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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잡고 폭렙업-120화 (120/166)

120. 추적

백유현이 보고 있는 세상은 온통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살려 달라 애걸을 하고, 몸부림을 치며, 발악을 하고 있었다.

나가르주나가 보여준 이 무서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랜 세월, 이 안에 앉아 있노라면 늘 그 장면이 보였다. 내가 가진 모든 지혜로도, 그 어떤 지식과 현명함으로도 그에 대한 문제를 풀 수는 없었지.”

나가르주나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본 세상은 허황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제 곧 닥쳐올 세상의 모습이지. 과거의 신(神)들은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따라서 각자 대비를 하기 시작했지. 수천 년 동안 신들이 현신(現身)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나가르주나의 말은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었다.

“그 동안 신들은 인간들의 기억에서 지워져갔고, 우리는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충분한 대비를 했고,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멸을 하게 될 것이다.”

“자멸이라 하심은...?”

나가르주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보라. 하늘의 주인은 과연 누구겠느냐? 지하세계의 주인은? 일거에 신들이 나타나 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결국 그들 스스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 8의 암흑기, 즉...”

나가르주나가 백유현을 보며 말했다.

“종말(終末)이다.”

백유현은 눈살을 와락 구겼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는 수도 없는 신, 즉 불멸자들이 있었다.

당장만 해도 명부의 염라와 지하세계의 하데스가 있지 않은가?

그들이야 지금까지 어느 정도 타협을 보며 그 지경(地境)을 지켜왔다고 하지만, 다른 신들은?

옥황상제와 제우스 같은 경우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방금 전 본 광경은...!”

나가르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말의 전쟁이지. 세상을 지키던 신들이 서로를 죽이고, 짓밟으며 결국 세상을 멸망시키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미리 예지하고 긴 세월 동안 대비를 해왔던 신들 자신이 결국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니.

“지혜(知慧)는 많은 것을 보여주곤 하지. 하지만 몰라도 될 것들을 알게 되어 번뇌하고 오욕칠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법. 만박자(萬博者)의 업보는 그런 것이다.”

만박자.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달은 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가르주나는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 .

“이것을 받거라.”

그런데 그 때, 나가르주나가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든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 그곳에 얼굴을 비춰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곱 현자의 속박경(束縛鏡)을 얻었습니다]

[일곱 현자의 속박경 : 고대 전설의 현자 일곱의 혼이 갇혀 있는 거울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지혜로웠음에도 악행을 저질렀던 일곱 현자를 사로잡아 속박경에 봉인해두었습니다. 일곱 현자의 속박경은 단 두 개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살(殺), 활(活)]

‘살...활?’

살은 죽일 살, 그리고 활은 살릴 활.

단순한 단어였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었다.

누굴 살리고 누굴 죽인단 말인가?

백유현이 나가르주나를 보자, 그가 대답했다.

“아무리 선한 신이라도, 그의 신념이 그릇되면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법. 정의(正義)란 그런 것이다. 내 잣대로 남을 재어 길면 잘라 내고, 짧으면 강제로 늘려 맞추는 것. 잘못된 정의는 순수한 악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속박경을 신들에 대고 비추면, 일곱 현자들은 모두의 지혜를 합쳐서 네가 죽여야 할 신과 살려야 할 신을 보여줄 것이다. 명심하여라. 악신(惡神)이라고 해서 모조리 죽일 대상이 아니며, 선신(善神)이라고 해서 무조건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속박경에 신을 비추면 살(殺)할 대상인지, 활(活)할 대상인지 뜬다는 말이었다.

나가르주나는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붕이 노하여 날뛰는구나. 허나 그 업보가 없었더라면, 네가 이곳에 올 일도 없었을 터. 세상 모든 일은 그리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저리 놔둘 수는 없는 법.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가르주나가 백유현을 바라보자, 창 하나가 떠올랐다.

[만박자, 나가르주나가 임무를 주려 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대붕을 저렇게 놔뒀다간, 놈이 어떻게 할 지 몰랐다.

대붕은 원래 마물이 아닌 이상, 놈을 진정시킬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서 왕이 그랬던 것처럼.

“좋다. 너는 가서 대붕을 격노케 한 마인(魔人)을 처치하여라. 놈의 머리를 베면, 그 뒤의 일은 자연스레 진행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특별 임무]

[만박자, 나가르주나 : 대붕을 격노시킨 마인을 찾아 척살하라]

[임무 완료 조건 : 마인 척살]

[임무 완료 보상 : 지력 5 증가, 무한만박신서(無限萬博神書)]

[나가르주나의 의뢰를 받으시겠습니까?]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삼일입니다]

[임무 정보 : 대붕을 격노시킨 마인을 찾아 척살해야 한다. 나가르주나의 천리통(千里通)으로 찾아낸 마인은 T-1092 터미널 안에 있다고 한다]

‘T-1092 터미널!’

