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산혼초
각성자들의 잇딴 자살 사건.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다.
망유계의 망자들이 무려 ‘불멸자’들을 계약자로 가지고 있는 각성자들을 집어 삼켰다는 증거였으니까.
“정준구, 48 레벨. 조춘성 29레벨, 최유진 42레벨...”
박성진은 정보처에서 파악한 자료들을 훑으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자살한 각성자들에 대한 리스트였다.
“이들의 공통점이 뭘까?”
백유현이 대답했다.
“레벨이 낮아요. 60레벨 이상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레벨들이 다 낮지.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 때, 다시 백유현이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그 레벨이 올라갔다는 점.”
박성진이 백유현을 묵묵히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답이다. 조춘성은 초창기 때 자살한 각성자였고, 정준구나 최유진은 비교적 최근에 자살했지. 점점 빙의된 레벨이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말하자면 빙의한 놈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겠네?”
주세광의 말에 박성진이 동의를 표했다.
“맞다.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지.”
“근데 그 몸을 그대로 이용하면 될 걸 왜 자살을 할까요? 빙의된 채 사람들을 계속 해칠 수도 있었을 텐데.”
천무현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 말, 일리가 있어.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 때 백유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육체가 버티지 못한 거죠. 빙의된 망자들의 힘이 워낙 강한 탓에, 육체는 스스로 파괴되는 것을 선택한 겁니다.”
일행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놈들에게 빙의되어 부활한 불멸자들도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 즉, 망자들의 혼을 감당해 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거죠. 문제는 이런 일들이 이제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라는 거고.”
“어차피 싸워야 한다는 거지.”
김현성이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네. 이유야 어떻든...싸워야 합니다.”
사면초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후우...정말 힘든 상황이군. 갈수록 각성자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얘긴데...”
사실 그게 가장 문제였다.
적이 고대의 악신들이라면 어떻게든 잡으면 된다.
그런데 방금 전만 해도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동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진다면?
악신들과 싸울 수 있는 각성자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막을 방법이 필요한데. 유현아, 무슨 방법 없을까? 그 쪽은 네가 잘 알잖아.”
주세광의 말에 백유현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해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귀신을 본다고 해서 빙의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소주.”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강효의 음성이 들려왔다.
“음? 뭐야?”
백유현은 생각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강효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백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법이 있다고?”
“예, 소주. 하지만 난이도가 제법 높을 수도 있어서...”
“괜찮아. 말해봐.”
강효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명부에 산혼초(散魂草)라는 풀이 있사옵니다. 말 그대로 혼을 흩어버리는 풀이온데, 차사들을 비롯한 혼백들은 그 풀의 냄새만 맡아도 끔찍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사옵니다.”
“산혼초라는 풀이 명부에 있다?”
기이한 일이었다.
혼을 흩어버린다는 풀이 저승에 있다니.
명부는 염라의 소관인데 그 풀을 왜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곧 나왔다.
“지옥, 무간에 떨어진 혼백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는 자들...거기서도 혼절곡(昏絶谷)에 떨어진 혼백들은 다른 모든 지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무서운 형벌을 받습니다. 산혼초는 바로 그 골짜기에서 자라며, 혼절곡에서 나오지 못하는 혼백들은 늘 산혼초가 내뿜는 악취에 고통스러워하며 다른 형벌을 받고 있사옵니다.”
백유현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네 말은 그 풀로 빙의를 막아보자는 얘기지?”
강효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소주.”
“그렇다는 것은 그 풀은 살아 있는 자의 혼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뭐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 네가 그걸 생각하지 않고 내게 말했을 리가 없으니까.”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빙의를 막기 위해 산혼초를 가져다 써야 하는데, 그 산혼초의 악취가 살아 있는 인간의 혼백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맞사옵니다. 옛 문헌에는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산혼초의 냄새가 효력이 없다고 되어 있사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인척 하는악귀들을 가려내기 위해 사용했다는 기록 또한 남아 있사옵니다.”
백유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그런데 백유현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모든 사람에게 그걸 지니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걸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닐 거고.”
강효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인, 그에 대해서 강구해두었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백유현은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사부(生死簿)?”
“예, 생사부이옵니다. 생사부는 대왕의 신력으로 기록되는 장부, 악귀들에게 몸을 빼앗긴 각성자들의 혼백은 그 전에 필시 이곳에 이름이 올라올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명부에서는 이 일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사옵니다.”
백유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악귀에서 몸을 빼앗기게 될 각성자는 이미 생사부에 이름이 올라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야 차사들이 가서 대비를 할 테니.”
