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천외밀경
“중국의 병력이 회군하고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와아아아!”
대한민국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는 환호성이 일어났다.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던 중국의 병력이 회군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중국 베이징으로 간 백유현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미 백유현의 무전으로 그 사실을 전달받긴 했지만, 모니터 상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물러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후우...!”
대통령도, 합참의장도...
지하 벙커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긴장되고 힘들었던 순간이었던가.
일본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내고, 연이어 중국의 공격까지 막아내야 했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리퍼는 귀환하고 있습니까?”
“예, 북경을 출발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국정원 요원들은 어떻습니까?”
“탈출 루트를 통해 빠져나오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중국 내부는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라, 그들을 추적하기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요원들의 안전도 단단히 챙기세요. 절대 불상사가 없도록.”
“신경쓰겠습니다.”
국정원장과 합참의장이 대답하자, 대통령은 이어서 장관들에게 지시했다.
“부산 쪽 피해 상황 파악하고 얼른 복구 시작하세요. 1급 국가 재난 사태 선포하고, 국고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무조건 지원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 쪽과도 연결을 해서 피해 복구에 대한 지원을 해주겠다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고생한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린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쉬면, 국민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은 잘 아실 테니...우리, 이번 일을 다 마무리하고 돌아가서 푹 쉬는 걸로 합시다.”
“예! 대통령님!”
상황실 안은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전쟁의 위기를 넘긴 직후인지라, 표정들이 다 밝았던 것이다.
“후우...유현이가 결국 해냈나 보네.”
“어려운 임무였을 텐데 정말 대단해...”
“그러게 말이야. 혼자 주석궁으로 쳐들어갈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일행들도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오래 같이 전투를 해왔어도, 백유현은 아직도 어떤 녀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 나라들인데...이미 러시아와 동유럽 쪽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지? 이러다가 불멸자들에게 대항해 싸울 각성자들이 죄다 사라지게 생겼어.”
도대체 어떤 망자가 이런 기가 막힌 계략을 짜냈는지 몰라도, 덕분에 세상은 엉망진창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복수하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을 중재할 기관도, 그럴 존재도 없었다.
지금은 가까스로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만 할 뿐.
“산 넘어 산이군요.”
김현성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적이 열이고 백이고 다 베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간계에 당해 인간들끼리 죽이는 전쟁이 계속되면 끝장이다.
- 리퍼, 도착했습니다.
“엥? 이 녀석 삼십 분 전에 출발한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도착해?”
- 그 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허어, 그래 조심히 와라. 할 얘기가 많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유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백유현군! 고생 많았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감사 드립니다.”
“짝짝짝짝!”
백유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반겼고, 상황실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지금은 저희 팀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아, 그러면 방을 하나 마련해 줄 테니 그 쪽에 가서 하세요. 비서관!”
“예, 대통령님.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비서관의 뒤를 따라간 곳에는 작은 회의실 하나가 있었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니 안심하고 말씀 나누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일행은 회의실 안에 둘러 앉았다.
박성진은 백유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전과 완전히 다른 그의 표정이 마음이 걸린 것이다.
“하고픈 말이 뭐야?”
“본론만 말할게요. 저는 망유계로 쳐들어갈 생각입니다.”
“뭐? 망유계? 그러니까...지금 이 사태를 벌이고 있는 그 망자들이 있다는 망유계 말이야?”
언젠가 백유현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런 빙의 사태를 벌이고 있는 것은 망유계라는 차원의 망자들 때문이라고.
카오스 터미널도 놈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그로 인해 지구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위기에 처한 것이라고.
“그런데 거길 어떻게 가? 방법이 있는 거야?”
천무현의 말에 백유현이 말했다.
“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갈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방법은 곧 찾아낼 거예요.”
“흠...하긴 지금 상황에서 막고만 있을 수는 없지. 오히려 놈들의 본거지를 쳐서 없애는 것이 가장 최선일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이러다가 인류가 전멸하겠어요.”
주세광의 말에 천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요.”
백유현이 말하자, 일행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올 곳이 있다고?”
“예. 망유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존재. 아마도...그 분이라면.”
