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시간의 시침핀
백유현은 앞으로 나아갔다.
느껴졌다.
피와 살육에 굶주린 광기(狂氣)가.
그 적의를 대면한 백유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보통 놈이 아니야.’
그러니 페르세포네도 납치했을 것이다.
감히 그 성질 더럽다는 하데스의 여인을.
남은 시간은 이제 한 시간 여.
그 안에 승부를 봐야했다.
사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커다란 동공의 끝에는, 붉은 불꽃이 무수히 피워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하나의 왕좌가 놓여 있었다.
‘음...’
피로 물든, 강철의 왕좌.
그리고 그 왕좌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보통의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검붉은 색으로 물든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 자의 옆에 놓여 있는 하나의 제단이 보였다.
수도 없이 많은 피에 물든 듯, 끔찍한 색으로 변색되어 있는 돌제단.
백유현은 그 제단의 위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페르세포네!’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바로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였다.
“재미있군.”
사내가 백유현을 보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온 몸이 찌릿했다.
강력한 마기(魔氣)가 뿜어져 나와 백유현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숫자가 보이지...않아!’
그 때, 백유현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사내의 머리 위에는 레벨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조셉이 알 수 없는 자라는 뜻일까, 아니면...
“제물이 하나 더 늘어나면 더 좋겠지. 가슴을 갈라, 펄떡이는 심장을 찢어발기는 그 느낌도 황홀할 정도니까.”
사내가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바포...트]
[피...피...하...]
그 때, 백유현의 눈앞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조셉?’
지금까지 백유현이 레벨을 보고, 상대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셉이 미래를 훔쳐보고,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은...!
그 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득-
와지직-
“끄르...ㄱ!”
백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내가 갑자기 허공에 손을 뻗는가 싶더니, 누군가 그의 손에 잡혀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조...조셉!”
백유현은 크게 놀랐다.
조셉이 왜 저 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조셉 역시 안색이 매우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흥미로워...살아 있는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다닐 수 있는 것이지?”
콰득-
우드득-
“컥, 컥...!”
사내는 그리 말하면서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조셉의 울대가 단박에 부러져 나갔고, 조셉은 입에서 선혈을 토해냈다.
[조...셉...남은... : 29분...]
백유현은 다시금 눈앞에 떠오른 창을 보며 눈살을 와락 구겼다.
지금 조셉이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셉의 스페셜 퀘스트가 전이되고 있습니다]
[조셉 : 사...살려...ㅈ...]
[불멸자 조셉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퀘스트 완료 조건 : 조셉의 구출]
[퀘스트 보상 : ???]
[퀘스트 내용 : 조셉이 대악마 바포메트의 손에 잡혀 죽어가고 있다. 부활한 바포메트는 아직 원래 능력을 온전히 되찾진 못한 상태다, 하지만 만약 페르세포네를 제물로 바쳐 힘을 얻게 된다면, 세계에는 대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다.]
‘바포메트...라고?’
본래대로라면 산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악마다. 놈은 검은 미사를 주관하며, 영혼을 제물로 삼아 힘을 얻는다.
그런데 놈은 왜 인간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일까?
“호오, 꽤 당돌하구나.”
그때, 바포메트가 백유현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까지 읽어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포메트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다고? 이건 도대체...!’
시간을 걷는 권능을 지닌 조셉을 아무렇지 않게 잡고, 마음까지 읽는다.
원래 바포메트였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 순간, 백유현은 바포메트의 얼굴에 뭔가 겹쳐져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산양!’
끔찍하게 일그러진 모습의 산양.
고통과 공포에 질려 있는 그 모습은 오히려 그 쪽이 바포메트라고 확신이 들 정도였다.
‘설마...!’
산양.
바포메트를 나타내는 단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백유현의 두 눈에 산양이 보였다. 그것도 매우 괴로운 모습으로.
‘잡아먹힌 건가!’
원래 바포메트는 지금 뭔가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놈이 가지고 있던 권능도, 이름도...모든 것이 그 ‘뭔가’에 완전히 흡수당한 것이다.
백유현이 새로운 사실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사내가 조용히 웃는 것이 보였다.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크크크! 뭐, 좋아, 한 번 기회를 주지.”
사내는 조셉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채로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시뻘겋게 녹이 슬어 있는 커다란 갈고리 하나가 단단한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크크크...”
사내는 조용히 웃더니, 그대로 조셉을 거기다 걸어 버렸다.
콰직!
“크아아악!”
울대가 거의 박살난 조셉이었지만, 척추가 박살나는 끔찍한 고통에 미친 듯 비명을 내질렀다.
“자, 이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크크...”
그리고 사내가 백유현을 돌아보았다.
그 섬뜩한 미소가 온 몸이 절로 떨려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이를 으득 갈았다.
[조...셉...남...은... : 5분...]
‘조셉...!’
조셉의 생명력이 확 줄어들어 버렸다.
이제 백유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백유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셉조차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괴물이다.
레벨조차 표기되지 않으며, 사실 백유현으로서는 놈의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놈이 뿜어내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하지만...지지 않아.’
촤앙-
그는 두 자루의 검을 빼들었다.
