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흑색의 망자향
“너희는...오지...말아야 할 곳을 왔다.”
미라가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 뿐이야.”
백유현은 놈을 보며 간장과 막야를 꺼내들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묘비는 하나 둘이 아니었고, 사방에서 미라와 같은 강력한 적들이 각성자들을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내기가 필요하겠는데?”
김현성의 말에 백유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그럼...저는 저쪽 놈을 맡을까요?”
“뭐, 그럼 셋을 세고 시작하는 걸로.”
“좋죠.”
파앗-
백유현은 바로 다른 미라를 찾아 내달렸다.
“크윽!”
그곳에는 이미 각성자들이 미라에게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라의 공격력은 상당해서, 탱커와 딜러 조합으로 된 각성자 팀이라 할지라도 힘도 못 써보고 밀리고 있었다.
파캉!
그런데 그 순간,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백유현이 각성자를 공격하려는 미라를 막아선 것이었다.
- 자, 시작할까요? 하나...
- 좋아...둘!
- 셋, 갑니다!
파각!
김현성과 백유현은 둘 다 동시에 움직였다.
“하아앗!”
백유현은 간장과 막야를 휘두르며 미라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사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백유현의 검은 순간적으로 미라의 몸뚱이 두세 곳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크으!”
미라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간장과 막야에 깃든 뇌전과 화염의 기운이 놈을 순간적으로 태워들어갔던 것이었다.
“이 놈...!”
미라가 두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백유현을 향해 덤벼 들었다.
촤라라랏!
미라의 붕대가 풀리며 마치 촉수와도 같이 날카롭고도 강력한 공격이 백유현에게 집중되었다.
번쩍-
순간 주변에 돌연 시커먼 암흑이 내려앉았다.
촤앗!
그리고 다시 밝아졌다.
금환식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미라의 모습은 매우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다리 한 짝과 팔 한 짝이 날아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끄으으...!”
서걱-
미라가 끔찍한 신음 소리를 내며 온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백유현은 그대로 놈의 머리를 베어냈다.
- 리퍼, 완료. 그 쪽은 어떻습니까?
김현성의 감응이 전해져 왔다.
- 이런...역시 내가 지는군. 나는 이제야...
잠시 감응이 끊어졌다가 다시 전해졌다.
- 끝이다. 후우...조금 버거운 상대인데?
백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 어서 묘비를 파괴하죠.
- 그래!
콰앙-
시체 조각으로 만들어진 날벌레들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묘비가 산산조각으로 박살났다.
- 그럼 다음 차례 가볼까?
김현성의 감응에 백유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전진합니다!
콰쾅-
사방에서 묘비들이 박살나고, 시체 벌레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정대는 그에 힘을 입어 협곡 전투를 유리하게 전개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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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협곡 방어대, 임무 완료!”
“제 2 협곡 방어대, 임무 완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협곡을 방어하던 병력들이 속속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이미 망자들의 공세를 막아낸 상태였다.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박성진은 우선 피해 상황을 체크했다.
“제 1 협곡 방어대 피해 상황은...”
각 방어대는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예상 외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여기는 각성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백유현이 부지런히 다니며 협곡의 방어를 도와주었기에 그만큼 피해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백유현이 아니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지구에서의 카오스 터미널 레이드와는 차원이 다르던데요?”
“후우, 그러게 말입니다. 카오스 터미널 레이드는 이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죠. 정말 여기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백유현 군은 어떻게 그런 강한 힘을 얻었을까요? 정말 뒤에서 보니 감탄만 나오던데...”
각성자 팀장들은 서로를 보며 백유현에 대해 놀라워하고, 부러워했다.
박성진은 그들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유현이가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밖에는...”
“아무튼 이번 원정도 백유현 군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백유현 군 때문에 살아남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군요.”
“맞아, 저번에 있었던 빙의 사건 때도 그랬고 백유현 군이 없었더라면 정말 힘들었을 상황이 한 두번이 아니었군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그 옆에 있던 각성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빙의에서 백유현 군이 보호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으으, 끔찍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나라가 최고라며 각을 세우던 각성자들이 오랜만에 의견 통일이 되었다.
백유현.
이번 싸움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낸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은 지금 역시도 척후를 자원하여 나간 상태였다.
이전 척후조들의 빙의는 아직 풀리지 않아서 따로 격리 중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백유현의 사전 경고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어서 꽤 많은 각성자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척후조들이 빙의된 것도 모르고 진격했다간 죄다 몰살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자, 유현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척후조를 편성해서 따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유현이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
“맞습니다. 그럼 저희도 재정비를 좀 해야겠군요. 부상자들도 있고.”
