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안 임페라?”
‘이안 임페라’라는 이름을 보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도 그럴 게 이안 임페라라면 ‘랭크빨로 세계정복!’에 등장하는 머저리 중에 머저리. 일명 ‘거지 백작’이라 불리는 녀석이니까.
다시 한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퀭한 눈.
부스스한 금발.
턱 끝까지 내려올 듯한 다크서클. 주독으로 뻘겋게 달아오른 콧잔등까지.
소설 속에서 묘사되던 이안의 모습 그대로였다.
굳이 다른 걸 꼽자면 소설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어려 보인다는 거?
그거 하나 빼곤 영락없는 술주정뱅이 망나니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 망나니 새끼가 나란 거고.
“뭐 이런 병신 같은…….”
“저기……. 도련님?”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여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단 걸.
“…일레느.”
이안의 기억을 엿본 터라 여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임페라 백작가의 마지막 남은 시종 일레느.
어렸을 적 임페라 가문에서 거둬 준 은혜를 끝까지 져 버리지 않고 저택 자체가 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도 꿋꿋하게 자릴 지킨 여자.
덕분에 유령이 되어 저택을 떠돌다 주인공 일행에게 퇴치당하는 걸로 묘사된다.
“네! 도련님! 말씀하세요!”
일레느는 혼란스러워하는 주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숙취로 사리분별이 안 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착잡한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미소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잠깐 나가 있어라.”
“어엇……. 네! 그럼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일레느는 내 말투가 살짝 어색한 듯 고갤 갸웃했지만 군말 없이 잰걸음으로 자릴 비켜 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아직은 다리가 있네.’란 말이 나올 뻔했다.
일레느를 내보내곤 지금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손도 쥐락펴락 해 보고 몸 구석구석 더듬어 보기도 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손으로 가슴팍 부근을 세게 꼬집었다.
볼을 꼬집는 것도 있지만 여기가 제일 아프다. 꿈이라면 안 아프겠지만.
“…허윽!”
일부러 엄청 세게 꼬집었다가 금방 후회했다.
“어으윽…….”
허파가 쪼그라들 듯한 통증이 한동안 가슴팍 부근에 맴돌았다.
“씨팔…….”
아무래도 꿈이나 환상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내가 이안 임페라가 됐다는 건데.
“하.”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분명 나, 대한민국의 이진수는 굶어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황상 굶어 죽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이상한 놈 몸뚱이 속에 들어와 있다고?
그것도 발할라 시스템에 줄기차게 올라오던 소설 속 캐릭터로?
“뭐 이딴 쓰레기 같은 일이…….”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제발 꿈이라면 조용히 깨길 바라면서.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어느덧 반나절이 지났을 때쯤 깨달았다.
이건 꿈도 뭣도 아닌 지독한 현실이다.
“…개X바아아알!”
허공에 욕지거릴 내뱉어 봤지만 목만 따끔거릴 뿐이었다.
“…후.”
상황이 뭣 같긴 하다만.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게 그저 꿈이라면 더 끔찍했다.
꿈에서 깬다면 멸망한 지구에서 다시 굶주려야 할 테니까.
그에 비하면 여긴 그나마 형편이 좀 낫다. 비록 소설에선 ‘거지 백작’으로 나오는 녀석이긴 했지만.
십수 개월간 굶어 죽어 가던 인생보단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낫네.”
벽에 붙은 거울을 떼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술독에 쩔어 피부가 상하긴 했지만 소설 속 묘사보단 묘하게 젊어 보였다.
“그게 좀 이상하단 말이지.”
거지 백작 이안 임페라.
소설 중간 즈음부터 등장하는 악역 비스무리한 녀석이다.
귀족들 간 정쟁에 밀려나 가진 거라곤 다 쓰러져 가는 성 하나뿐인 거지 백작.
결국 골방에 틀어박혀 악마와 계약하는 바람에 나중 가선 주인공한테 죽는 놈이다.
녀석이 죽을 때가 대충 이십대 중반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이안의 얼굴은 십대에 가까웠다.
“끄응…….”
다시 한번 이안의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비뚤어지기 시작한 이안.
그의 아버지이자 현 가주 에이먼 임페라는 그런 아들의 투정을 뭐든 다 받아 줬다.
그 결과가 이거다. 더럽게 싸가지 없는 망나니 새끼.
