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짐승의 왕, 나그라
콰앙-
백유현이 내지른 검이 티폰의 바람 방어막을 강하게 강타했다.
쩌엉-
순간적으로 튕겨나긴 했지만, 이번 공격은 확실하게 티폰을 긴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콰콰콰쾃!
놈의 바람 방어막이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었다. 그냥 상대해서는 안 될 존재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그그극-
콰앙-
하지만 백유현은 티폰을 더욱 더 강하게 몰아쳤다. 한 대가 안 되면, 두 대, 두 대가 안 되면 세 대...
사력(死力)까지 끌어올린 백유현의 미친 듯한 공격에 티폰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그 때, 제피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삐비비빅-
그 순간, E-와치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백유현이 보니, 이 부근을 향해 붉은 점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짐승들.
도대체 어디에 있던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놈들이 몰려든다면, 백유현에게 절대 유리할 것은 없다.
하늘에서 호시탐탐 백유현을 노리는 대붕 때문에 허공으로 치솟아 오를 수도 없다.
게다가 티폰이 지상에 있는 한, 지상에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캬아아악!”
“캬아악!”
더군다나 제피의 비명을 들은 짐승들이 벌써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몰려들었다.
차사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숫자들이었다.
‘이런!’
백유현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빠졌음을 인지했다.
“키아아아-”
그 순간, 하늘에 떠서 선회하고 있던 대붕이 무서운 기세로 낙하하는 것이 보였다.
목표는 하나.
당연히 백유현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움직여야 한다.
백유현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짐승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또한 티폰을 공격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다.
콰콰쾅!
백유현은 티폰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일단 대붕의 공격을 피해냈다.
‘윽!’
콰당탕!
그런데 놈의 공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백유현은 피해냈음에도 충격파에 의해 땅에 처박혔다.
바로 자세를 잡긴 했지만, 역시 대붕의 공격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죄다 몰려나온 거냐!’
이곳에 몰려든 짐승들은 그냥 ‘짐승’들이 아니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거대한 불곰에서부터 온 몸이 붉은 털로 뒤덮인 커다란 늑대.
거기다가 뇌전을 머금은 새하얀 여우 등, 옛 신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짐승들이 대거 등장해 있었던 것이었다.
‘후우...’
일반 짐승이었다면 어떻게든 상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전설 속의 마물들이라면...
하긴 대붕까지 나타난 마당에,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녀석을 빼내야 해.’
제피.
짐승의 왕인 나그라의 아들, 제피 때문이다.
아마 티폰은 제피를 이용해 짐승들을 부리는 듯했다.
제피에게 고통을 주면, 짐승들에 그 고통에 공명하고 격분하여 덤벼드는 형국이었다.
그러니 대붕조차 저리 날뛰는 것이겠지.
티폰을 공격하는데 있어 짐승들의 방해는 꽤 컸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면!’
차사들은 무리다.
그리고 사신들을 불러낸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산 생명을 건드는 것은 인과율의 법칙을 크게 어기는 행동이었으니까. \일행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불가능.
백유현은 최후의 방법을 떠올렸다.
독사의 탈태.
그것밖에 지금 답이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크와아앙-”
하지만 그에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제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짐승들이 미쳐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파팟-
놈들을 힘겹게 막고 있던 차사들의 진(陣)이 한 순간 와르르 무너졌고, 짐승들은 걷잡을 수 없이 강력한 힘으로 백유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촤라랏!
백유현은 어쩔 수 없이 티폰을 향하던 칼날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촤라랏!
그리고 동시에 더운 피가 뿜어지며 짐승들이 죽어나갔다.
‘제길,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백유현은 짐승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제피를 구해내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녀석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독한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앗!”
백유현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크와아앙!”
그런 그를 향해 수십 마리의 늑대들과 짐승들이 뛰어 올랐다.
그 때였다.
“음머어어어어-”
쩌렁-
“케앵!”
산을 무너뜨릴 듯 거대한 포효가 울렸다.
소의 울음소리였지만 포효라고 표현해야 맞을 듯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만!”
백유현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굴에 남아 있으라고 했는데, 어느새 달려온 모양이었다.
“푸르륵!”
그런데 놈의 모습이 이상했다.
온 몸이 거대하게 부풀었고, 두 개의 뿔은 마치 용(龍)의 그것을 보는 듯, 강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게다가 두 눈.
브라만이 성격이 더럽고 급하긴 하지만, 저런 눈빛은 백유현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뻘건 혈광이 뿜어지는 두 눈에, 붉은 오러로 뒤덮인 전신.
‘뭐야, 브라만?’
“키잉...”
“끼잉...”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짐승들이 놈의 눈빛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팍 박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짐승들의 세계에서 상대에게서 눈빛을 거둔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의미다.
복종(服從).
“키아아아-”
대붕조차 브라만과 멀어지려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 녀석...넌 도대체!’
도대체 녀석의 진짜 정체가 뭘까?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놈의 등장으로 백유현이 한숨 놓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좋았어, 브라만!’
콰콰쾃!
백유현은 두 자루의 검에 혼신의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파스스-
그는 육체(肉體)의 껍데기를 벗어버렸다.
독사의 탈태(脫態).