“으음...너 설마?”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히말라야에 가볼 생각이에요.”
나가르주나.
물론 그는 스스로 사라졌지만, 지금 같은 경우라면 모른다.
그리고 백유현은 확신이 들었다.
이렇듯 세상이 혼탁할 때, 그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그래. 그 동안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고 있을 테니 다녀와라.”
일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백유현은 빙긋 웃었다.
좋은 사람들이다.
믿을만한 동료이기도 했고.
이들이 있어서 그는 히말라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출발해 보겠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좀 쉬었다 가지...너 그러다 몸 상한다, 꼬맹아?”
김수향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누나가 챙겨주는 듯,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진심이었다.
백유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어서요. 얼른 다녀올게요.”
“그래, 일단 E-와치 하고 위성전화는 꼭 가져 가고.”
“알겠어요. 대장.”
“조심히 다녀와라. 빨리 와야 된다?”
주세광이 백유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김현성도, 천무현도, 박성진이나 김수향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너머에는 안쓰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유현의 저 두 어깨에 얼마나 큰 바위가 올려져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백유현은 바로 방을 나섰다.
마음이 정해졌으니 한 시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바로 청와대를 나왔다.
“브라만.”
혼자 하늘을 날아가는 것보단, 브라만과 함께 하는 것이 마음이 더 좋았다.
“음머어어어!”
브라만은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울음 소리를 토해냈다.
콰아앙-
주변의 풍경들이 쏜살 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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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차가운 눈보라가 치는 히말라야 정상, 한 소년이 가파른 암벽을 가볍게 타고 올랐다.
그렇게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오른 소년은 어느 지점에 멈춰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었다.
밖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동굴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동굴 앞에 서서 잠시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던 소년, 백유현은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왔느냐?”
동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백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찾았던 그 목소리였다.
나가르주나.
현자(賢者), 나가르주나가 그곳에 정좌한 채로 빙긋 웃고 있었다.
백유현은 그를 보며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잘 지냈느냐?”
“덕분에 많은 일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가르주나가 백유현을 보며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허허, 어찌 그것이 내 공덕이라 하겠느냐? 다 네가 쌓은 공덕이니라. 그건 그렇고...이번에는 어떤 해답을 찾아 왔느냐?”
그리 묻고는 있었지만, 나가르주나의 두 눈은 마치 백유현의 폐부를 꿰뚫기라도 하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바로 들 정도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망유계로 가고 싶습니다.”
나가르주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의 마음이 거기에 닿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고 다치기 때문입니다.”
“업보로다...”
나가르주나가 말없이 두 눈을 감더니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후 눈을 뜨더니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복수의 마음이 커지면 살심(殺心)이 생기는 법. 아무리 망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을 해하는 것 또한 업보일 것이다. 그에 대해 생각은 해보았느냐?”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제 가족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엄마.
엄마가 다시 되살아날 세상을 지옥인 채 놔둘 수가 없다.
적어도 전보다는 더욱 좋은 세상이어야 했고, 살 맛 나는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중요했지만, 지금 백유현에게 있어서는 엄마를 부활시키는 일과 그 엄마와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 가려는 것이다.
그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려 하는 망유계의 존재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나가르주나는 묵묵히 백유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결심이 그렇다면 길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구나. 허나 명심하여라. 네가 가야할 그 길은 지옥보다 고통스러우며, 가시밭길보다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이 세상 또한 그렇게 변하지 않겠습니까?”
나가르주나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번졌다.
“영특한 아이로다. 허나 그로 인한 업보는 다 네 것이 될 것이다. 죽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해되었느냐?”
“짐승이 사람들에게 덤벼들어 물어 죽이는 광경을 보고 그 짐승을 쳐 죽인다 하여 제게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업보가 쌓일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경우에는 사람을 살린 공덕이 쌓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나가르주나는 미소 지은 얼굴로 백유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영체의 세계는 육신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내게 천외밀경(天外密境)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나가르주나는 백유현에게 천외밀경으로 향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망유계.
모든 악이 창궐하고 그 악이 차고 넘쳐 이 세계까지 침범하는 근원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백유현의 두 눈이 매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