시종한테 손찌검 하는 건 기본이요, 물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에, 싸움도 못하면서 백작가 타이틀만 믿고 시비 걸고 다니는 쓰레기다.
그렇게 살기를 십수 년. 작년에 치룬 성인식에서까지 깽판을 친 이후로 에이먼도 그를 달갑지 않아 하고 있었다.
“그래. 작년에 성인식을 치렀으면…….”
이 세계에서 성인식은 16살에 치른다. 그렇다는 건 이제 고작 17살의 어린 청년이라는 것.
게다가 현 가주는 에이먼. 이안이 흑마법에 손을 대는 건 가주에 오르고 난 뒤다.
“그나마 다행이네. 여기서 흑마법까지 손을 댔으면 끝이었는데.”
가문이 위태위태한 지경에도 술만 처마시고 다니던 걸 보면 머저리 새끼인건 틀림없지만, 그래도 사지 멀쩡히 달린 상태인 게 어디냐.
“주인공 녀석이랑은……. 거리가 좀 있는 놈이지.”
비유이기도 하면서 아닌 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디아’. 이안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은 연합력 15년이니까… 디아는 12살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다.
아마 지금쯤 제니스 기사학교에서 죽어라 구르고 있을 거다. 이곳 임페라 백작령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임에도 쟁쟁한 귀족 자재들 사이에서 기사학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전형적인 먼치킨 캐릭터다.
그게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십 년쯤 후엔 날 죽일 놈이기도 하고.
“흐음…….”
가뜩이나 소설 속 망나니가 돼 버린 것도 서러운데 주인공한테 죽는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이대로 계속 망나니처럼 살았다간 진짜 이안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거다.
이안의 아버지 에이먼은 시름시름 앓다 죽을 거고, 뒤이어 가주가 되면 흑마법에 손을 대고 만다.
아까 본 일레느란 시종도 흑마법의 제물로 유령이 되어 저택을 떠돌게 된다.
그러다 주인공한테 다 죽는다.
대한민국의 이진수의 삶은 끔찍했다.
스무 살 때 첫 번째 대격변이 시작된 이래로 십 년.
살기 위해 개처럼 살다가 결국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한 삶이다.
그런데 또 죽으라고?
그것도 소설 속 거지 백작으로, 주인공의 손에 비참하게?
…까득!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 망할 세상이 왜 날 불러들인 건진 모른다. 하지만 그딴 멍청한 방식으로 또 죽는 건 절대 못 참는다.
우선 이안 이놈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랭크빨로 세계정복!’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랭크가 시작이자 끝인, 랭크 망겜인 세상이다.
아무리 망나니 새끼여도 랭크만 높으면 떠받들어 주고, 아무리 심성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랭크가 낮으면 벌레 취급 받는다.
물론 랭크 높은 놈이 이안처럼 다니진 않겠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주인공과 싸울 당시엔 꽤나 고전했던 상대기도 했고, 어쩌면 능력치 자체는 쓸 만할지도 모른다.
예상외로 노력을 안 하는 재능충이었다든가, 그럴 수도 있잖아?
꿀꺽!
“제발 높게 나와라…….”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왼손을 펼쳤다.
바앙.
이질감이 느껴지면서 살짝 익숙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제일 먼저 나오는 이름. 발할라 시스템과 상당부문 흡사했다. 강할수록 랭크가 높게 나오고, 약할수록 랭크가 낮게 나온다.
대신 검술이면 검술 랭크, 마법이면 마법 랭크. 이런 식으로 각각의 재능이 나뉘어서 측정된다는 차이가 있다.
거기다 이 세상에서 랭크는 9가 끝. 소설에서도 랭크 9의 괴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다.
“후…….”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왼손 위로 떠오른 반투명한 창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1(마법)
“아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몸뚱이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랭크가 1 미만이면 아예 측정조차 되지 않는다. 그 말인즉 다른 건 죄다 ‘0’이란 소리다.
이안 임페라 이 자식은 쩌리 중에서도 쩌리. 쓰레기에 가까운 랭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럼 이거 완전히 나가린데.”
이래서 흑마법에 손을 댄 건가? 정상적인 루트론 더럽게 약해서? 아니 그보다, 이딴 놈 영혼을 받고 흑마법 랭크를 5까지 올려 줘? 이건 악마가 호구 잡힌 수준인데?
