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망량
“살아 있는 인간이 감히 이곳에 와서 부탁이 있다고?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녀의 음성에는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사실 인간이 지옥에 왔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별로 탐탁지 않은 일이긴 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소월량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네 놈의 가죽을 벗겨내기 전에 썩 꺼지거라.”
역시 무초관이 말한 대였다.
소월량은 역정을 내더니 등을 돌렸다.
그 때 백유현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어르신이 만드신 물건을 구입하러 온 것입니다.”
소월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백유현을 노려보았다.
백유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우연하게 소월량 어르신께서 만드신 무한낭이라는 가방을 써보았는데 그 이후 소월량 어르신을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힘겹게 어르신을 찾아뵌 것입니다.”
소월량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백유현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정공법이 안 되면 슬쩍 길을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니까.
일단 칭찬 받아 기분 나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백유현은 노련하게 소월량에 대한 칭찬부터 시작한 것이다.
“무한낭? 네 녀석이 어떻게 그걸...? 설마...그 영감이 너에게 주었더냐?”
“그 영감이라고 하시면...”
소월량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무초관 말이다!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
“아, 네. 무초관 어르신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이 물건은 절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무척 아까워하셨습니다.”
“그 작자가 아까워했다고? 크흘! 그럴 만도 하지! 인피(人皮)가 천 장이나 들어간 물건이니.”
백유현의 말이 먹혀들었는지, 소월량의 표정이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백유현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가방이 하도 좋아서 어디 가면 그런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 무초관 어르신께 떼를 좀 썼습니다. 그랬더니 이곳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소월량이 백유현을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 전에...넌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지? 살아 있는 인간은 암부는 고사하고 명부조차 출입이 불가능하거늘!”
백유현은 씩 웃으며 염라의 아패를 꺼내들었다.
“이것 때문입니다. 어르신.”
소월량은 아패를 바라보더니 바로 표정을 굳혔다.
“이건 염라대왕의 아패가 아니더냐?”
“예. 맞습니다.”
“허어, 그가 어찌 살아 있는 인간에게 이런 아패를 주었단 말이냐? 그 고집불통 노인네가.”
염라를 고집불통 노인네라고 표현한 소월량은 혀를 끌끌 찼다.
“명부의 법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꽉 막힌 노인네가 별 일이구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이런 걸 내주다니. 그런데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것이냐? 온갖 악귀와 귀신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인데. 아...혹여...”
소월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자세히 말해보아라. 천 년 동안이나 이승의 소식을 듣지 못했더니 궁금하구나.”
백유현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핵심만 추려서 얘기했기에,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소월량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졌다.
“이승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이 썩어 문드러질 것들이 감히...”
소월량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좋다, 네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이었느냐?”
“철피복이라는 것이 있다 들었습니다.”
소월량이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철피복? 네 녀석...그걸 어디서 들었느냐?”
이상하게 소월량의 표정이 매우 험했기에 백유현은 속으로 의아했다.
‘왜 저러지?’
“얼른 말하렸다!”
소월량의 채근에 백유현은 사실대로 말했다.
“예, 사자육전을 운영하는 도척이 필요하다고 하여...”
“갈! 도척, 이 씹어 먹을 작자가 철피복을 입에 올렸단 말이냐!”
“예...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소월량은 백유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놈, 아무것도 모르는 게로구나?”
“네...저는 그에게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쯧! 이런 사악한 작자 같으니. 생전에도 그리 사악하게 살더니, 죽어서도 그 꿍꿍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소월량은 고개를 흔들거리다가 불쑥 말을 이었다.
“대가를 받기로 하였느냐?”
“예...도척은 저에게 대가로 천부인의 방울을 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승에서 긴히 쓰일 수 있을 것 같아 의뢰를 받아 들였고요.”
“천부인의 방울이라...그래, 환가 일족의 방울이라면 충분히 힘을 발휘할 만하지. 모든 사특함을 좇아낸다는 힘을 지녔으니.”
“그런데 어르신, 철피복이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소월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철피복은 살아 있는 인간의 피부를 벗겨 만들어내는 일종의 갑옷이다. 그것이 있으면 쇠붙이의 공격을 상당 부분 상쇄시킬 수 있지. 다만, 그것을 입게 되면 정신이 피폐해져 평생 피와 고기를 탐하는 괴물이 된다. 뭐 어차피 도척 그 작자는 이미 괴물이지만. 그런데 사자육전에 유배된 작자가 왜 철피복을 구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소월량의 말을 들어보니 백유현도 의구심이 생겼다.
명부에만 있는 도척이 왜 철피복이 필요한 걸까? 소월량의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뛰어난 갑옷인 것 같은데, 명부의 깊은 곳에 처박혀 있는 그에게 갑옷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사자육전에도 충분히 갑옷은 많은데...
“놈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구나! 아무튼 알겠다. 마침 천 년 동안 죽어 마땅한 자들의 껍질을 벗겨 만든 철피복이 하나 있으니 너는 그것을 갖다 주어라. 이승의 변고에는 철피복 따위보다 천부인의 방울이 더 필요할 것이다.”
