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염제 신농의 황포
[특별 포고(布告)]
[염라(閻羅) : 축생도를 탈출한 흑령을 제거하라]
[임무 완료 조건 : 괴수, 흑령 제거]
[임무 완료 보상 : 신체 능력치 30 포인트, 염라와의 친밀도 600, 시편 2조각, 철옥진경의 해서(解書) 한 본]
[염라가 임무를 의뢰해 왔습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두 시진입니다]
[임무 정보 : 괴수, 흑령을 제거하라! 탈태(脫態)를 완료해 보다 강력한 존재가 된 흑령을 제거하여 명부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어쩌면 흑령은...]
뒷내용이 없다.
뒤가 중요해 보였는데 그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쿠오오오오!”
그 때, 흑령의 포효 소리가 쩌렁- 울렸다.
“이 봐, 적당히 하자고.”
백유현은 흑령을 보며 말했다.
그는 농담 식으로 던졌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무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흐윽!’
온 몸의 뼈가 부서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추락할 때 발생한 대미지가 치명적이었던 것이었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산혼초의 비명을 너무 많이 들은데다, 추락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아직도 회복이 안 되고 있는 백유현이었다.
식은 땀이 비오듯 흐르고, 눈앞이 흐릿해지기를 반복한다.
‘으음!’
이 상태에서 흑령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혔다.
차사들도 없다.
철갑벌은 원귀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몸은 엉망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흑령을 잡고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더 그를 사면초가로 몰아넣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악!”
“끄이이익!”
협곡 가득 원귀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수는 처음 백유현이 협곡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지독스럽게 뿜어지는 독기...
‘뭐야?’
백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의 움직임...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캬아악!”
와직-
놈들은 산혼초 앞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이가 부서져라 악물며 산혼초를 짓밟은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산혼초를 짓밟은 놈들은 그대로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는 무려 수백...아니, 수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혼절곡의 모든 악귀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유현은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친!’
산혼초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백유현은 놈들의 표정을 보고 이유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와드득-
우득-
놈들은 이가 부서져라 갈아 붙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두 눈의 핏줄이 모조리 터져 피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끼아아아악!”
“끄아아악!”
산혼초를 극도로 싫어하는 원귀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다니...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지금 흑령에게 통제당하고 있다는 거야?’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원숭이, 흑령.
원귀들은 바로 그 흑령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유현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놈은 왜 산혼초에도 끄떡없는 것일까?
그리고 원귀들은 왜 놈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압제당하고 있는 것일까?
‘최악이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백유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백유현이 엄청난 위험에 빠졌다는 뜻이었으니까.
‘일단...’
심호흡을 하며 백유현은 등을 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들었지만 반드시 지금 해야 할 일!
파앗-
순간 백유현의 눈앞에 펼쳐져 있던 광경이 바뀌며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앞에는 해골 하나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허...도령, 사자육전이 이러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사자육전의 도척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백유현을 구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면, 바로 사자육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백유현은 지금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 있을 뿐, 곧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그 동안 흐른 시간 덕에 백유현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악귀들은 벌써 백유현의 근처에 개미떼처럼 몰려 와 있을 것이 뻔했다.
백유현은 도척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래 좀 하죠?”
도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백유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회복약 있으면 다 주고, 진혼단도 여섯 개 정도만 주세요. 지금 이 상황에서 적당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좀 주고.”
도척이 백유현을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전투 중에 사자육전을 여는 것은 명부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요. 내가 왜 도령에게 그런 걸 줘야할까? 그냥 문을 닫아 버리면 되는 것을.”
백유현은 놈의 능구렁이 같은 속내를 바로 알아차렸다.
놈이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즉, 거래를 하자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최고의 고객을 잃음과 동시에, 거래처를 잃게 되겠죠. 예를 들면...”
백유현은 씩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게 물든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암부(暗部)의 야장이 만들어낸 무구 같은 걸 구해다 줄 수 있는 사람?”
도척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갑과 을의 관계를 바꿔보려 했더니, 외려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사실 암부의 무초관이 만들어낸 무구는 그 뒤로 불티나게 팔렸다.
저주가 걸렸든 뭐했든, 차사들에게는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저주를 감내하고서라도 강해지고 싶은 차사들의 소비 심리를 제대로 공략한 물품들...
덕분에 사실 도척도 백유현이 언제 다시 오나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끄응...”
한참 백유현을 노려보던 도척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보아하니...추락하며 뼈가 어긋난 데는 흑접호골연고(黑接虎骨丹軟膏)가 잘 들을 것 같고, 산혼초의 독성에는 진명단이, 회복에는 대향진단이 필요하겠소.”
“다 주시죠.”
백유현이 손을 내밀었다.
“가격이 꽤 비싸오.”
“죽는 것보다야 낫겠죠.”
“이런 얄미운 도령 같으니...그렇다면 나 역시 한 가지 청을 하겠소.”
백유현은 도척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 청이라.”
“도령도 내가 없으면 곧 환난을 당할 몸. 상부상조하자는 뜻이오.”
