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하나의 검
산혼초는 순식간에 전국에 쫙 깔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각성자들의 빙의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봐야 옳았다.
백유현이 산혼초를 나눠주기 전과 후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났던 것이었다.
이 결과를 들으며 알파 팀 일행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그럴 수도 있네?”
“진짜 유현이 이번에도 큰 일 했다! 도대체 몇 명을 살린 거야?”
천무현 역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는 왜 줬던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한테도 안 줬다면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묵직한 그의 목소리에 백유현은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이거...나도 포함되어 있었던 거지? 내가 다음 빙의 대상이었던 거 아니야?”
백유현은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그걸 숨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천무현이 충격을 받아도 사실을 말해야 했다.
“네, 형.”
“이런! 그럼 그거 잘 간수해야겠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과장되게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천무현을 보며 백유현이 말했다.
아마 천무현은 백유현이 느끼고 있을 미안함을 없애 주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미안해요. 무현이 형. 그런 소식 전해서.”
천무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히려 내가 고맙지. 유현아, 너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잖아. 다른 각성자들도 그렇고.”
“그건 맞다. 지금 유현이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발작한 각성자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산혼초를 가볍게 생각해서 버려버렸거나,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은 각성자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지.”
박성진의 말에 천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덕분에 살았다, 유현아? 고마워. 흐흐!”
백유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무거워보였다.
- 소주...그 자의 이름은 생사부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백유현은 얼마 전, 천무현에게 산혼초를 건네주고 나서 강효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쳤을 정도로, 그는 놀랐고 당황했었다.
산혼초를 줬음에도 천무현의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사부에 또렷하게 적혀 있는 천무현 이름 석 자는 백유현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무현 형은 빙의로 인해서 죽는 게 아니었어...그럼 도대체 뭐가...!’
알 수 없다.
조셉을 불러 봐도 조셉은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 강효, 생사부에 적힌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가 있어?
달리 방법이 없기에 답답했던 백유현은 강효를 보며 물었었다.
하지만 강효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은 몸짓이었지만, 무엇보다 명백한 표시였다.
- 그런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없습니다.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날 것까지 다 계산되어 적히는 것이라...
백유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었다.
- 확률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네?
강효는 백유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소주...그런 일은 심중에 담아두시지 마옵소서. 만일 그런 일이 있다 하여도 천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일이옵니다. 명부(冥府)의 주인이신 대왕께서 하시는 일에 실수는 있을 수 없사옵니다.
- 그 몇 번은...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강효가 고개를 들고 백유현을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동방삭이라는 자와 생사부에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직전에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해버린 이선이라는 자...수천 년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이옵니다.
천년갑자로 유명한 동방삭, 그리고 죽기 직전 신선이 되어 천계로 사라져 버렸다는 신선 이선. 그에 더해 겨우 셋 정도가 생사부에 적혀 죽을 운명을 피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무현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
‘아니...내가 반드시 구해낼 거야. 반드시!’
천무현은 지금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일행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쉬는 시간인지라 일행들도 마음을 풀고 즐기는 시간인지라 누구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미 청와대에서도 이번 일에 대한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 휴가 아닌 휴가를 준 후였다.
- ...한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낸 사절에 영국의 떠오르는 각성자, 리처드 군과 시이나 양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에 국내의 팬들이 뜨겁게 환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절의 호위단에 포함된 명단에는 리처드 군과 시이나 양 외에 스무 명 정도의 각성자가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들 사절 외 각성자 일행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로열 팰리스 호텔이 묵을 예정이며...
“아, 뭐야? 저 할아버지도 왔네?”
주세광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행이 보니, 조슈아와 그를 따라다니는 엘리자베스까지 이번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영국 비밀 첩보국 요원이 여긴 무슨 일이지? 후후! 이거 왠지 재미있어질 것 같지 않아?”
김수향이 생긋 웃었다.
“뭐, 이미 얼굴 다 알려진 양반이 돌아다니는 거야 무섭지도 않지. 그런데 리처드하고 시이나가 왔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데?”
박성진이 날카로운 눈빛을 뿜어내며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영국의 검과 방패라 불리는 두 사람이 본토를 떠나 여기까지 오다니...무슨 생각일까요?”
김현성의 말에 박성진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둘 다 너한테 원한이 있기도 할 거고. 근데 재미있는 상황이긴 하네. 저번 도움에 대한 감사 인사 치고는 사절단이 너무 화려해.”
