 나무를 향해 고갤 들이밀었다. 그리곤 있는 힘껏 제 머릴 냅다 들이박기 시작했다.

쿵!

“으왓!”

두 팔로 안아도 한 뼘은 남을 법한 큰 나무다. 그런 나무가 녀석의 대가리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놈은 날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 먹는 달큼한 과일이 아닌 육즙이 줄줄 흘러나오는 별미쯤으로.

뿔돼지답게 머리가 엄청 좋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올라탄 나무를 뿌리째 뽑아낼 순 없었다.

반나절 정도 버티고 있으면 놈도 제풀에 지쳐 물러날 거다.

하지만.

놈한테 이따위 대접을 받고도 그냥 도망친다?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한다.

과거 이진수로 살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거대한 산만 한 덩치의 베히모스도 검 한 자루로 쓰러뜨렸던 나다.

비유가 아니다.

어찌나 몸집이 크던지 처음엔 산인 줄 알았던 녀석이니까.

그런 놈을 처치한 방법은 간단했다.

급소.

아무리 덩치가 커도 비대한 몸을 움직이는 근원까지 거대하진 않았다.

베히모스의 살집을 헤집고 파고들어 심장을 파괴하자 그 커다란 덩치가 한 방에 고꾸라졌다.

“꾸륵!”

눈앞의 뿔돼지 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베히모스에 비하면 모기만 한 수준이다.

단검으로 녀석의 급소를 꿰뚫는다면, 놈도 한 방이다.

“구르륵……!”

‘이런 무시를 받고도 참으면 병신이지.’

난 단검을 쥔 손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크흑…….”

허파가 짜부라지는 듯한 통증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오러 소드라도 뽑고 싶었지만 그건 힘들다. 오러 소드는 검술 랭크 4부터 가능한 경지.

다만 난 오러 소드까진 아니어도 비스무리한 흉내는 낼 수 있다.

이보다 더한 스킬도 난사해 본 나다.

마나가 단검 날 부분을 작게 아른거리게 만들었다.

지금 갖고 있는 쥐꼬리 같은 마나만으로는 이것이 한계.

이래야 조금이라도 관통력이 높아진다.

이걸로 놈의 심장까지 파고들기엔 살짝 부족했다.

그렇다면 노리는 건 놈의 목덜미.

마침 대가릴 나무에 처박고 있는 터라 노리기도 훨씬 수월했다.

그 부윌 향해 단검을 겨누곤 뛰어내렸다.

‘뒤져라!’

쐐액!

높다란 나무에 체중까지 실은 칼날이 쇄도했다.

…파각!

“꾸이익!”

명중이다. 하지만.

“꾸이이익!”

“으응?”

아쉽게도 놈의 숨통을 끊지는 못했다. 이내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콰르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던 몸이 땅바닥을 굴렀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둥글게 말아 충격을 줄여 뼈가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인대가 늘어났는지 왼쪽 어깻죽지에서 끔찍한 통증이 뒤따랐다.

“크윽……!”

“꾸이익!”

공격이 빗나간 건 아니었다. 녀석은 목덜미에 큰 상처를 입은 채로 피를 쏟아 내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단검이었다.

오른손엔 알테아의 단검날이 부러진 채로 손잡이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젠장…….”

무리하게 몸을 쓴 탓일까. 온몸의 근육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뿔돼지 한 마리다. 겨우 뿔돼지 한 마리 잡는 데 리스크가 이 정도라니.

“꾸르륵……!”

뿔돼지는 목덜미에 단검날이 박힌 채로 다시 움직였다. 단검이 박힌 상처에선 붉은 핏물이 울컥였다.

놈의 눈빛은 방금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단순한 사냥감을 보는 눈이 아닌, 목숨을 건 투사의 눈빛.

놈은 날카로운 뿔을 내게 향한 채로 발을 굴렀다.

쿠구구……!

이대로 녀석의 공격에 당하면 끝이다. 난 녀석의 뿔에 꿰뚫려 죽어 버릴 테고.

녀석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얼마 못가 죽을 거다. 그럼 뭐하나. 내가 죽는 건 변함없을 텐데.

무기도 없고,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랭크도 부족했다.

마법 랭크 1의 코찔찔이가 날린 일격으론 녀석의 숨통을 끊을 수 없던 것이다.

“크흐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난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처절한 싸움이 과연 얼마만일까?

십수 개월간 아무것도 못하고 굶어 죽었던 나다.

그때에 비하면 차라리 이게 낫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는 건 아니니까.

“어디 한번 와 봐라! 돼지 새끼야!”

“꾸르륵!”

이내 녀석의 돌진이 시작됐다.

녀석 역시 힘이 많이 빠져 보였기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앞에 섰다.

…쾅!

난 녀석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냈다.

“크악!”

육중한 무게감에 몸이 살짝 떠올랐지만 녀석의 두 뿔을 붙잡고 버텼다.

그래도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충분히 버틸 만했던 것이다.

두 손은 놈이 흘린 피와 내 피가 뒤섞여 피범벅이 됐다.

내 예상보다 훨씬 지독한 녀석이다. 이만한 피를 쏟고도 살아 움직인다니.

“꾸익! 꾸이익!”

놈은 머릴 사정없이 흔들며 적을 떼어 내려 안간힘 썼다. 여기서 떨어졌다간 놈의 아가리에 짓이겨 죽고 만다.

“크으윽!”

이쪽도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뿔에 매달렸다.

그리곤 녀석의 아가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거죽을 뚫을 수 없으면 안에서부터 공격하면 된다.

부드러운 속살이 손에 한가득 잡혔다. 난 그 상태에서 마법 하날 시전했다.