“뭡니까. 원하는 게.”
도척이 백유현을 보며 말했다.
“암부에 다녀오시오.”
“암부에는 무슨 일로...?”
“가서 소월량이라는 할멈을 만나줘야겠소.”
“소월량?”
백유현은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그 이름을 떠올렸다.
‘아...그 할머니!’
지독스레 피를 탐하는 가죽 가방, 무한낭.
무초관은 그 가방을 만든 것이 바로 소월량이라고 했었다.
“가서 철피복(鐵皮服)을 만들어 달라 하시오. 한 벌이면 되오.”
‘철피복이라...’
백유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사이, 창이 떠올랐다.
[청탁]
[도척 : 소월량에게서 철피복을 얻어와 주시오]
[임무 완료 조건 : 철피복을 입수하여 도척에게 전달]
[임무 완료 보상 : 천부인(天符印)의 청동방울]
[염라가 임무를 의뢰해 왔습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다섯 시진입니다]
[임무 정보 : 소월량에게서 철피복을 얻어와 도척에게 전달하자.]
‘청동방울이라...!’
“환웅이 남긴 천부인...그 중에서 청동방울을 드리지. 청동검이나 청동거울은 어차피 도령에게 쓸모도 없으니. 이거면 대가는 충분할 것이오.”
그런데 백유현은 의문이 들었다.
천부인의 청동방울 정도라면 매우 귀중한 것일 텐데 그걸 선뜻 내주다니.
그 생각을 눈치챘는지 도척이 말했다.
“그건 도령 같이 환웅의 피를 이어 받은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오. 내게는 철피복이 훨씬 중요하지. 게다가 그 놈의 방울,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서 아주 시끄러워 죽겠소. 차라리 도령에게 내주고 말지. 그리고 차사들은 청동 방울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도령 아니면 절대 가져갈 이도 없소이다.”
하지만 백유현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청동 방울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죠?”
“당연하잖소. 예로부터 방울은 귀신을 쫓는다고 알려져 있지. 그거, 도령에게 좀 쓸모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승에서 지금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 어떻소?”
백유현이 씩 웃었다.
“뭐 나쁘진 않군요. 하지만 아직 하나가 부족합니다.”
도척이 시뻘건 눈빛으로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요? 또!”
“혼절곡에서 쓰일만한 것. 지금 상황은 잘 알 거고.”
“이런, 벼룩의 간을 빼먹으시오!”
“싫으면 마시던가. 암부에 갈 시간이나 제대로 있을지 모르겠는데...”
백유현의 말에 도척이 이를 부득 갈더니 진열대에 가서 뭔가를 들고 왔다.
“옜소! 이걸 걸치면 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오. 단, 가격은 절대 깎아주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하나의 너덜너덜해 보이는 넝마같은 옷이었다.
그런데 꽤 유래가 오래 되어 보이기도 했다.
“염제 신농의 황포(黃袍)요. 수많은 식물들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지. 어떤 식으로 활용할 지는 알아서 하시오.”
‘식물이라.’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물을 다룰 수 있는 힘이라면 지금 당장만 해도 쓸 수 있는데가 있었으니까.
“좋아요. 의뢰를 받아들이죠. 나중에 봅시다.”
“끄응...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사자육전을 열지 마시오. 명부의 법도에 매우 위배되는 행위요.”
“그럼.”
백유현은 씩 한 번 웃어주고는 황포와 연고, 약들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친 곳에 연고를 발라주고 약을 먹으니 모든 것이 정상이 되었다.
‘후우...’
이제 슬슬 되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펄럭-
백유현은 황포를 둘러 입었다.
신기하게도 매우 낡은 황포는 백유현의 몸에 딱 맞게 크기가 작아졌다.
[염제 신농의 황포 : 온갖 식물을 다스려 그 약효를 알아낸 신농의 신통력이 남아 있는 황포. 이를 입으면 식물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식물의 성장에 관여할 수 있다]
[황포로 인해 식물이 성장하게 되면 본래의 성질이 배가된다. 크기와 약효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강제 성장은 이레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단, 반복 될수록 성장 속도와 효과가 반감된다]
[식물의 약효를 미리 알 수 있다]
황포를 입자, 황포에 대한 설명 창이 떴다.
‘식물의 성장이라...’
식물의 성장에 관여할 수 있다는 말에 백유현은 도척이 무슨 생각으로 황포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잘 쓸게요.”
도척의 말대로, 염제 신농의 황포는 지금 백유현에게 딱 필요한 물건이었다.
단,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지만.
“약속 잊지 마시구려.”
도척을 보며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눈앞의 광경이 순간적으로 또 바뀌었다.
파앗-
“키에에에엑!”
“캬아아악!”
역시 다시 나타난 백유현을 둘러싸고 수많은 원귀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유현이 씩 웃었다.
“그래, 한 번 놀아보자고.”
고오오오-
파앗-
그가 걸치고 있는 염제 신농의 황포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