삐릭-

위성 신호를 받아 작동하는 E-와치는 상당부분 깨져 있었지만, 그래도 홀로그램을 띄우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금세라도 팍 꺼져버릴 듯 깜빡거리는 것은 문제였지만.

‘여기네.’

위치는 얼마 멀지 않았다.

그런데 백유현은 이왕 나가르주나를 만난 김에 일행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나가르주나는 백유현은 보더니 불쑥 말했다.

백유현이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 일행은 잘 있으니 걱정 말아라. 하지만 앞으로 눈보라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 눈보라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마인이 부리는 사술(邪術). 일행을 구하려면 어서 놈을 찾아 죽여야 한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일행이 무사하다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쿠쿠쿠쿠!

바깥에는 거친 눈보라가 불어 닥치고 있었다.

나가르주나 말대로 눈보라는 여느 때의 눈보라와는 확연히 달랐다.

주변을 온통 갉아먹으며 불어 닥치는 눈보라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했던 것이었다.

거기다 몇 십초만 노출되어 있어도 바로 얼어버릴 듯한 냉기는 더욱 무서웠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백유현조차 피부에 소름이 돋았을 정도니까.

그 때, 나가르주나가 뭔가를 내밀었다.

“이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의 목걸이였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색 깃털 세 개가 매달려 있었다.

“가루다의 깃털로 만든 목걸이다. 녀석은 폭풍을 다스리는 힘이 있으니, 눈보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깃털에 깃든 힘이 소실되면 목걸이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니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백유현은 가루다의 깃털로 만든 목걸이를 받아들고 목에 걸었다.

그 역시 폭풍의 신, 루드라의 가호를 받고 있었지만 바깥에서 불고 있는 엄청난 폭풍을 견딜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가 준 가루다 깃털 목걸이는 착용하자마자, 모든 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용을 먹고 산다는 신비의 새, 가루다의 힘이 깃든 목걸이다웠다.

목걸이까지 목에 건 백유현은 브라만을 돌아보며 말했다.

“브라만, 여기서 기다려.”

“음머!”

브라만은 알겠다는 듯 길게 울었다.

백유현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휘이이잉-

콰콰콰콰쾃-

엄청난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백유현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가루다 깃털 목걸이가 힘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는 사방에서 불어 닥치는 매서운 칼날 바람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가볍게 그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음? 이게 뭐지?’

그런데 가루다 깃털 중 하나가 점점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속도는 느렸지만 이 상태로는 깃털 당 두어 시간 정도만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시간이 없다는 얘기였다.

‘또 타임 어택이구나. 서둘러야겠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속전속결뿐이다.

백유현은 지체 없이 바로 눈길 위를 내달렸다.

콰콰콰쾃!

그의 등 뒤에는 어느새 폭풍 날개가 펼쳐져 백유현을 가볍게 공중으로 살짝 띄웠다.

파가가가각!

주변 바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로 백유현은 날듯이 앞으로 짓쳐 나갔다.

T-1092 터미널은 아직 한참을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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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삐삐삐-

요란한 알림음이 울렸다.

박성진은 황급히 태블릿 피씨의 화면을 띄웠다. 팀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태블릿 피씨는 강화 케이스에 들어 있어서 다행히 고장나지 않은 상태였다.

“유현이의 흔적이야!”

“엇? 정말요?”

“그래. 위치는 여기서 대략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군. 하지만 이런 칼바람을 뚫고 갈수는 없겠어. 무슨 바람이 이리 지독하게 부는지.”

박성진은 뿌옇게 흐려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히말라야가 처음이 아니었다.

폭풍우에 갇혀 고립된 적도 당연히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불어 닥치고 있는 칼바람은 그들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뭔가 이상해.’

아무리 바람이 거세다 하더라도, 바위를 깎아내며 불어 닥치는 칼바람은 없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콰콰쾅-

콰콰콰쾅-

그들이 바람을 피해 앉아 있는 비행기 동체 역시 미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동체를 갉아내는 듯,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삑삑삑-

그런데 갑자기 태블릿 피씨가 또 한 번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음? 이 녀석이 어딜 가는 거지?’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쪽에 눈보라가 안 불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백유현의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동쪽...? 왜 여기로?’

폭풍을 피할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박성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이건 마치...’

박성진은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백유현의 움직임은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었으니까.

‘추적!’

이런 눈보라를 뚫고, 녀석은 뭔가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인다는 의미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박성진은 재빨리 지도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그는 표정을 와락 굳혔다.

“설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지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가 적혀 있었다.

T-1092 카오스 터미널.

백유현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칼바람을 뚫고 가고 있는지, 왜 가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으음!’

박성진은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녀석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쿠쿠쿠쿵-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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