간장과 막야.
두 자루의 검조차 주변에 휘도는 엄청난 마기에 짓눌렸는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여기서...물러서면 안 돼.’
콰직-
백유현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피가 터져 나오며 고통과 함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포메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저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하데스까지 건드린 배짱하며, 그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힘하며.
‘검을 휘두르는 것. 그것뿐이야.’
동료도, 차사들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오로지 백유현 하나.
기이잉-
백유현의 강력한 기운이 두 자루의 검을 일깨웠다. 공포에 억눌려 있던 간장과 막야가 천천히 그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자, 놈을 베어 버리려.’
검이 백유현의 부름에 공명해왔다.
이제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놈이 힘을 얻고 바깥으로 나가면 세상은 끝이다.
그러니 막을 것이다.
파앗-
백유현의 몸이 움직였다.
그의 두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미친 듯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콰아아앗!
이번에는 백유현의 전신을 휘돌며 거대한 기운이 뿜어졌다.
사력(死力).
일순간 본신의 잠재력을 이끌어내 강력한 힘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염라의 권능.
‘5분.’
공교롭게도 사력의 지속시간과 조셉의 남은 시간이 같았다.
어차피 사력이 끝나면 백유현도 뒤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승부를 봐야 한다.
콰콰쾃!
백유현이 허공을 격해 바포메트에게 짓쳐 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번쩍-
순간, 백유현은 바포메트의 옆구리 쪽을 순간적으로 베고 지나갔다.
“...!”
하지만 백유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바포메트는 백유현의 공격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갑(鐵甲)처럼 단단해...!’
놈의 옆구리뿐만 아니었다.
언제 생겨났는지 바포메트의 전신에는 시커먼 껍질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마치 갑옷처럼.
놀랍게도 간장과 막야 같은 엄청난 무기로도 그 철갑을 베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약점이 없는 것일까?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백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약점은 존재한다.
그 때, 백유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바포메트의 명치 부근.
그 곳에 붉은 점이 힘겹게 점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반짝이는 것도 매우 힘든지, 계속 일그러지며 빛을 발하는 점을 보며 백유현은 깨달았다.
‘조셉!’
조셉의 약점포착.
조셉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내가...반드시 구해낼게! 기다려!’
약점은 파악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놈을 베느냐의 싸움.
파캉-
그 때, 백유현의 등 뒤에 있던 단창이 위로 솟구쳤다.
부아아앙-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악마벌들.
“가소롭구나. 후후.”
백유현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발현한 것이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조소를 날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한 번이면 돼! 한 번만, 내게 기회를 만들어 줘!’
한 번이면 된다.
저 명치에 검을 꽂아 넣을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된다.
단창과, 악마벌이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반드시 해낸다는 생각만 떠올려도 모자라다.
‘간다.’
번쩍-
백유현이 순간적으로 바포메트에게 달려들며 검을 찔러 들어갔다.
쐐애애앳!
그와 동시에 단창이 여러 개로 쪼개지더니 바포메트의 사방을 둘러싸고 압박했고, 악마벌들도 미친 듯 달라붙어 놈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파캉!
콰콰콰쾃!
단창들이 바포메트의 단단한 갑옷을 미친 듯 두들겼고, 악마벌들은 갑옷에 들러붙어 그 단단한 턱으로 갑옷을 아예 갉아버리고 있었다.
와직, 와직, 와직!
악마벌들의 시도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
놈들의 강력한 턱에 철갑이 닳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계속해서 날아드는 단창들은 바포메트의 이목을 끄는데 확실한 역할을 해주었다.
콰앙-
그 순간, 바포메트의 전신에서 거대한 불길이 일어나더니 주변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단창이 튕겨 날아가고, 수많은 악마벌들이 녹아서 사라졌다.
“귀찮게.”
바포메트의 힘은 역시 무시무시했다.
파앗-
그런데 그 순간, 아주 짧은 틈을 노려 백유현이 그의 눈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버려!”
콰콰콰쾃!
그리고 그는 손에 들린 간장과 막야를 매섭게 휘두르며 바포메트의 명치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콰득!
그런데 그 순간, 백유현은 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놀랍게도 바포메트는 한 손을 내밀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던 것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이...제법 꿈틀거리는구나.”
바포메트가 검게 변색되어 가는 백유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클클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었다만, 여기까지다. 죽어라.”
“큭!”
바포메트가 백유현의 머리통을 박살내려는 순간, 백유현이 웃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앗-
바포메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잡고 있었고, 백유현은 뒤로 빠진 상태였다.
바포메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고, 백유현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쓴 웃음을 지었다.
‘큰 일날 뻔 했어.’
“너...”
바포메트는 뭔가를 눈치 챘는지 백유현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심해야 될 거야. 시간을 걷는 건...조셉만이 아니니까.”
시간의 시침핀.
시간을 뒤로 돌리는 단 세 번의 기회.
예전, 조셉이 주었던 그 권능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좀 까다로워질 거야. 잘 막아봐.”
그러면서 백유현은 차분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역시 바포메트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정확히 알았어.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하는지.’
한 번의 공격 실패로 그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파앗-
그가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