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직 에이먼의 손이 멀쩡히 달려 있는 걸 보면 갱생의 여지는 있다.
‘방금 베네르 백작의 가신을 쥐어 팼다고 했지?’
희멀건한 곡물죽을 눈앞에 두고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소설 속 설정과 지금 이 세상의 시기를 따져 본다면 아마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에이먼은 베네르 백작가와 다툼이 있었다고 나온다.
정확히 무슨 원인인지는 안 나와 있었다만, 결과는 나와 있었다.
‘결투 재판.’
그게 두 가문 사이에 내려진 판결이다.
법률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아니라 결투를 통해 치러지는 재판.
신께서 누가 옳은지 판단을 내려 준다는 소리다.
대한민국의 이진수가 가진 상식으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판결이다만, ‘랭크빨로 세계정복!’에선 늘상 있는 일이다.
‘힘이 곧 법이다.’라는 걸 교묘하게 신의 섭리인 것마냥 포장했을 뿐이다.
원칙상 두 가문의 가주가 서로 싸워야 했지만 돈이 있는 경우엔 결투 대행인을 내세워 재판에 참가시킬 수 있다.
‘거기서 에이먼이 졌지.’
승부는 불 보듯 뻔했다.
임페라 백작가는 가난했고, 베네르 백작가는 부유했다.
에이먼도 마법 랭크 4로 귀족치곤 꽤나 강한 축에 속했지만, 어디까지나 ‘귀족 치곤’이다.
베네르 백작가는 준비했다는 듯 검술 랭크 5의 괴물을 데려와 대행인으로 내세웠다.
에이먼 백작은 어떻게든 이겨 보려 발버둥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결투 재판에서 패배하고, 대행인은 무자비하게 에이먼의 왼손을 베어 버린다.
‘왼손만 베는 걸로 끝낸다라…….’
목숨을 거둘 수도 있는데도 손만 베는 걸로 끝낸다.
다분히 자비로운 처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긴 랭크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세계.
그리고 이 랭크는 왼손에 적힌 룬 문양으로 판가름 난다.
이 왼손이 날아가 버린다는 건? 랭크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갑옷까지 왼손을 지키는 데 많이 발전한 정도였다.
단순히 랭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왼손을 잃는 순간, 단전을 폐하는 것마냥 체내의 모든 마나를 잃고 폐인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게 바로 블랭크(blank).’
블랭크(blank).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
‘랭크빨로 세계정복!’의 세계관에선 랭크가 굉장히 중요하다.
왼손에 적힌 랭크가 곧 그 사람의 강함의 척도가 되고, 명성이 된다.
그럼 이 왼손을 잃는다면? 그 즉시 가축 이하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단순히 랭크를 확인하고 말고 할 게 아니다.
왼손을 잃는 즉시 체내에 모든 마나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니까.
그게 바로 ‘블랭크(blank)’. 말 그대로 세상에서 공백이나 다름없는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여긴 그런 세상이다.
지구에서 발할라 시스템의 가호를 못 받으면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듯이, 블랭크가 그러했다.
왼손을 잃은 에이먼 백작은 블랭크가 되는 동시에 마법을 포함한 모든 걸 잃고 폐인이 된다.
그리곤 절망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
그다음은 이안이 에이먼을 따라 가주가 되고…….
‘ㅈ망길 확정이지.’
일단 내가 이안의 몸에 들어오긴 했지만, 에이먼이 블랭크가 되는 건 막아야만 했다.
그나마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임페라 가문이 몰락으로 직행하는 코스니까.
이안이 베네르 백작의 가신을 쥐어 팼다곤 하나, 십중팔구 베네르 백작이 파 놓은 함정일 것이다.
일을 크게 만들어 결투 재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아직 정식으로 결투장이 날아온 건 아니니 여유가 좀 있다. 그 전까지 무슨 수를 써야 했다.
랭크를 올려 내가 대신 나가든, 아님 랭크 5와 대적할 만한 사람을 구해 오든.
후릅.
에이먼이 자릴 비우고 홀로 남아 죽을 한술 펐다. 예상했던 대로 최악의 맛이다.
떫고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입 안을 콕콕 찔렀다.
원인 모를 비릿한 향이 코를 찌르고, 간이랄 건 소금 간만 겨우 들어간 게 전부다.
아사직전까지 갔다가 처음 먹는 식사가 고작 이거라니. 억울하다.
이래선 계속 이딴 곡물죽만 퍼먹다가 몰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때가 되면 주인공이 나타나 날 죽여 버릴 테고.
‘먹을 게 없어 절절 매는 귀족이라니.’
내가 상상하던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산해진미라도 기대했다가 이딴 걸 먹으려니 좀체 손이 가질 않았다.