소월량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녀는 이승의 변고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곳 도깨비 골도 지옥답지 않게 뭔가 온화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끔찍하고 공포가 가득한 다른 곳과는 다른, 기이한 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유현의 주변을 둘러싸고 숨어서 이쪽을 흘끔거리는 도깨비들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절대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인 백유현을 무서워하는 모습이 퍽 이채로웠다.
“왜? 놀랐더냐? 지옥에도 이런 곳이 있는 것이.”
“예...솔직히 조금...”
“망량(??)들이다. 호기심이 강하지만 그에 비례해 겁도 많지. 널 해코지 하진 않을 것이니 나를 따라와라.”
소월량이 등을 돌리며 앞장서서 걸었다.
이승의 얘기를 듣고 한풀 누그러진 그녀의 말투에 백유현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수많은 망량들이 숨어서 흘끔거리고 있었다.
소월량의 말대로 그 모습에는 적의(敵意)가 느껴지진 않았다.
소월량이 한참 걸어 도착한 곳은 낡았지만 매우 정갈하게 꾸며진 초가가 있었다.
초가의 앞마당에는 수도 없이 많은 가죽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에는 그것을 다듬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망량들이 서넛 다니며 뭔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소월량의 뒤를 따라 초가에 들어서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앗-
작아 보였던 초가는 그야말로 광대한 창고로 변모하였고 그 안에 수도 없이 놓인 수납장 위에는 수많은 가죽 제품들이 놓여 있었다.
‘대단한데...?’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제품들이 가득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백유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한쪽에는 갑옷과 비슷한 옷이, 한쪽에는 손목과 손등을 가리는 토시가, 한쪽에는 가죽신이...
수도 없이 많은 가죽 제품들의 등장에 백유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소월량은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더니 붉은 실로 단단히 묶은 뭔가를 꺼내들고 돌아왔다.
“자, 이것이 철피복이다. 봉인되어 있으니 실은 절대 풀지 말아야 한다.”
“예, 어르신.”
파직!
‘윽!’
백유현은 소월량이 건네는 철피복을 받아들다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절명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죽어 마땅한 놈들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깊게 한이 서려 있을 수밖에. 도척이 뭘 꾸미는지는 모르지만, 가져다주어라. 어차피 지옥시왕의 인장이 찍힌 몸이니 다른 꿍꿍이가 있어도 감히 실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리고.”
소월량이 백유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대가를 논해야겠지?”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소월량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대답했다.
“이것을 가져가라.”
그녀가 내민 것은 가죽으로 만든 작은 함이었다. 반지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함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벌레?’
그 소리가 매우 귀에 익은지라, 백유현은 바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모피충(募皮蟲)이다. 이승에 가서 풀어 놓으면 놈은 알아서 가죽을 모아 올 것이다. 그것을 무한낭에 담아 나중에 가져오너라. 그것이 철피복에 대한 대가다. 수량에 따라 적당한 물건으로 교환을 해줄 터이니, 열심히 모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역시 그랬다.
모피충.
가죽을 모으는 벌레라는 뜻이었다.
그 때 백유현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소월량 : 모피충을 풀어 가죽을 모아와라]
[임무 완료 조건 : 최대한 가죽을 모아올 것]
[임무 완료 보상 : 가죽의 수량에 따라 달라진다]
[소월량이 임무를 의뢰해 왔습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두 달입니다]
[임무 정보 : 모피충이 모아온 가죽으로 소월량이 제작한 물건들과 바꿀 수 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물건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니 열심히 모아보자]
가죽을 모으면 모을수록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아진다.
“그런데 어떤 가죽을 모아야 하는 겁니까?”
“네가 말했던 이승에 횡행하는 놈들을 죽이면 모피충이 알아서 가죽을 벗겨 올 것이다. 단순한 작업이니 어렵지는 않을 것이야.”
“아...알겠습니다. 어르신.”
소월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르신...왜 갑자기 저를 도우시기로 마음을 돌리신 것입니까?”
소월량이 백유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당연하지 않느냐. 내 후손들이 겁화를 당한다는데 그걸 가만 지켜보고 있을 할미가 어디 있겠느냐. 가서 내 후손들을 겁화에서 구해내거라. 그것이 내가 너를 돕는 유일한 이유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어서 가보거라! 할 일이 많은 것 같으니.”
“예, 어르신!”
백유현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로 폭풍 날개를 활짝 펼쳤다.
콰아앙-
그리고 그는 허공 높은 곳으로 솟구쳤다.
백유현이 사라지자, 사방에서 숨어 있던 망량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진 그를 보며 소월량이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난 놈이로구나. 염라가 왜 선택했는지 알 것 같구먼. 아무래도...”
소월량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의 힘이 곧 필요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흘흘.”
“끼잉-”
“꺄응-”
망량들은 겁을 잔뜩 집어 먹은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귀여운 척 하지 마라! 맨손으로 호랑이의 몸통을 찢고 곰의 머리통을 부수는 네 놈들이 그러고 있으니 역겹구나!”
소월량은 망량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백유현이 사라진 쪽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