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제피
쿠오오오-
거대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가 싶더니,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위풍당당한 사슴뿔이 두 개 솟아 있었고, 두 눈은 붉은 빛으로 번뜩여 보는 이를 절로 압도했다.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전신(全身)은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강의 육체를 가진 존재.
- 고맙다.
그리고 나직하면서 단단한 음성이 들려왔다.
짐승의 왕, 나그라.
그의 목소리였다.
- 약속대로 너에게 상을 내리겠다.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백유현의 눈앞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일곱 짐승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아들, 제피를 구출하라! 의 임무를 완수하여 보상이 주어집니다]
[권능, 짐승의 광체(狂體)가 전이됩니다.]
[62 퍼센트 전이 중]
[환수(幻獸), 타르가가 당신에게 종속됩니다]
[환수 타르가 : 번개를 몰고 다니는 흰 잔나비. 몸집은 작지만, 녀석은 두 손에 늘 뇌전을 쥐고 있다. 작다고 해서 얕보면 큰일을 겪을 수도 있다]
“캬캭?”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흰 원숭이 하나가 나타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의 벌건 얼굴만 제외하고는 온 몸이 흰 털로 뒤덮인 작은 원숭이였다.
파지직-
그런데 설명대로, 놈은 시퍼렇게 번뜩이는 두 개의 뇌전을 두 손에 나누어 쥐고 있었다.
“캭캭!”
녀석은 백유현을 발견했는지 헤벌죽 웃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기 시작했다.
‘원숭이...’
백유현은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었다.
왠지 감당하기 어려운 애완동물이 하나 더 생긴 듯했기 때문이었다.
“음머어!”
“캬칵!”
그 때 브라만이 다가오더니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타르가에게 머리를 쳐들어 보였다.
자기가 먼저라는 뜻인 듯했다.
하지만 타르가도 지지 않았다.
녀석은 이빨을 드러내더니 브라만에게 덤비려 했다. 뭇 짐승들을 다스리는 브라만을 대면하고도 겁도 없는 놈이었다.
백유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후우...머리 아파.’
하지만 서열 정리는 필요한 법.
백유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타르가. 네가 나중에 왔으니까 쟤보고 형님이라고 불러야지!”
옆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캬악?”
그런데 놀랍게도 타르가는 두 눈을 뒤룩뒤룩 굴리더니 캭캭거리면서 브라만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앞으로 브라만을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듯해서 백유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저기...고마워.”
백유현이 보니, 제피가 살짝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이 아니었으면 우리 애들...진짜 힘들었을 거야. 다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거든.”
제피.
짐승의 왕, 나그라의 아들.
백유현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물었다.
“좀 괜찮아?”
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이거든. 불에는 조금 강하기도 했고.”
“그래. 그럼 다행이다.”
“어? 형, 근데 아버지께서 그거 주셨어?”
“뭘...?”
제피가 백유현을 보며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백유현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거 말이야! 지금 받은 거!”
“음?”
그 때 백유현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권능, 짐승의 광체(狂體)의 전이가 완료되었습니다]
‘짐승의...광체?’
제피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부럽네. 그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닌데. 우리 형들도 백년을 수련해서 받은 거야. 그거.”
“뭐?”
“잘 봐. 엄청난 거니까. 근데 진짜 부럽다.”
백유현은 짐승의 광체에 대해 설명된 창을 유심히 살폈다.
[짐승의 광체 : 짐승들의 강력한 육체의 힘을 빌려 모든 능력치가 강화된다. 새로운 능력치 짐승의 강철피부가 추가되며, 야성의 본능 역시 추가된다. 짐승의 강철피부의 추가로 방어력과 회복력이 크게 올라가며, 야성의 본능의 추가로 순발력과 회피능력이 배가된다. 위급 시 광폭화(狂暴化)를 발동시킬 수 있다]
‘광폭화!’
단어만 봐도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사력과 비슷한 능력이 아닐까?
그런데 설명을 보던 백유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사력 정도가 아니었다.
[광폭화 : 목표 하나를 정해, 목표를 찢어 죽이기 전에는 광폭화가 풀리지 않는다. 모든 신체 능력치가 강화되며, 특수 능력 신속(神速)과 광기(狂氣)가 추가된다. 신속이 발동되면 공격 속도 및 이동 속도가 크게 증가하며, 광기가 발동되면 목표에 광기의 독을 뿌릴 수 있게 되며, 독을 추적하여 목표를 끝까지 따라붙을 수 있게 된다]
‘제한시간이 없어? 와, 이건 사력보다 더하네!’
사력과 비슷하나, 광폭화는 제한시간이 없다.
제피가 왜 부럽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난 한 놈만 죽인다- 라는 컨셉에 아주 제대로 들어맞는 기술이었다.
“하긴...그 기술은 아버지께서 최후의 때가 다가왔을 때나 쓸 수 있다고 하셨긴 하셨지만...”
제피가 중얼거리는 말에 백유현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최후의 때에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아!’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런 엄청난 기술이 주어진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곧 그 때가 다가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그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 모든 신과 악신이 전쟁을 벌이는 그 날, 인간들이 살아갈 방법은 전무(全無)하다. 불멸자들이 베푼 자비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흔적은 모조리 지워질 예정이었으니.