탁.
“도, 도련님도 그만 드시게요?”
일레느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했다.
자기가 만든 죽이 뭔가 이상한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던 눈망울이 울상 짓자 괜한 동정심이 일었다.
이만한 대저택을 혼자 관리하는 것도 힘들 텐데. 아마 먹는 것도 우리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 좋은 걸 먹지는 못할 거다.
다른 시종들이 모두 떠났음에도 일레느는 끝까지 남았다. 심지어 저택이 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도.
한평생 임페라 가문을 위해 몸 바쳤지만 한 치의 보답도 받지 못한다.
이런 시종이 있으면 미안해서라도 개과천선했겠다. 머저리 같은 놈.
“…입맛이 별로 없군.”
“아…….”
“적당히 치워라. 식사는 나중에 배가 고프면 다시 하지.”
“네. 나중에라도 시장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셔요!”
입맛이 없단 말에 그제야 일레느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 * *
철컥.
식사라 부르기엔 많이 부족한 뭔갈 끝내곤 방에 콕 틀어박혔다.
이안의 주변 상황은 대강 파악했다.
평판은 개쓰레기에, 귀족이란 타이틀이 아까울 정도로 빚만 많고, 앞으로 한 달 뒤면 결투 재판이 열린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랭크.”
개망나니가 이제 와서 멀쩡한 척하고 다녀 봤자 되려 미쳐 버렸단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기한은 한 달.
그 안에 확실한 변화를 주기 위해선 랭크 말곤 없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1(마법)
“하…….”
랭크를 확인하자 다시금 현타가 몰려왔다.
마법 랭크가 1이긴 하나, 이 정돈 일곱 살 난 애들도 익힐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이안도 일곱 살 때 잠깐 마탑에 들렀다가 획득한 랭크였다. 그 이후로 수련하곤 담을 쌓아 여전히 그 수준에서 머물고 있었다.
발할라 시스템이었다곤 하나 만렙까지 찍었던 내가 랭크 1이라니!
랭크 1은 어린아이가 검 몇 번 휘두르면 얻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빨리 랭크를 올려야 한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ㅈ망길 확정이다.
목표는 뭐가 됐건 간에 하루라도 빨리 랭크 3까진 올리는 것.
이 세상에서 그나마 좀 뻗대고 다니는 수준이 바로 랭크 3.
여기까진 돼야 용병이든 뭐든 밥 벌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랭크 1이야 말할 것도 없고, 랭크 2는 잘해 봐야 신출내기 용병 나부랭이가 고작이다.
검술 랭크건 마법 랭크건 3은 돼야 제대로 된 의뢰도 받고 하는 게 이 세상의 상식.
다행히 소설 설정상 랭크 3까진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경지다.
아마 평생 청소만 하면서 산 일레느도 4,5년 정도 검술 랭크 업에 매진하면 3까진 올릴 수 있을 거다.
일례로 그녀도 지금 집안일 관련 랭크가 3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이안은 그마저도 못한 머저리 새끼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른바 첫 번째 벽.
랭크를 올릴 때 가장 많이 마주하는 벽이 바로 이 랭크 3과 4의 경계다.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라 불리는 이 벽.
평생을 노력해도 재능이 없다면 랭크 3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벽을 넘은 만큼 대우도 천차만별이다.
단순한 용병 나부랭이가 아닌 기사라 불리는 경지.
때문에 랭크 4부터는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닐 수 있다.
오죽하면 뭐가 됐건 랭크 4만 찍으면 인생 폈다는 말까지 할까.
그렇다고 첫 번째 벽만 넘으면 그게 끝이냐?
아니다.
격차는 뒤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랭크 4의 인재들 중 1할만이 랭크 5에 도달할 수 있고, 랭크 5의 괴물들 중 1할만이 랭크 6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 고르고 골라 태어나는 게 랭크 7.
랭크 7의 경우는 마탑주나 왕실기사단장급인 것이다.
그만큼 힘의 차이 또한 압도적으로 벌어진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경지 수준으로.
전쟁에서 마탑주 혼자 워메이지 수백을 무참히 도륙해 버리는 건 보기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런 기사단장과 마탑주마저 어린 아이 수준으로 다루는 게 랭크 8.
전설 속 주인공 대부분이 랭크 8이다.
용을 단신으로 때려잡았다거나, 마왕을 홀로 무찔렀다거나, 그런 영웅담 말이다.
여기까지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강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랭크 9까지 있긴 하지만 그건 소설 전체에서도 딱 한 놈밖에 안 나오니 넘어가도록 하고.
거기까지 생각해 봐야 내 처지만 비참해질 뿐이다.