브리트라의 강력한 힘이 실린 권능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백유현은 더욱 강해졌다.
파직- 파지직-
간장검에는 싯퍼런 뇌전이 번뜩였고, 막야에서는 지옥의 불길이 치솟았다.
영체(靈體)가 된 백유현에게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버틸 수 있겠어?”
정령인 제피와 생각만으로 의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제피는 매우 지쳐 보이는 얼굴로 백유현을 힘겹게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나...를 뭐로 보고...이 정도는...아무것도...아니야.”
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녀석은 약해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백유현은 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버텨. 딱...삼 분만. 그거면 돼.”
제피가 백유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걱정 마! 할...수 있어!”
“좋아. 그럼.”
백유현은 제피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짐승들은 브라만 덕분에 조용해졌다.
대붕도 브라만을 의식했는지 저 높은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브라만의 정체는 뭘까?
백유현은 다시 한 번 브라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앞의 적, 티폰을 잡아내야 했다.
지금 백유현은 한계까지 힘을 끌어다 쓰는 중, 여기서 멈출 이유가 없다.
파앗-
백유현이 가볍게 발 끝으로 땅을 찼다.
콰콰콰콰쾃!
그 순간, 그는 순간적으로 티폰의 눈앞까지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버리니,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파각-
‘닿았다!’
그의 오른 손에 들린 간장이 바람 방어막을 뚫고 티폰의 어깨를 베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낀 순간, 백유현의 왼 손에 들린 막야가 사납게 티폰의 다른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콰직!
막야 역시 티폰의 다른 쪽 어깨를 파고 들어갔다.
파직-
순간, 티폰의 몸 전체에 붉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약점포착!’
조셉의 약점포착이었다.
몇 개의 동그라미 중 가장 크고 선명한 곳은...
‘이마.’
놈의 이마.
그곳에는 마치 피가 새어나오는 듯 섬뜩한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하아앗!”
백유현은 그대로 놈의 이마를 향해 검을 내리 찍었다.
콰앙-
쩌엉-
티폰이 바람 방어막을 내밀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간장에 실린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콰짓!
하지만 그 여파로 검에 살짝 힘이 빠지면서, 티폰의 왼쪽 어깨에 검이 박혀 들었다.
콰쾅-
“흐윽!”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더욱 큰 기회를 만들어 냈다.
검에 실린 둔기(鈍器) 속성의 공격력이 티폰의 어깨뼈를 부수고 침투한 것이었다.
덕분에 티폰의 몸이 한 곳으로 크게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칠 백유현이 아니었다.
“하앗!”
그는 이번에는 막야를 사정없이 찔렀다.
목표는 티폰의 이마.
“키아앗!”
콰쾅!
순간, 티폰의 몸을 둘러싸고 거대한 불덩이들이 타오르며 폭발했다.
마치 자폭이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폭발이 일었고 그 앞에 있던 백유현은 그 폭발에 휩싸이기 직전이었다.
콰콰쾅-
“케앵!”
“깨애액!”
그런데 백유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새카맣게 탄 짐승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아직도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짐승들도 있었다.
놈들은 폭발하는 순간에 뛰어들어 백유현을 완벽하게 감싸고 자신들이 죽어간 것이었다.
‘울고...있어!’
불길에 휩싸인 놈들은 백유현을 보고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백유현은 놈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은 말하고 있었다.
제피를 구해달라고.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백유현은 순간 숙연해졌다.
그래서 놈들은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 마음...전해줄게.’
순간 백유현은 살기를 폭사하며 검을 들었다.
쩌엉-
그리고 한 줄기 검은 광채가 번뜩였다.
콰짓-
불길에 휩싸인 검 한 자루가 티폰의 이마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꿰뚫고 뒤로 튀어 나와 있었다.
“옛말에도 있어. 말 못하는 짐승은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알았냐, 개새끼야?”
콰직!
백유현은 막야를 더욱 더 깊숙하게 밀어 넣으면서 티폰을 노려보았다.
파르르-
티폰은 이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놈은 팔 다리를 파들거리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과거에는 제우스마저 궁지에 몰았던 최강의 악신이었던 티폰이다.
하지만 역시 그 힘을 제대로 되찾지 못한 탓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후우...”
영체 상태가 풀렸다.
백유현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살폈다.
“...!”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짐승들이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었다.
말 못하는 짐승들이었지만, 백유현은 놈들의 눈빛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고맙다...라고?’
놈들은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휘우우-
그리고 미친 듯 몰아치던 눈보라가 걷히고 있었다.
짐승들은 다시 일어나 제피에게로 향했다.
제피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하긴 그렇게 잔혹하게 고통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유현은 가만히 다가가서 녀석이 갇혀 있던 새장 문을 열었다.
아기만한 체구의 제피는 두 눈을 꼭 감은 채축 늘어져 있었다.
[짐승의 왕이 기뻐합니다]
[짐승의 왕이 당신에게 고마워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구를 본 백유현은 크게 두 눈을 떴다.
[짐승의 왕, 나그라가 현신(現身)합니다]
불멸자가, 또 한 번 현신한 것이다.
스스스스-
뿌옇게 번져 가는 빛을 향해 모든 짐승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