나가르주나와 비슷한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서 왕부터 시작해서, 불멸자들이 스스로 현신하는 경우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나가르주나도 마찬가지였고, 나그라도 마찬가지다.
- 다만 불멸자들의 뼈를 깎는 희생으로 인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 동안의 시간들이 바로 자비가 베풀어졌던 시간들이었으니...하지만 이제 때가 다 되었다. 신들이 서로를 죽이고, 짓밟는 지옥이 펼쳐질 그날이.
나가르주나의 말대로, 세상은 악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신들이 한꺼번에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면, 분명히 그들은 싸우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협의하고 협조하는 것 따윈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존재들.
왜 그런 존재들이 됐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
‘걸리는 것은 모조리 베고, 죽여서 오른 자리...그러니 그들이 다시 부활한다면 세상은 끝이야.’
제우스만 해도 아버지를 희생시켜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다른 신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까?
망유계의 망자들은 둘째 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찢어발길 것이다.
‘골치 아프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인간들에게 ‘계약’이라는 방법으로 망유계의 망자들이나 터미널의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다르다.
그들 자신이 현신하지 않으면 막아낼 수 없는 적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고, 인간들은 그들에 비해 너무 약했다.
그러니 신들이 현신하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만 그들이 현신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질서 있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 뜻이 있는 불멸자들의 노력으로 그 때가 조금씩 늦춰지고 있지만, 기억하라. 선(善)이 선(善)이 아니게 될 때가 곧 올 것임을.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왕, 나그라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기술을 인간인 자신에게 전수한 것을 보니.
그만큼 그들도 끝이 보이는 지금 이 상황이 안타까운 것이다.
세상이 망유계의 망자들에 의해 부활하는 악신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막기 위해 부활한 신들에 의해 망할 수도 있기에.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백유현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깨달았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 하나의 선물을 더 주겠다.
그 때, 나그라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월계수 나뭇잎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 종말의 짐승, 베히모스가 당도하거든 봉인을 풀어라. 그리하면 방법이 생길 것이다.
종말의 짐승, 베히모스.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세피로트의 나뭇잎 한 장을 얻었습니다]
[세피로트의 나뭇잎 : 생명의 나무 세피로트의 나뭇잎. 모든 카발라의 원리가 담겨 있다. 어쩌면 창조의 비밀까지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가치가 깃들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카발라.
유대 전승에서 나오는 단어였다.
그리고 생명나무 세피로트 역시.
- 행운을 빌겠다. 소년이여.
“감사합니다. 짐승의 왕이시여.”
나그라는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시선을 제피에게로 돌렸다.
그 시선에서는 역시 아버지의 자애로움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런데 제피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버지. 저는 남겠습니다.”
나그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피가 희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짐승은...그 굴을 떠나 불타는 사막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짐승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짐승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
- 너는...
“저는 일곱 짐승이 축복한 존재. 그 중 인간(人間)의 인연이 이뤄졌으니 나머지 여섯 축복도 차차 이뤄지겠지요. 전 이 인간과 같이 가겠습니다.”
- 음...
나그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이 스쳤다. 그리고 그는 잠시 백유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뜻이 그렇다면, 짐승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주마. 다만 이제부터 이 아비의 도움은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피가 어깨를 당당히 폈다.
“제게도 이제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예리한 발톱이 솟았습니다. 짐승으로서 제 자신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나그라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세상의 끝에서 다시 만나자. 아들아.
“예, 아버지.”
제피가 고개를 숙이자 나그라는 한참 그를 내려다 보았다.
파스스스-
그리고 그는 연기에 휩싸여 다시 사라졌다.
“캭?”
“음머어어!”
브라만과 타르가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하듯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브라만은 풀을 뜯고, 타르가는 브라만의 등 뒤에 올라타 털을 골라주기 시작했다. 참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세계였다.
“너, 괜찮겠어?”
백유현은 굳은 얼굴로 제피에게 물었다.
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래봬도 나, 짐승의 왕의 아들이라고. 걱정 마!”
“내가 널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런데 왜...?”
제피가 씩 웃었다.
“형, 바보야? 난 누구의 보호가 필요한 게 아니야. 난 나 스스로 훌륭한 짐승이 되고 싶을 뿐이야. 우리 아버지처럼.”
“음...알겠다. 그럼. 하지만 조심해라. 만약 네가 내게 피해만 입힌다 싶으면, 널 돌려보낼 거다.”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럼 잘 부탁해. 형.”
제피가 손을 내밀었다.
백유현은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근데 너 몇 살이야? 왜 자꾸 나한테 형이라고...”
“응, 백 살!”
“뭐?”
제피가 다시 씩 웃었다.
“나보다 싸움 잘하면 다 형이지 뭐! 뭘 그리 정색해! 그리고 내가 심하게 동안이잖아. 헤헤!”
하긴 그랬다.
제피는 지금 아기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유현은 왠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튼...잘 해보자.”
제피 덕분에 얻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진실은 결코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백유현은 일단 나그라의 이야기들을 잊고 나중에 떠올리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일행들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