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전유미
“장소라고 하는 늙은이네. 소일거리로 밭을 일구고 열매나 따면서 살고 있다네.”
백유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소? 그런데 어떻게 산혼초에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거지?’
백유현의 생각대로, 스스로를 장소라고 밝힌 노인은 산혼초 밭에서도 멀쩡하게 서 있었다.
철옥진경을 따로 익혔다면 몰라도, 너무나 멀쩡한 모습에 백유현은 그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온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절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혼절곡의 주인일 수도 있어. 아니면 명부시왕(冥府十王)중 하나 일수도 있고. 보통 존재는 아니다.’
악귀들이 쉴 새 없이 출몰하는데다, 혼백들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산혼초가 지천에 깔려 있는 이 혼절곡에서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는 존재라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백유현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는 백유현이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어르신 말씀대로 제가 너무 산혼초를 뜯어낸 것 같습니다.”
장소가 마른 미소를 지었다.
“훼손했다면 다시 복구하면 되는 법. 마침 멋진 장포를 입고 있으니 그것의 힘을 빌려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장소의 시선은 백유현이 걸치고 있는 염제 신농의 황포를 향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포에는 식물의 생장을 촉진시키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금 막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고 있는 산혼초들의 성장에도 관여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말하는 투가 역시 혼절곡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였다.
백유현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장소의 입가에 언뜻 흐뭇함이 깃든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염제 신농의 신통력으로 식물의 생장을 촉진합니다]
[반경 백 장(丈, 300미터)내의 모든 식물들의 생장이 크게 촉진되어, 성장 속도가 빨라집니다]
뿌드득-
황포에 깃든 신통력이 발휘되자, 사방에서 푸른 싹이 수도 없이 돋아나더니 금세 잎을 펴고, 줄기가 자라나 완연한 산혼초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와...!’
백유현조차 그것을 보며 놀랐을 정도였다.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 이런 장면을 보지 못했었는데, 불과 십 여분 만에 씨에서 발아를 하고, 싹이 자라나고 줄기가 여물면서 단단한 한 개체가 되는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밭가는 촌부(村夫)에게는 이것만큼 보기 좋은 광경은 없지. 휑한 밭은 보기만 해도 허전하니 말일세.”
백유현이 너무 열심히 따서 주변이 온통 휑해진 골짜기에 다시 산혼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광경은 장관이었다.
“끼아아악!”
“캬아악!”
그리고 사방에서 악귀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산혼초의 생장 속도가 촉진이 되면서 본래 없었던 곳에서도 산혼초가 자라난 모양이었다.
장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혼절곡에는 비명이 끊이지 않아야 하는 법. 그것이 명부의 법도지.”
‘명부의 법도...?’
백유현은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장소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백유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장소는 왜 자신을 밭을 가는 촌부라고 표현했을까?
‘발설지옥(拔舌地獄)! 설마 저 어르신이...’
백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염라...!”
다른 이들을 헐뜯고 이간질한 자들이 떨어진다는 발설지옥.
죄인의 혀를 길게 뽑아 단단히 고정한 후, 그 혓바닥 위에 밭을 갈아 과수(果樹)를 심고 거름을 뿌려 키운다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발설지옥을 다스리는 왕이 바로 염라였다.
즉, 방금 백유현 눈앞에서 염라가 현신했던 것이었다.
산혼초를 캐가는 것은 좋으나, 이 혼절곡은 엄연한 지옥.
지옥의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잠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백유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긴...명부에는 명부의 법도가 있는 법이니까. 내가 그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멋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럼 일단...’
염제 신농의 황포에 깃든 신통력은 무한이 아니었다. 계속 산혼초를 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니, 이제는 다른 쪽을 생각할 때였다.
‘사냥을 하자.’
산혼초도 딸만큼 땄다.
사실 지금 채취한 양만으로도 수많은 각성자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무간 지옥에 들어왔으니,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나타날 불멸자들은 좀 더 완성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 뻔하니까.
특히 아틀란티스 대륙까지 나타난 이상,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마음을 정한 백유현은 사자육전을 소환했다.
“또...도령이시오!”
도척이 신경질적으로 외쳤지만 백유현은 그에게 무초관을 협박해서 뜯어낸 무구들을 가득 안겨주었다.
“아, 아니! 클클,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뭘 원하시오?”
백유현은 도척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제부터 사냥을 시작할까 하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척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좋소, 좋소! 뭐든지 말만 하시오! 클클클!”
사자육전을 둘러보는 백유현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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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사, 정렬!”
“존명!”
“모조리 쓸어버려!”
“명을 받잡나이다!”
사냥은 오래지 않아 시작되었다.
사자육전을 탈탈 털다시피 한 백유현은 수많은 영약을 한꺼번에 복용하고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공격력과 공격속도가 빨라지는 단혼단, 보다 많은 경험치를 쌓게 해주는 적원단, 체력의 한계를 거의 무한대로 늘려주는 금강체신환 등 수많은 영약을 때려 부은 백유현을 당해낼 무간지옥의 귀신들은 없었다.
그는 차사들을 이끌고 무간 지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지옥의 귀신들을 잡아댔다.
