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겁화
[독사의 탈태 지속 시간이 29초 남았습니다]
파아앗-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 백유현은 눈 깜빡할 사이에 두 사람에게 짓쳐 들었다.
콰콰쾃!
“...!”
순간적으로 눈앞에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끼며 리처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지금껏 리처드가 겪어온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빠른 공격 속도!
하지만 리처드도 녹록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의 후계자.
게다가 망유계의 망자에 빙의되어 더욱 강력해져 있는 상태였다.
파캉-
불똥이 튀며 그를 향해 찔러 들어오던 칼날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쩌엉-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시이나 역시 레이피어를 들고 백유현의 검을 흘려냈다.
주룩-
그런데 그녀의 뺨을 타고 한 줄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시이나는 상처에 손을 갖다대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너...”
벌건 핏물을 천천히 닦아내며 시이나는 두 눈에서 살기를 폭사했다.
“죽여 버린다?”
새하얀 피부에 길게 그어진 한 줄기의 핏자국. 시이나는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빛으로 백유현을 노려보았다.
“딱 5초야. 너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뭐?”
“리처드, 이 미친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거지?”
“1초.”
파앗-
백유현이 나직하게 내뱉음과 동시에 그의 몸이 사라졌다.
콰앙-
“꺄악!”
그리고 다음 순간, 시이나의 몸이 마치 거대한 트럭에 충돌이라도 한 것처럼 뒤로 튕겨났다.
스스스-
리처드는 주변을 둘러싸고 기이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슨...?’
콰콰콰콰쾃!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그 바람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리처드를 집어 삼켰다.
꽈르릉-
번쩍-
각성한 간장에 깃든 권능, 진뢰신(眞雷神).
미친 듯 몰아치는 번개 폭풍이 주변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카카카카캉!
리처드는 손에 든 검에서 포스를 뿜어내어 그 폭풍에 대항하려 했지만, 워낙에 강력한 칼날 바람이 그를 두고 휘몰아치는 바람에 녹록치 않았다.
“크으...!”
힘을 발출해내어 버티려 하는 그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몰아치는 거대한 뇌전의 폭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죽어.”
그런데 그 폭풍 사이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매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두 눈에서는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뭐...뭐야!”
번쩍-
그리고 순간, 리처드는 눈앞에서 번쩍- 섬광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바로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뿐이었다.
휘오오오!
미친 듯 몰아치던 폭풍은 한 줄기 바람만을 남겨 놓은 채 사라졌고, 리처드의 앞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헉!”
그런데 리처드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투툭- 툭-
한 손으로 감싸 쥔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핏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를 멈추려 애써 움켜쥐어도, 핏물은 손가락 사이로 거침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언제!’
보지도 못했다.
아니, 찔리는 순간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그는 대(大)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계자, 리처드다.
그런데...
자신이 찔리는 순간도 보질 못했다.
그조차도 반응하지 못한 이런 속도, 이런 파괴력이라니...!
“2초 남았네. 누군가 죽기에는 딱 적당한 시간이지.”
파앗-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백유현은 간장과 막야를 교대로 휘두르며 리처드를 스쳐 지나갔고,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이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걱-
콰직!
깊은 치명상을 입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리처드의 목이 허공에 떠올랐고,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시이나의 가슴팍을 막야가 사납게 파고 들었다.
“끄으...”
시이나의 두 눈은 점차 초점을 잃어갔다.
로스차일드의 자랑이라던 리처드와 시이나가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린 것이었다.
백유현은 두 자루의 검을 다시 회수하더니 차가운 시선을 두 시신에 던졌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앞을 향해 달렸다.
그의 눈앞에는 마검이 있었다.
수많은 망자들과 각성자들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독사의 탈태 지속시간이 23초 남았습니다]
23초.
짧다면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백유현에게 있어서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캬아아악!”
“캬악!”
촤아앗!
망자들과 빙의된 각성자들이 백유현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들은 금세 두 자루의 검에 의해 온 몸이 난도질당해 쓰러졌다.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꽈르릉-
콰르르륵!
사방으로 진노한 뇌전이 내리 꽂히고, 성난 불길이 미친 듯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망자들이 뇌전에 온 몸이 타서 소멸되었고, 각성자들은 불길에 휩싸여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댔다.
지금 이 순간, 백유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7초가 남았습니다]
영체(靈體)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17초 남았다.
마검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투타타타타!
타타탕!
그런 그를 향해 경비 병력들이 소총을 갈기고, 기관총을 쏴댔다.
본래라면 그런 물리적인 공격은 영체인 백유현에게 통할 리가 없었지만, 빙의된 망자들의 힘이 탄환에 덧씌워지면서 영체에게도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실수는, 상대가 백유현인 것을 몰랐다는 것.
콰콰쾅!
“크아악!”
“아악!”
백유현은 힘으로 모든 것을 밀어 버렸고, 드디어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12초가 남았습니다]
하지만 앞을 가로막는 병력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백유현도 꽤 시간이 걸렸다.