마법 랭크 1이나 쓸법한 아주 기초적인 마법.

실오라기마냥 얇은 불로 이루어진 화살 한 발.

‘파이어 볼트!’

오른손 주위로 마나가 응집되며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뿔돼지를 쓰러트리기엔 부족해 보였다. 이 녀석의 두툼한 살가죽에 썼다간 살짝 그을리고 끝날 거다.

하지만 살갗을 뚫고 그 안에 퍼붓는다면?

곧바로 놈의 내장을 따끈따끈하게 익힐 것이다.

난 파이어 볼트를 녀석의 아가리 속에서 터뜨렸다.

치이익!

“크윽……!”

덕분에 손이 까맣게 탈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나한테 들어오는 데미지가 이 정도라면, 녀석은 더할 거다.

“꾸이이익!”

챠르륵……!

이내 녀석의 입가에서 고소한 고기 굽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냄새 때문에라도 더 안간힘을 쏟았다. 이놈만 처치하면 먹을 수 있다.

산더미만 한 삼겹살을!

치이이익!

“…꾸익!”

“그냥 좀 죽어라!”

순순히 삼겹살을 내놓았음 좋았을 텐데.

녀석은 날 떨쳐 내려 안간힘을 써 가며 최후의 발악을 펼쳤다.

…펑!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내 마나도 바닥을 드러냈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건가? 뭐 대단한 적과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뿔돼지 한 마리한테? 그건 오바지!

…쿵!

“…응?”

검붉은 피가 놈의 코와 입을 타고 터져 나왔다.

다행히 녀석은 그걸 끝으로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하마터면 고기 맛도 못보고 죽을 뻔했네.

“흐아!”

순간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온몸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몸 상태를 재빠르게 살폈다.

오른손 뼈가 좀 부러지고, 근육이 늘어져 꼼짝도 못하고, 갈비뼈 몇 개가 살짝 금이 간 정도?

아파 죽을 것 같지만 죽진 않을 정도다.

“흐아아…….”

반짝.

정신을 잃을 것만 같던 그때, 왼손이 반짝였다.

[랭크가 변경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왼손을 펼치자 친절하게도 안내 문구가 하나 튀어나왔다. 바들거리는 왼손을 간신히 들여다보자 랭크가 바뀌어 있었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2(마법), 1(검술)

“크흐흐… 그래도 1씩 올리긴 했네…….”

방금 사냥 덕분에 마법 랭크뿐만 아니라 검술 랭크까지 1씩 올랐다.

알테아의 단검이 부러졌으니 아티팩트로 얻은 효과는 아니었다.

그만한 개고생을 했는데도 고작 1밖에 안 오르다니. 랭크 3까진 어지간한 바보가 아닌 이상 오를 텐데.

“흐흐… 그래도 이게 어디야? 사냥 한 번으로 오른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사냥한 뿔돼지 몸뚱이를 바라봤다.

이건 뭐 거의 경차만 한 덩치다. 그 말은 내가 아무리 먹어도 줄질 않을 거란 거고.

“크흐흐!”

고기다.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고기!

“흐흐… 흐으……. 일단… 좀 쉬자…….”

무리한 탓인지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이내 사위가 어두워지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치이익…….

달콤한 꿈이다.

옆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고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아무리 먹어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헤헤…….”

동료 녀석들도 이걸 먹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버석!

“음?”

그런데 고기라 하기엔 맛이 좀 이상했다. 흙을 씹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어떻게 구한 고긴데…….’

굶어 죽었을 때뿐만 아니라 이안의 몸에 들어와서까지도 그토록 바라던 고기다.

그걸 그저 맛없다고 안 먹을 순 없었다.

버석… 버석…….

뭐 이런 해괴한 꿈이 다 있냐.

“으음…….”

한참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던 난 왠지 모를 기시감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마주한 건 입 안 한가득 흙을 퍼먹고 있는 나였다.

“…으웩! 에퉤퉤!”

귀족씩이나 돼 가지고 흙을 퍼먹고 앉아 있다니.

“살아 있었나.”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던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소리가 난 곳엔 한 남자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낡아 빠진 거적때기를 두른 검은 흑발의 남자가 내게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

그리곤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고갤 돌렸다.

‘가만……. 저 복장은?’

지난번 술집에서 봤던 그 녀석이다. 블랭크한테 자비를 베풀었던 이 세상 사람치곤 흔치 않았던 남자.

‘저 녀석도 듣고 따라온 건가?’

탄원서 내용까지 저 녀석이 알았을 리는 없고. 주정뱅이들이 떠벌리고 다니던 걸 나처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왜? 뭔가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놈이다.

거적때기로 감추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 반짝이는 갑주가 보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

저런 차림새로 돌아다닐 만한 놈들은 하나밖에 없다.

‘방랑기사였군.’

주인을 잃은 채 떠돌아다니는 기사.

대륙전쟁이 끝난 지는 한참이나 지난 지금,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뿔돼지도 방랑길에 간간히 먹을 식량이나 구하러 온 거겠지.

“…….”

난 조심스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떠돌이 방랑기사지만 그래도 기사는 기사다.

최소 검술 랭크 4는 돼야 기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방금 랭크를 올리긴 했지만 녀석에겐 상대도 안 될 게 뻔했다. 게다가 이쪽은 살짝만 건드려도 숨넘어갈 지경이고.

더군다나 지금 놈이 앉아 있는 나무 그루터기. 방금까지만 해도 큼지막한 나무가 박혀 있던 자리.

‘설마 저 녀석…….’

녀석의 등 뒤엔 깔끔하게 잘린 나무가 한그루 쓰러져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절단면이다.

단칼에 베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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