그런 어마무시한 자들에 비하면 랭크 1은 개미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다.
지금 내가 그거고.
“후.”
방문 걸쇠가 잠겼는지 꼼꼼히 확인하곤, 침대 한가운데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곤 대한민국의 이진수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흐읍.”
주위로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격변을 겪기 이전의 나였다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겠지만. 대격변을 겪은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했다.
세상 모든 물질들의 원천이 되는 힘.
마나.
‘랭크빨로 세계정복!’ 세계 속 마나는 살짝 다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저 기우였다.
대격변이 일어난 후 지구의 대기와 너무나도 흡사한 주변 환경에 난 고갤 갸웃했다.
‘대체 뭐지? 어떻게 소설 속 세상에 지구와 똑같은 마나가…….’
잡념에 빠져들라 하자 고개를 홰홰 저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갠가? 정신 차려 보니 웬 망나니 새끼 몸뚱이에 들어온 것만 해도 충분히 이상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당장 살아남는 데에 집중하자.
정신을 가다듬고 마나의 기운을 느끼는 데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대지에 짙게 퍼져 있는 마나의 농도는 네 번째 대격변 당시 지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만하면 마나를 흡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흠. 그건 그렇고…….”
소설에서 봐 왔던 터라 예상은 했다. 문제는 지구 사람과 다른 신체구조였다.
지구에서의 마나 운용은 단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단전을 통해 마나를 운용하고 점차 쌓아 나가며 크기를 늘려 나가는 게 모든 마나 수련의 기본법이다.
하지만 배꼽 아래 하복부에선 단전이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단전의 크기가 작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꽉 막힌 바위처럼 마나를 느낄 혈맥 자체가 막혀 있었다.
이게 이 세상 사람들이 멸망한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갖는 차이점이다.
랭크 시스템을 사용하는 대신, 단전이 없는 것이다.
‘이거 원 배를 뒤집어 까 볼 수도 없을 노릇이고.’
대신 단전을 통해 흘러야 할 기운이 왼손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거 참 신기하네.’
단전의 기운이 왼쪽 손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빼면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신체 구조가 가능한 거지?
…하긴 이곳 사람들이 봤을 땐 지구 쪽 사람들이 괴상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세상에 어떻게 마나가 배 속에서 샘솟지?”라면서 말이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깊게 생각하려 하진 않았다.
조용히 마나를 느끼며 단전이 아닌 왼쪽 손으로 마나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흐읍.”
왼손을 펼쳐 흘러 들어간 마나를 한데 뭉쳤다.
바앙.
코딱지만 한 빛이 모여 은은한 빛을 반짝였다.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등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크학!”
그와 동시에 폐가 짜부라지는 듯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억지로 마나를 쥐어 짜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별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다. 그저 마나를 모아 한데 집중시켜 본 게 다다.
겨우 그것만으로 이안의 몸엔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시팔… 뭔 놈의 몸뚱이가 이래?”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계속해서 마나를 모으고, 체력을 가다듬고, 다시 모으는 걸 반복하길 수차례.
어느새 뽀송뽀송했던 옷이 축축한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크흐!”
그쯤 되자 이안의 몸으로도 마나를 운용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익숙’해진 정도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1(마법)
“하이고…….”
땀에 흠뻑 젖은 왼손을 펼쳐 확인해 봤지만, 마법 랭크 1에 불과한 쓰레기 몸뚱이는 그대로였다.
꼬르륵!
“어우.”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배 속이 요동쳤다.
“뭐 좀 먹을 거 없나?”
방금 점심으로 먹은 곡물죽이 떠올랐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끄응…….”
백작이나 되는 놈이 배가 고파 수련을 못한다니. 어이가 없네.
“에휴.”
귀족이라길래 매일 산해진미로 상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먹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래선 랭크를 올리는 것도 문제겠는데.”
일단 염두 해 둔 랭크는 검술. 검술 랭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널리 통용되는 랭크다.
하지만 벌써부터 문제다.
상위 랭크라면 모를까 하위 랭크는 체력부터 길러야 했다.
몸에 근육도 붙이고 해야 검을 휘두르든 말든 할 테니까.
술에 절어 운동하곤 담 쌓고 산 이안의 몸뚱이론 시작부터가 어려웠다.
“검은 무슨.”
손가락은 뼈만 앙상히 남아 살짝 건드려도 부러질 지경이다.
그렇다면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린데……. 곡물죽만 겨우 먹는 걸론 근육이 붙을 리가 없다.
고기. 하다못해 생선이라도 먹어야 근육을 붙이든 말든 한다.
“첩첩산중이구만.”
이 빌어먹을 몸뚱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