엄청난 집중도와 숙련된 사냥 속도에 지옥의 귀신들은 재생됨과 동시에 또 다시 소멸되어야 했고, 그 고통은 끊임없이 반복이 되었다.
파카카칵!
마검으로 강화된 간장과 막야는 적에게는 악몽이었고, 무간지옥은 그렇게 백유현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4회 차 무간지옥은 그렇게 백유현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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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삿-
“캬아악!”
무간 지옥에 들어 온지도 벌써 29일 1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회 차가 다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백유현은 무간지옥의 거의 끝자락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원한 서린 시체 동굴’이라는 마지막 장소 하나 뿐.
“이곳에 그렇게 강력한 악귀들이 있단 말이지?”
“예, 소주. 웬만해서는 차사들도 접근하기를 꺼려하옵니다. 대왕들께서도 이곳은 거의 건들지 않는다 하여, 버려진 시체 동굴이라고도 불리옵니다.”
“그랬단 말이지?”
백유현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4분...’
겨우 4분밖에 남지 않았다.
‘아쉽네.’
4분가지고는 동굴을 공략할 수 없다.
타임 뱅크를 열어보았지만 시간이 얼마 모이지 않았다.
타임 뱅크는 이승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아직 얼마 쌓이지 않은 것이다.
“후우...다음에 공략하자, 그럼.”
이번에는 암부에도 다녀오고, 산혼초도 캐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백유현은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차사들을 보며 말했다.
“이승으로 돌아간다. 준비해.”
“명을 받잡나이다.”
진짜 싸움은 이승으로 돌아갔을 때부터다.
이승에서는 고작 2~3분 흘러 있겠지만 그 2~3분 동안 죽어갈 각성자들도 많았으니까.
“강효, 죽음이 곧 닥칠 각성자들의 수는?”
“대략 이천 삼백 여명 됩니다.”
“한국에 있는 각성자들은 몇 명이야?”
“그 중 팔십 여명입니다.”
“가장 빠른 죽음은?”
백유현의 물음에 강효가 대답했다.
“이승 시간으로...대략 십 분 후. 대전 근처의 열두 살의 각성자, 전유미라는 소녀입니다.”
“십 분.”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유미라는 소녀가 망유계의 망자들에게 혼을 빼앗겨서 죽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헛되이 잃을 생각은 없었다.
“돌아가자!”
백유현은 4분이라는 시간을 매우 알차게 쪼개 쓰고는 이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파아앗-
음산함이 가득 감도는 문이 열리자, 백유현은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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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앗-
백유현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후우...”
인적이 없는 곳에서 무간 지옥의 문을 열었으니, 돌아올 때도 인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재보니 대략 2분 13초 정도 흘러 있었다.
그 사이 백유현의 몰골은 엄청나게 꾀죄죄하게 변해 있었다.
백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서는 좋은데, 돌아올 때가 늘 문제란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씻을 틈이 없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어딘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브라만!”
어딘가에 있을 브라만을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두두두두-
‘으윽! 이 녀석!’
콰콰쾅!
급기야 건물 한쪽을 모조리 박살내며 거대한 흰 소 한 마리가 미친 듯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단단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을 박살내면서도 놈은 뭐가 그리 좋은 지 마치 미소 지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울부짖고 있었다.
“음머어어어어-”
콰콰쾅!
그리고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한쪽 건물에 충돌하면서 벽을 모조리 박살내버리고는 헐레벌떡 백유현에게 뛰어왔다.
“음머어어!”
엄청 반가웠는지 놈은 백유현 근처를 폴짝폴짝 뛰며 주체를 하지 못했다.
백유현은 그런 놈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알았으니 그만 해.”
잠시 잔뜩 흥분한 브라만을 진정시킨 백유현은 녀석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브라만, 이번엔 좀 죽을힘을 다해 뛰어줘야겠다. 한 여자애의 목숨이 너에게 걸려 있어. 할 수 있지?”
“음머어어어-”
브라만은 문제없다는 듯, 머리를 주억거리더니 백유현에게 등을 돌리며 앉았다.
빨리타라는 뜻이었다.
“후우, 그래. 가자.”
백유현이 등에 올라타자, 브라만은 잠시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내더니 한쪽 방향을 향해 섰다.
콰콰쾃!
그리고 놈은 땅바닥을 힘차게 밟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쾃!
주변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건물도, 사람들도, 산도...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뒤로 사라져 점이 되었다.
녀석은 지금 백유현의 생각을 읽고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음머어어어-!”
쿠웅-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미친 듯 달리던 브라만은 한 건물에 크게 충돌하며 멈춰 섰다.
“으윽! 브라만...!”
그 바람에 튕겨 나간 백유현은 자세를 바로 잡더니 인상을 썼다.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전.”
시간을 보니, 딱 7분 57초 걸렸다.
유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2분 3초가 남았다는 뜻.
“강효!”
“이쪽이옵니다!”
이미 귀문을 열고 이쪽으로 이동해 있던 강효가 재빨리 앞장섰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파파팟-
강효를 따라 허공을 날듯이 유영하는 백유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