“영국에서 꽤 정성을 들인 모양이데요? 하긴 뭐 아서 왕이 부활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는 해야겠다 싶었던 걸까요? 어찌 보면 우리 덕분에 아서 왕이 그 동안의 한을 푼 것이니까요.”
천무현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 음? 그런데 유현이 넌 왜 그렇게 티브이를 뚫어져라 쳐다봐? 왜? 누구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어?”
주세광이 백유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냥 생각 좀 하느라. 우리 저녁 뭐 먹나요?”
“오호, 이 녀석이 저녁 뭐 먹느냐고 먼저 물어보기도 하네? 이거 최초 아니야?”
“크크, 그러게? 저 녀석 요새 부쩍 크려나 보다. 그럼 기분이다! 오늘 밥값은 제가 낼 테니 맘껏 드시지요!”
주세광이 기세 좋게 블랙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자장면에 짬뽕! 그리고 탕수육 좋다! 세광아, 시켜라!”
“좋지요!”
일행은 모처럼 맞는 휴식 시간을 늘어져라 즐기면서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그들이 이제까지 밥을 제대로 먹어 본지가 얼마나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날 육포에 김밥에...
돈을 수십 억, 수백 억 가지고 있어도 그걸 쓸 시간이 없는 불쌍한 부자들이었으니...
그 동안 얼마나 자장면과 짬뽕이 먹고 싶었던가!
“난 곱빼기!”
“나도! 크크크, 탕수육은 특대로다가!”
일행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댔지만, 백유현은 날카로운 시선을 티브이에 던지며 침묵을 지켰다.
‘뭔가 있어...!’
그가 방금 전 티브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던 것이었다.
그게 뭔지는 딱 집어서 말할 수가 없었기에 일행에게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불길함과 강력한 경고가 동시에 몰려오는 느낌에 그는 티브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유현아 뭐해? 너도 시켜!”
“아, 네!”
천무현의 목소리에 백유현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의 두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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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안녕하십니까?”
“예, 대통령님. 귀국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폐하께서도 매우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소식입니다. 폐하께 별 탈이 없어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대통령님.”
영빈관에서 대통령과 마주하고 있는 자는 영국의 수상, 올리버였다.
그는 지금 영국의 실세였고 그 권력은 여왕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여왕을 극진히 모셔서, 영국 국민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올리버에게 별 말을 하지 못했다.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쌓아 올린 수상에게 여야를 마다하고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올리버는 빈 틈 없이 국정을 운영해왔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다.
특히 이번에 있었던 아서 왕 부활 사건은 그의 권력을 더욱 더 공고하게 만들어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귀국에 도움을 받아, 그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몇 가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올리버는 대통령에게 몇 가지 선물을 내밀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몇몇 특산품과 투박하게 생긴 하나의 검이었다.
“이 검은 영국 왕실에 비밀리에 전해진다는 기사의 검입니다. 이름을 모르는 기사지만,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직함을 기려 그의 사후, 작위를 내리고 검을 수거하여 그 충정을 대대로 후세에 전해 온 것이지요. 지금은 여왕 폐하께서 매우 아끼는 검이기도 합니다.가치로 따지면 그 어떤 보검보다 훨씬 더 할 것입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녹이 슬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검이었다.
그런데 영국 왕실에서조차 가보로 남겨서 전해올 정도의 검이라니.
“폐하께서는 이 검을 대통령께 전해드리면서 앞으로 양국의 우호를 더욱 더 돈독히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한국은 우리의 형제라고 말씀하셨지요.”
대통령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콧대 높기로 소문난 영국 왕실이다.
여왕과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데, 그 여왕이 형제의 나라라고 호칭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빈손으로 보내드릴 수 없으니, 저희도 성의를 담아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영빈관에서 쉬시며 여독을 푸시고 내일 조찬을 하시면서 말씀을 나누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대통령님과 말씀을 나누어야 할 일이 있는데, 내일 아침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어 수상의 손을 잡았다.
“양국의 발전을 위해 힘써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가시면 편안하게 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수상 일행은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갔고, 대통령은 그들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전해온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부탁할 것이 있나 보구먼. 하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고. 김 비서관.”
“예, 대통령님.”
“알파 팀에 연락을 해두게. 미안하지만 휴가는 곧 끝날 것 같다고.”
“예,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대통령은 검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왠지 모르게 불길해 보이는 검이야. 이런 검을 왕실에서 그리 애지중지하고 있었다니 알 수가 없군.”
그리고 대통령은 곧 영빈관을 떠났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