그냥 다 때려 치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꼬르륵!
“으음…….”
이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팠다. 하기야 저쪽 세상에 있을 때도 굶어 죽었으니 오죽하겠나.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일레느다.
시종이라 해 봐야 일레느밖에 없다. 절반은 이안의 망나니짓에 질려 떠나고, 나머지 절반은 고용할 돈이 없어 내쫓았으니까.
“저기……. 도련님?”
“…뭐지.”
“그……. 식사는 어떻게 하실지 여쭤보려구요. 평소처럼 방에 올려 드릴까요?”
“식사?”
밥을 준다고? ‘식사’라는 단어 하나에 정신이 번쩍 들어왔다.
식사.
너무 강해져 십수 개월간 굶어 죽었던 나였다.
그런 내게 밥이라니! 듣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상황이 뭣 같긴 하지만 그래도 먹고살아야지.’
일단 뭘 먹고 난 다음에 생각해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법이다. 절대 식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내려가겠다.”
아무래도 내 방까지 올려다 주는 거면 본판에 비해 좀 부실할거다. 이왕 먹는거 상다리 부러지게 먹어봐야지.
“쓰읍…….”
줄줄 샘솟는 침을 일레느가 눈치 못 채게 몰래 닦았다.
“네! 그럼 준비해 놓고 있을게요!”
“후후.”
그나저나.
귀족집 아드님은 뭘 먹으려나?
* * *
‘이건 아니지.’
멍하니 눈앞에 놓인 죽을 내려다봤다. 희멀건한 게 건더기랄 것도 없는 처참한 퀄리티. 곡물을 곱게 갈아 물에 탄 게 전부다.
‘나……. 귀족이라 하지 않았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메이드까지 대동하고 있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그래도 쾌차하셔서 다행이에요! 도련님! 헤헤.”
“…….”
일레느는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빵같이 보이는 무언가가 든 바구니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빵과 죽이 식사의 전부인 거 같다.
마음 같아선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이 어린 여자가 뭔 잘못이 있겠나.
돈 없는 우리 가문 잘못이지. 정확히는 도박과 술로 재산을 탕진한 내 잘못이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이안의 기억으론 어젯밤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왔으니 숙취 해소 겸 이런 죽을 내주는 걸지도 모른다.
근데 왜 눈앞의 아버지란 작자마저 이딴 걸 같이 먹는 거냐고!
“하아…….”
“반찬투정이라도 하는 게냐?”
처참한 현실에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날 못마땅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에이먼 임페라.’
소설에선 죽은 전대 가주로만 나오던 인물이다.
고작 마흔을 겨우 넘긴 나이일 텐데도 머리가 하얗게 샜다. 자식놈 때문에 근심이 많을 테니 그런 거겠지.
“이번 작황이 워낙 좋질 않은데다 니가 국세까지 털어먹어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야 한다.”
“…그렇군요.”
“매일 술이나 퍼먹고 다니니 알 턱이 없겠지만.”
에이먼은 비겁하게 팩트로 후두려 팼다.
실제로 이안의 기억을 헤집어 봐도 가문의 재정 상태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술값이야 가문의 보고를 털어 마련하면 되는 거고, 그마저도 모자라면 외상으로 때우면 됐다.
백작의 하나뿐인 아들이 외상하겠다는데 평범한 영지민이 거부할 리가 있나.
거기다 국세로 준비한 돈까지 빼돌려, 사흘 만에 빈 몸으로 돌아왔다.
이 곡물죽은 그 탓에 생긴 일이리라.
덕분에 맨날 세상물정 모르고 놀고 마시기만 하던 게 이안의 삶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게냐? 얼마 전엔 베네르 백작가의 가신을 쥐어 패질 않나. 어젠 또 술에 절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질 않나!”
에이먼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하지만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
“…에잇!”
아들놈이란 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니 참다못해 숟가락을 내던지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앗…….”
일레느는 부자 싸움에 끼여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난 콧김 씩씩 내뿜으며 뒤돌아선 에이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흠…….”
잔소리 했다고 째려보는 건 아니다. 내가 유심히 보고 있는 건 그의 왼쪽 손.
다행히 ‘아직까진’ 달려 있었다.
그 말인즉, 아직 임페라 백작령의 미래가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진 않았다는 거다.
‘조만간 타게 생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