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나가르주나
“으음...!”
주세광은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들은 전용기를 타고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전용기가 뭔가의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창밖으로 보였던 그것은...믿기 어렵게도 거대한 전용기가 작아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큰 새였다.
그리고 전용기는 바로 아래로 추락했고, 그 뒤는 기억이 없었다.
“크윽!”
몸을 일으키려던 주세광은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끔찍한 고통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주...세광. 괜찮...은 거냐?”
그 때, 그의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박성진이었다.
그 역시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왼쪽 팔은 어깨가 부러졌는지, 어깨 아래서부터 덜렁거리고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아예 감각이 없는 듯 질질 끌고 있었다.
“제길...보기 사납군.”
박성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수천 미터 상공에서 추락해서 살아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살아난 것도 기적이라는 뜻이었다.
비행기조차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 잔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저기...수향누나...으윽!”
그들의 시야에 한두 명씩 일행이 보였다.
근력을 극대화시킨 두 명인지라, 그래도 충격에서 회복이 매우 빨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듯했으나,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무현이 아끼는 라이플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위틈에 처박혀 있었고, 김현성도 두 눈을 감고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다.
“으음...”
그 때, 김수향이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천천히 떴다.
파앗-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싸며 희뿌연 빛을 내던 막이 사라졌다.
“에피오네의 가호가 있었군. 다행이야.”
김수향이 계약한 불멸자, 에피오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녀를 보호한 모양이었다.
아니었다면 그녀는 즉사했을 것이다.
“여...여긴?”
하지만 피와 살로 된 인간이 수천 미터 위에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몸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김수향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신 상태였다.
“괜찮아...?”
김수향이 힘겨운 표정으로 박성진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아직...에피오네의 가호를 쓸 수 있겠어. 조금만...기다려.”
다행이었다.
힐러인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천운(天運)이었다.
퐁- 포퐁-
열 개 가량의 공기방울이 허공에 떠올랐다.
치유 권능이 깃든 방울들이었다.
팡-
박성진과 주세광에게 두 개의 방울이 가져 터졌다. 체력이 높은 만큼, 회복해야 할 양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회복되는 순간의 짜릿함에 박성진은 절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의 기능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그는 주변을 둘러 보며 다른 곳에 있는 일행을 가리켰다.
“저기 현성이. 저긴 무현이...음? 근데 유현이는 어디있지?”
힘겹게 주변을 둘러보던 박성진이 표정을 굳히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주변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현이가 없어...! 이 녀석, 어디에 있는 거야!”
조종사들의 시신도, 기내 승무원들의 시신도 다 있었는데 유독 백유현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설마!”
주세광이 한쪽에 있는 끝없는 절벽을 바라보며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설마 백유현이 그쪽으로 떨어진 것일까?
“유...유현이가 사...사라졌다고요?”
그새 정신을 차린 천무현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박성진에게 다가왔다.
“큰일이야...이제 곧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은데.”
백유현은 어디에 추락한 것일까?
그런데 일행에게도 큰 위기가 닥쳐들고 있었다.
휘이이잉-
주변의 바람소리가 거세어지는가 싶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 편에서부터 허연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제길, 일단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해.”
박성진은 두리번거리다가 비행기 잔해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일행들을 불렀다.
“어서 이리로 와! 일단 눈보라가 그치며 유현이를 찾는다!”
“으음! 알겠...습니다!”
아직 체력 회복이 덜된 일행들은 비틀거리며 비행기 잔해 안으로 몸을 숨겼다.
눈보라가 몰아치게 되면, 이 일대는 완전히 어둠에 잠길 것이다.
다행히 비행기 꼬리 칸에는 상대적으로 충격이 덜했는지 온전한 좌석도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식수와 먹을 것도 있었다.
“크으!”
일행이 비행기 안쪽으로 몸을 숨기자, 박성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방패를 들며 입구 쪽을 막았다.
“하아앗!”
콰아앙-
그리고 그는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 부어 쉴드를 펼쳤다.
쉴드는 강력한 눈보라로부터 일행들을 지켜줄 것이었다.
“으음!”
무리한 박성진은 주저앉듯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말했다.
“체력들 아껴둬. 아마 구조신호를 갔을 거다.”
“예.”
“눈보라가 그치면 유현이를 찾는다. 먹을 것 좀 먹고, 눈 좀 붙여둬.”
“알겠습니다.”
적어도 꼬리 칸에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것이다.
먹을 것과 물, 그리고 강력한 쉴드가 펼쳐져 있는 이상 그들이 눈보라에 갇혀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 백유현을 걱정하느라 표정이 좋지 않았다.
“괜찮겠죠?”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현.
녀석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일행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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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한편, 백유현도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거대한 새에게 공격을 받고 추락해 버린 것이다.
폭풍 날개를 펼 틈도 없었다.
시커먼 먹구름을 가르며 날던 거대한 새는 순간적으로 전용기를 입에 물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 꽂아 버렸으니까.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백유현은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불사의 재생이 완료되었습니다]
[파괴된 조직 재생 완료]
[혈류(血流) 정상]
[생체 에너지 정상]
....