“예, 저희도 그럼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겠습니다. 다음 싸움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는 해둬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돌아가서 재정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니, 다들 무기를 소지한 채 휴식을 치를 수 있도록 안내 부탁합니다.”
각성자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은 빠르게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까지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그들이지만, 여기서는 결코 숨을 제대로 쉴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후우...”
그들이 다 흩어지자, 박성진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웬 한숨?”
그 때, 김수향이 그에게로 걸어오며 웃었다.
박성진도 굵은 미소를 지었다.
“일이 고되네. 그것도 상당히.”
체력적으로 매우 뛰어난 박성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외인지 김수향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별 일이네. 대장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하지만 보람도 있어. 유현이, 그 녀석과 함께 하면 힘들긴 하지만 재미도 있으니까. 세계를 구한다는 명분도 있고.”
“하긴 나도 이번에 꽤 재미있었거든. 유현이 옆에서 전담 힐링을 해주는 것도.”
“그래, 상상 간다.”
박성진이 씩 웃었다.
그 때 다른 일행들도 이쪽으로 모여 들었다.
“후우, 꽤 험난한 하루였어요. 그렇죠?”
천무현의 말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야. 꽤 험난한 하루였어. 힘들고, 위험했고...짜릿했지.”
김수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자 천무현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 나쁘진 않은 하루였죠. 유현이와 함께 해서 재미있기도 했고.”
“녀석, 잘하고 있으려나? 걱정 되네.”
주세광이 방패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듯 내뱉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현이가 없으면 뭔가 허전한 것 같아요. 이상하게.”
“그러게.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나도.”
일행들은 저마다 손을 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이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군요. 대장.”
김현성까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엿다.
“그래, 어쩌면 불멸자들이 우리에게 허락한 구세주일 지도.”
“재밌네요, 그 말.”
“틀린 건 아니니까. 후후.”
“우리 꼬맹이가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김수향은 백유현이 사라진 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맘 같아선 지원을 해주고 싶은데, 녀석에게 방해가 될 까봐...”
“기다리자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래요.”
천무현은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어둠이 잔뜩 깔려 있는 그 하늘 어딘가에 백유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도 홀로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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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오오-
망자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협곡으로 이끌려 혈전을 벌였던 놈들은 최악의 피해를 입고 뒤로 물러났고, 결국 각성자들은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각성자들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다.
망유계의 망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집요했으며 사나웠다.
‘하지만 해내야 해.’
백유현은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아직 큰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군소를 찾자.’
이곳의 지배자는 군소.
놈을 찾아 담판을 지으면 싸움은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었다.
‘흑색의 망자향.’
백유현은 품속에서 흑색의 망자향을 꺼내들었다.
모든 망자의 기척을 추적할 수 있는 저승차사들의 물건.
[흑색의 망자향의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망자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망자의 이름 혹은 사주 등의 정보가 있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자, 군소에 대한 추적을 시작합니다]
흑색의 망자향의 연기가 서서히 짙어 지는가 싶더니 한쪽으로 연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동북쪽!’
연기는 동북쪽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끝이 어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쪽으로 간다.’
백유현은 저 멀리 보이는 끝도 없는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은 정해졌다.
그럼 이제는 그쪽으로 갈 차례.
- 리퍼입니다.
그는 감응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알렸다.
- 이제부터 동북쪽으로 진격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박성진의 감응이 전해졌다.
- 좋아. 뭔가 큰 걸 발견했나 보군. 그렇게 전달하겠다.
백유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넓게 펼쳐진 망유계, 그 북동쪽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한참을 그쪽을 향해 바라보던 백유현은 다시원정대로 되돌아왔다.
“뭘 좀 발견했어?”
일행이 묻자, 백유현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가 갈 방향을 찾았어요.”
“크크, 그래, 같이 가자.”
“힘들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런 거 따졌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제까지도 쭉 그래왔잖아. 불가능에 도전하고, 그 불가능을 넘어서는 거. 안 그래?”
주세광이 백유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게. 뭐, 그래서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지. 하하!”
천무현이 그 말을 받으며 크게 웃었다.
동료.
이제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동료가 이렇게나 많았다.
백유현도 씩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한 차례 큰 전투를 마치고, 앞으로 더욱 험난한 여정이 예상됨에도 그들은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힘이 그들을 묶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군소.
놈을 향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