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야차
연심을 얻은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지장보살이 현신했다 해도, 이곳 망유계에는 수많은 망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군소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더욱 기괴한 마물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합쳐져서 만들어진 시체 괴물들은 보통이고, 강력한 망자들도 등장했던 것이었다.
“제 1조, 거대한 망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이런! 저것은!”
어느 순간, 각 조에서는 다급한 무전이 계속 해서 날아들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놈들의 특징은 바로 ‘거인’.
백유현과 알파 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실체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런.”
주세광이 짤막하게 내뱉었고, 천무현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반칙 아닙니까?”
“어머, 저건 뭐람. 흉측한 것이 커지기까지 했네?”
김수향이 말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흥미로움과 감탄스러움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산 넘어 산이군.”
김현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망자들이 서 있었다.
살아생전에는 ‘거인’이라 불렸을, 고대의 종족.
“타이탄.”
박성진도 마른 목소리로 내뱉었다.
타이탄.
고대 설화에나 나오던 거인족이 여기 망유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에서 특별한 존재는 반신, 혹은 신의 반열에 올랐던 존재들.
하지만 일반 타이탄이라고 해서 절대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놀던 사이클롭스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러니 앞선 조에서 동요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타이탄 하나만 나타나도 골치가 아픈데, 무려 열 기가 넘는 타이탄들이 원정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콰앙!
“크악!”
“아악!”
타이탄들은 분노한 표정으로 원정대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원정대들도 노련하게 그 공격을 피해내고는 있었지만, 반격할 여유는 없었다.
그 와중에 일반 망자들까지 치고 들어오니 진퇴양난.
타이탄을 상대하자니 망자들이 걸리고, 망자들을 퇴치하자니 타이탄들이 치고 들어온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원정대들이 겪는 수난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서야겠군. 안 그래?”
박성진이 백유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유현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김현성도 미소를 지었다.
“가볼까? 리퍼?”
“예, 좋죠.”
철컹-
그 때 천무현도 장전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두 분 뒤에는 제가 있습니다. 크크. 걱정 말고 싸우세요. 모조리 바람구멍을 내줄 테니.”
“좋아, 그럼 우리도 질 수 없지. 세광아, 가자!”
박성진의 말에 주세광도 방패를 챙겨들었다.
“아따, 갑시다! 저 덩치만 큰 놈들 후딱 치우고 우리도 갈 길 가야지.”
“오케이! 그럼 출발하자!”
둘은 방패를 든 채 빠르게 움직였다.
그 위로 백유현이 폭풍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 리퍼, 건투를 빈다.
그리고 김현성이 빠르게 내달렸다.
- 오케이, 목표 조준 완료. 파티를 즐겨 봅시다!
천무현이 목표를 포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거대한 타이탄이 원정대 소속의 각성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김수향이 그 장면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어머, 저렇게 거칠게 굴면 엄마가 싫어하실 텐데. 후후. 그럼 나도 일을 시작해볼까?”
그녀는 허공에 수많은 방울을 띄웠다.
하나 당 힐링 효과가 녹아들어 있는 방울이었다.
그녀가 허공에 띄워 올린 방울은 지나가면서 각성자들을 회복시킬 것이다.
- 리퍼, 목표 포착. 바로 전투 개시합니다.
백유현은 거칠게 날뛰는 타이탄 하나를 포착하고는 내리꽂히듯 하강했다.
콰앙!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폭발음이 일어나며 뿌연 흙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캬아아!”
불의의 일격을 당한 타이탄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백유현은 간장과 막야, 두 자루의 검을 쥐고 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존재, 타이탄.
하지만 그에게는 다르다.
그 역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였으니까.
스윽-
백유현이 살짝 움직였다.
콰콰콰쾃!
그리고 그는 땅을 박차고 날며 앞으로 내달렸다.
“크워억!”
타이탄이 그런 그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쾅!
얼마나 강력한 공격이었던지, 주먹에 맞은 땅이 크게 뒤흔들렸다.
하지만 백유현은 이미 그 공격을 피해낸 후였다.
그리고 숨 한 번 들이쉬는 순간에 앞으로 치고 나가고 있었다.
파캉!
“크워억!”
화염에 물든 검이 타이탄의 거죽을 깊숙하게 베고 지나가자, 타이탄은 고통에 물든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놈의 고통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번쩍!
타이탄을 향해 덮쳐드는 두 갈래의 거대한 힘!
촤앗!
간장과 막야의 힘이 실린 그 날카로운 공격이 타이탄의 피부를 찢어 발겼고, 그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었다.
“크아아아!”
근육이 끊기고, 뼈가 예리하게 잘려져 나갔다.
그 고통 속에서 타이탄은 크게 휘청거렸다.
백유현이 펼친 금환식은 놈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놈이 휘청거리는 사이, 백유현은 다시 한번 짓쳐들었다.
촤앗!
한 번의 칼질에 타이탄의 몸이 쪼개져 나갔다.
그리고 놈은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각성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와아아!”
“백유현이 타이탄을 쓰러뜨렸어!”
“아씨, 진짜 멋지네! 최고다!”
그런데 잠시 후, 저쪽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현성, 힘내라!”
그쪽에서는 타이탄 하나와 김현성이 맞붙어 있었다.