자연사(自然死)든 사고사(事故死)든 누구나 죽을 때가 되면 차사가 늘 가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름 세 번을 부르고 그 혼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미리 생사부에 이름이 올라와 있어야 한다.
지금 강효의 말은 그것을 역이용하자는 뜻이었다.
일단 각성자들의 명단을 뽑고, 생사부와 대조를 하면 대략적으로 악귀에게 몸을 빼앗길 각성자의 명단이 다시 나올 테니까.
그럼 그 각성자들에게 산혼초를 지니게 하면 된다.
산혼초를 많이 구해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간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니...
일단은 이렇게라도 임시방편이라도 취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생사부에는 언제 이름이 올라오지? 그걸 알아야 미리 산혼초를 전달할 수 있잖아.”
“대략 두 시진(네 시간) 전이면 알 수 있사옵니다.”
“네 시간이라...충분하겠어. 그런데 너 괜찮겠어? 대왕이 하는 일을 이렇게 막아도...”
강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챙겨주는 백유현의 마음이 고마워서였을 것이다.
“염려 놓으시옵소서. 대왕께서 친히 내리신 명이옵니다.”
백유현은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럼. 해결됐네!”
염라가 직접 움직인 일이라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일단 문제는 시간.
하지만 그 시간도 사실 문제가 되진 않았다.
‘네 시간이면 충분해.’
전국 어디든 네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정부의 시스템을 이용하면 그 안에 무조건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각성자 관리 시스템이 그리 허술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주...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응? 뭔데?”
강효는 살짝 주위를 살피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친우 분 중 한 분의 이름이 생사부에 올라와 있사옵니다.”
백유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생사부에 이름이 적혔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못 엄청난 것이었다.
죽는다는 뜻이니까.
백유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누군데?”
강효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백유현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무현이 형!’
이제까지 그를 가장 많이 챙겨주고 아껴줬던 사람. 지금 주세광과 농담을 하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천무현.
일행 중 누구라도 죽는 것은 막아야 했지만, 그 대상이 천무현이라면 더욱 더 막아야 했다.
백유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생사부에 이름이 기록된 건 언제야...?”
“일각(一刻, 15분) 전이옵니다. 소주.”
백유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듯 말했다.
“알겠어...강효.”
그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무간을 열자.”
시간이 흘러, 무간지옥을 열 수 있었다.
강효가 고개를 숙였다.
“예, 소주.”
백유현은 강효와의 대화를 마치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천무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요?”
일행도 히말라야에서 힘든 경험을 한 후였고, 청와대에서도 나온 참이라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늘은 다들 들어가서 좀 쉬자고. 요 근래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후우,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지 몰라.”
주세광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휴, 딱 일주일만 원 없이 자봤으면 좋겠다. 요샌 체력 회복이 안 되네.”
“해줘?”
에피오네, 김수향의 말에 주세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누나랑 있으면 한 달 동안 잠도 못자고 일할 게 뻔하잖아. 난 내 방 침대가 그립다고. 사양하겠어.”
“하하! 그건 맞아요. 나도 오늘 푹 자고 싶다. 그냥 보통 사람처럼...”
천무현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오늘은 다들 들어가서 푹 자자. 다른 생각 말고. 집합 시간은 내일 오후 한 시로 하고, 다들 푹 쉬다 와.”
“예! 대장!”
박성진의 말에 일행의 얼굴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야, 백유현! 형이랑 가서 우동이나 먹지 않을래? 요새 왜 이렇게 그런 음식들이 땡기냐?”
천무현이 벡유현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백유현은 그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좀 피곤해서요.”
“에이, 아깝네! 오늘 왜 이렇게 우동이 땡기지? 너무너무 먹고 싶다. 우리 엄마가 예전부터 나 오래오래 살라고 국수 많이 말아줬었는데. 그래. 나 혼자 가서 먹어야겠다. 너도 좀 쉬다 와. 우동은 내일 먹자.”
내일.
일이 실패하면 천무현에게는 오지 않을 시간.
백유현은 잠자코 천무현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
그래, 내일 형하고 가서 우동이나 실컷 먹어보자.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백유현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내일 봬요.”
“오냐!”
“조심히 가라!”
일행들도 손을 흔들며 뿔뿔이 흩어졌다.
백유현 또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강효를 바라보았다.
“강효.”
“예, 소주.”
“가자.”
“앞장서겠사옵니다.”
강효와 문광, 그리고 차사들이 백유현을 호위하듯 둘러섰고 백유현은 허공에 손바닥을 대고 읊조리듯 말했다.
“무간, 개방.”
파아앗-
그리고 무간 지옥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