[육체의 모든 능력이 정상화되었습니다]
불사의 재생.
그 기이한 힘으로, 파괴되었던 육체가 재건(再建)된 것이다.
아마 추락했을 때 즉사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음머!”
촵- 촵-
그런데 옆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뜨끈한 뭔가가 백유현의 뺨을 연신 핥았다.
“으윽, 브라만! 그만, 그만!”
“음머어!”
백유현은 너무 간지러워서 브라만을 멈춰 세웠다. 그런데 그는 문득 느낄 수 있었다.
‘춥지...않다?’
불사의 재생 덕분도 있었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차가운 눈밖에 안 보이는 이곳 히말라야에서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네 덕분이구나?”
백유현은 브라만을 보며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녀석은 백유현이 기절해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체온을 나눠줬던 모양이었다.
“음머!”
그런데 브라만이 갑자기 다른 쪽을 보더니 길게 울었다.
그곳에는 동굴 하나가 있었다.
곧 눈보라가 몰아칠 태세라, 그쪽으로 가자는 뜻인 듯했다.
“그래...어서 가자.”
불사의 재생 덕분에 모든 신체 능력이 정상화되어 있었기에, 백유현은 바로 일어날 수 있었다.
상처뿐만 아니라, 체력 또한 완벽하게 재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브라만은 바로 그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살을 에는 추위에 정신이 나가 있었겠지만, 백유현은 인간의 육체를 완전히 초월한 지 오래였다.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다른 일행이 걱정되었다.
자신은 운 좋게 동굴을 발견해서 들어왔지만, 다른 일행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파앗-
그 때였다.
“소주! 무탈하시옵니까!”
차사, 강효와 문광이 나란히 나타나서 황급히 백유현의 상태를 살폈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럭저럭. 그런데 아까 그 놈, 뭐였어? 너희들도 봤지?”
강효가 백유현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소주...아무래도 큰 일이 일어나려는 모양입니다. 소주께서 탄 비행기를 습격한 녀석은 대붕(大鵬)이라 불리는 괴조(怪鳥)로, 전설로 전해지던 새입니다.”
“대붕이라고?”
백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대붕이라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게임이나 소설 등에서 많이 등장하는 새가 아니던가?
“예, 소주. 그런데 원래 대붕은 성격이 온화하여 만물을 굽어 살피고, 인간의 화(禍)를 막고 복(福)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져 있사옵니다. 허나, 방금 전의 대붕은...”
강효가 마른 침을 삼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눈에 지독한 광기가 어려 있었사옵니다. 마치, 소주께서 탄 비행기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듯, 끔찍하게 공격을 한 것을 보면 그 광기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되는 사안이옵니다.”
“그래...?”
백유현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대붕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놈이 비행기를 공격했다.
왜?
‘이것도 네 놈들 짓이야?’
망유계의 망자들.
도대체 놈들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음?’
그 때, 백유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동굴.
그 안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이 자!’
백유현은 황급히 자세를 잡았다.
이제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로 등 뒤에 사내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반개(半開)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소주 왜 그러시옵...누구냐!”
강효와 문광조차 그제야 사내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검과 언월도를 빼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사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백유현의 등줄기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런데 두 차사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뭔가 보지 말았어야 할 존재를 본 듯, 그들은 이를 악물기까지 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강효...!”
그리고 사내는 물끄러미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웃통은 벗고, 다 해진 승복을 입고 있는 승려. 눈빛이나 얼굴 표정에서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기괴한 자였다.
“재미있구나.”
그런데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강효과 문광이 그 자리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어찌...이곳에 계시옵니까?”
사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동굴에서 사바 세상의 풍경을 보는 것은 내 유일한 취미니라. 좋지 아니하냐? 저렇듯 시원하게 불어대는 눈바람이 모든 번뇌를 잊게 해주니 말이다.”
백유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차사들과 승려는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이처럼 서로를 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효...”
그런데 강효와 문광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소주...아무래도 이 동굴의 주인이 따로 계셨던 듯합니다. 이제라도 나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 때 승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 승려를 보자, 백유현도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게 무슨...?’
승려가 이번에는 백유현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반쯤 열린 눈동자가 백유현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죽음과 파괴의 업보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흥미롭도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범상치 않은 자.
눈앞의 승려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때 차사, 강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용수(龍樹) 선사...보살, 나가르주나이시옵니다. 이곳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주인이라 불리시지요.”
나가르주나(Nagarjuna).
고대 티벳의 승려이며, 죽어 불멸자가 된 존재였다. 티벳 밀교의 한 종파에서는 유일한 조사로 모셔지며, 일설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한 절대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즉, 귀신에 대해서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차사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야, 내 손을 잡아보겠느냐?”
그 나가르주나가 손을 내밀었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깨달았으며, 그 지혜로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지혜의 불멸자.
백유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와 손이 맞닿은 순간, 백유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이건!’
히말라야가 온통 불타고 있었다.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이 불에 집어 삼켜져 고통스러워하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