타이탄이 강력한 공격을 연이어 날렸지만, 김현성은 재빠르게 공격을 피해냈다.
그 역시 백유현에게 밀리기는 했지만, 역시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딜러다운 모습이었다.
파각!
그 순간, 김현성이 타이탄을 쓰러뜨리는 것이 보였다.
“와아아아!”
각성자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벽처럼 느껴졌던 놈이 잡혔다.
“자, 우리도 질 수 없지! 밀어 붙이자!”
“그래, 우리도 할 수 있어!”
두 사람의 선전에, 다른 각성자들은 크게 자극을 받았는지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콰쾅!
그 때, 그들 앞에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타이탄 하나가 크게 휘청거렸다.
놈은 사나운 포효를 터뜨리며 각성자들에게 덤벼들려던 중에, 탄환을 맞고 밀려난 것이다.
철컥-
다시 특수탄환을 장전하며 천무현이 씩 웃었다.
“여기도 있다고. 감히 어딜.”
콰쾅!
그리고 그의 총구가 다시 불을 뿜었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날아간 탄환이 폭발하며 타이탄의 한쪽 가슴에 구멍을 냈다.
“놈을 잡아라!”
타이탄이 뒤로 밀려난 사이, 각성자들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무기를 휘두르며 타이탄을 공격했다.
“크워어어!”
타이탄이 발광을 하며 날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크워어어어-”
무수한 공격 끝에 놈은 그대로 쓰러졌다.
“타이탄을 잡았다!”
“우리도 해낼 수 있어!”
타이탄을 잡아내자, 각성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절대 넘지 못할 벽이라고 느꼈던 놈을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다른 놈들도 죄다 때려 잡자고!”
“가자!”
각성자들은 다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콰쾅!
또 한 번 폭발이 일었고, 타이탄들은 계속해서 각성자들의 손에 쓰러져 갔다.
그 중심에는 백유현과 김현성이 있었다.
쉴 새 없이 타이탄들을 몰아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이들이 용기백배해서 진격을 시작했다.
그렇게 사방에서 타이탄들이 무수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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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다 잡았군.”
박성진이 사방에 널린 타이탄의 잔해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주세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 각성자들도 정말 업이 되어 있었고. 모두 다 우리 꼬맹이 덕분 아니겠어? 아니, 이렇게 얘기하면 현성씨가 서운하려나? 호호!”
김수향의 말에 김현성이 쓰게 웃었다.
“사실인데 뭐 어떻습니까. 유현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인데.”
“크크, 우리가 팀이니까 가능했던 거지, 누구 하나 빠졌어 봐요. 그게 됐나.”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팀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유현이도, 현성이도, 수향누나도, 성진 대장도, 무현이도...다 같은 팀이니까.”
“팀이라...언제 들어도 좋네. 덕분에 이곳도 상당히 점령한 듯 하고.”
박성진이 말하자, 다시 주세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장.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후우, 아직 갈길은 멀었겠지만.”
“그런데 유현이는 아직이야?”
그러고 보니 그들 사이에는 백유현이 없었다.
“아, 아까 뭐 좀 실험해본다고 저쪽으로 갔어요. 아직 안 끝났으려나?”
“그래?”
“곧 돌아오겠죠. 녀석,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올 놈인데.”
사실 정말로 지옥에서 살아돌아오곤 하는 백유현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천무현은 웃으며 말했다.
“올 때 뭐 선물 가져온다던데...뭘까?”
“이런 곳에서 선물? 쌩뚱맞네. 하하!”
“그게 뭔지는 몰라도 기대는 되네. 우리 꼬맹이가 과연 뭘 가져올까?”
그들은 백유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든 이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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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아아-
그 시각, 백유현은 허공에 둥실 떠올라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래쪽에 득시글거리는 망자들을.
‘연심...’
그의 머릿속에는 한 단어가 떠올라 있었다.
연심.
지장보살이 남겨준 권능.
지금 백유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저 아래의 망자들을 죽여, 병력을 충원하려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백유현은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존재할 바에는 야차가 되어 속죄하는 게 낫겠지.’
새카맣게 몰려들어 있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백유현은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그는 폭풍 날개를 퍼득였다.
콰콰콰콰쾃!
그와 동시에 아래로 급강하 했다.
“캬아아아악!”
“캬아악!”
그런 그를 발견한 망자들이 괴성을 내며 아우성을 쳤다.
번쩍-
다음 순간, 그들 사이에서 거대한 섬광이 일었다.
모든 어둠을 일순간 몰아내는 듯, 사방을 환하게 밝히는 섬광!
그리고 그 다음, 바로 짙은 어둠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렸다.
콰콰쾅!
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폭발에 휩싸인 망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나갔다.
파아아앗-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망자들 중 일부는 반투명한 모습이 되어 하늘로 끌려 올라갔고, 일부는 아예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크어어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포효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 뿔이 달리고, 노란 눈알을 뒤룩거리며 잔악성을 드러내는 귀신(鬼神).
‘야차(野次).’
백유현은 놈들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야차.
지장보살의 권능, 연심으로 만들어낸 존재들.
이들은 이제 그 동안 희생된 각성자들의 빈자리를 채워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따르라.”
“크워어!”
백유현의 말에, 야차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대략 오십 마리의 야차.
백유현이 죽인 망자들의 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지만, 이것만으로도 백유현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