촤앗!
그것도 잠시, 그는 끝까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던 망자 하나를 베어 버리고는 기이한 힘을 내뿜고 있는 마검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거무튀튀한 검신에 기분 나쁜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하나의 검.
가장 좋은 것은 마검에 실린 저주를 풀어내는 것이지만, 그럴 시간도 그럴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여기서 부순다!’
단체정신 지배의 매개체인 검을 부숴버린다면 다 끝난다.
파지직!
화르르륵!
백유현은 두 자루의 검에 힘을 모았다.
이제 시간이 없다.
지금 부수지 못하면, 정신 지배를 당한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하아아앗!”
콰콰콰콰!
거대한 기운이 백유현의 전신을 휘감고 솟구치다가 그대로 두 자루의 검에 다시 깃들기 시작했다.
뇌전은 미친 듯 번뜩였고, 화염은 진노하여 타올랐다.
망유계의 망자에 의해 오랜 저주가 깃든 검.
이 검을 부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9초 남았습니다]
‘모든 것을 건다!’
콰콰쾅!
순간 백유현의 전신에서 괴이한 빛이 미친 듯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휩싸인 것은 마구 부서지고 쪼개졌으며, 벽과 바닥이 쫙쫙 갈라져 나갔다.
광폭화.
백유현은 이번 공격에 모든 것을 건 것이다.
짐승의 광체 상태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힘.
[...6초 남았습니다]
“하아아앗!”
백유현은 검을 들어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콰르르르!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지하 벙커 전체가 미친 듯 뒤흔들렸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고, 잘게 부숴진 돌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렸다.
콰콰콰콰쾃!
그런데 그 때, 마검에서도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백유현의 두 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광폭화와 짐승의 광체까지 쓴 백유현의 힘이 마검의 힘에 휩쓸려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윽!’
역시 마검은 보통이 아니었다.
[...4초...]
‘이게...’
백유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여기서 승부를 보지 못하면 끝이다.
그는 바로 본체로 되돌아갈 것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둘 순 없다.
지금 끝장을 봐야 했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쿠오오오오!
그 순간, 백유현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거대한 힘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마아아아아!”
콰콰콰콰쾅!
백유현은 목이 터져라 외쳤고, 그가 쥐고 있는 두 자루의 검에서는 새로운 힘이 맹렬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사력(死力).
죽음 직전에 발동되는 불가사의한 힘.
염라의 권능이 지금 이 순간 발동된 것이다.
백유현은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동 시킨 상태.
“꺼져 버려어어어어!”
콰콰콰쾃!
간장과 막야가 미친 듯 마검을 향해 파고 들었다.
콰콰콰콰쾃!
마검이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사력까지 더해진 그 힘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2초...]
단 2초.
다음 기회는 없다.
“하아아앗!”
[...1초...]
콰아아앙-
백유현은 있는 힘을 다해 간장과 막야를 마검에 박아 넣었다.
쩌엉-
콰콰콰콰쾅!
‘크윽!’
그리고 엄청난 충격파가 일어나며 주변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났다.
벽이 쩍쩍 갈라져 무너지고, 강철벽이 찌그러졌다. 바닥이 터져 나가고, 각성자들과 망자들 역시 충격파에 휩쓸려 갈가리 찢겼다.
[...본신으로 귀환합니다]
눈이 멀듯 한 하얀 빛을 마주한 백유현은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누군가 뒤에서 그의 뒷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의 영체가 뒤로 쑤욱 튕겨났다.
콰콰콰쾅!
그리고 지하 벙커 안에서는 또 한 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퍼엉-
“허으윽!”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 다시 본체로 돌아온 백유현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윽, 허윽!”
어찌나 영체 상태에서 힘을 끌어다 썼는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유현아, 괜찮아?”
“백유현! 괜찮은 거야!”
그런 그를 향해 사방에서 일행들이 몰려 왔다.
“에피오네! 어서 치료 마법을!”
“알았어!”
턱-
박성진의 말에 부리나케 치료 마법을 준비하려던 에피오네, 김수향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팔을 붙잡는 것을 느끼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백유현이었다.
그는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지만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괜찮아요.”
“너 정말 괜찮은 거냐!”
박성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유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진은 조심스럽게 백유현에게 물었다.
“마검은...?”
백유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검.
그랬다.
그는 그것을 부수러 간 것이었다.
그리고...
“마검은...사라졌습니다.”
본신으로 돌아오기 직전, 백유현은 똑똑하게 보았다.
마검이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좋았어!”
박성진을 비롯한 일행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서 가세요. 대통령님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야 합니다.”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뒤는 내게 맡겨라!”
백유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전쟁을 거는 것은 이렇게 해서 막아냈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침략은 막을 수 없었다.
이제 한반도는 겁화(劫火)에 불타오르게 될 것이다.
‘그래...와라. 모조리 죽여줄 테니!’
백유현의 두 눈이 매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