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망령, 고
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에는 러시아의 미하엘 대통령이 직접 지휘, 관리하는 각성자관리국이 있다.
러시아의 모든 각성자들은 바로 이 각성자관리국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상당한 불이익이 돌아간다.
아무래도 공산국가의 느낌이 남아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각성자관리국은 최근 들어 상당히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세계각성자협회에서 중국 대표, 왕이가 했던 말 때문에 판도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왕이는 매우 도발적으로 나왔고, 그에 질 수가 없어 러시아나 일본도 왕이의 속을 뻔히 알면서도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상황은 러시아로서도 바라던 바였다.
재미없게 터미널 몇개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불멸자를 더욱 많이 잡는 쪽이 우승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은가?
그래서 러시아의 각성자관리국의 불빛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미하엘 대통령이 직접 와서 지시할 만큼, 이번 일에 상당한 기대감을 보였던 것이었다.
“후우, 쉴 틈이 없구먼.”
“그러게 말이야. 요샌 더 쪼아댄다니깐?”
“그래도 질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미국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안 그래?”
“그럼! 확실하게 코를 뭉개주자고!”
오늘도 각성자관리국 건물 내에 있는 훈련장에서는 각성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임했다. 이들의 훈련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화끈한 러시아답게,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백여 명의 병사들이 쏴대는 각종 화기들을 맨몸으로 헤쳐 나간다거나, 아니면 각자 편을 짜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형식이었다.
이들에게 훈련이란 그냥 대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진짜 실전처럼 싸우는 것을 말함이었다.
상대가 치명상을 입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힐러 팀이 투입되어 살려내니까.
그러니 즉사할 정도의 상처만 입지 않으면 이들은 미친 듯 싸워댄다.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난 터미널에 가 있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죽어라 싸워대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
그러니 대인(對人) 전투에서도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덕분에 팀-엑스 대회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내일들 보자고!”
“내일은 목 조심해야 할 거야. 내가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크크, 무서운 소리를 하는군. 세르게이. 요새 부쩍 강해졌다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세르게이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과연 막 나가는 것인지는 봐야 알겠지. 크크.”
그를 보던 동료들이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고 지독하기로 이름난 그들조차 요새는 세르게이를 보면 한 수를 접어줄 정도였다.
놈과 싸우면 마치 미친 곰과 싸우는 것 같아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각성자들도 있었다.
어떤 각성자는 ‘정말로’ 목이 날아갈 뻔한 적도 있어서, 세르게이는 요주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가자고. 늦었네.”
다른 동료들이 세르게이를 흘끗거리면서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요새 저 자식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저 자식 눈빛만 보면 소름이 돋는다니까? 무슨 눈빛이 저렇게 무섭지?”
“저번에는 저 놈이 생닭을 뜯어 먹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어. 입에 피칠을 해가면서 말이야! 요새 보면 완전히 미친 것 같다니까?”
“아까도 그랬잖아. 야코프 목을 정말로 날려버리려 한 거 봤어?”
나가면서 수군거리는 동료들의 등 뒤를 보며 세르게이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아직 너희들의 모가지들이 붙어 있는 이유는 말이야...내가 살려둬서야. 크크. 하지만 곧 잘릴 수도 있으니 조심들 하라고. 모가지 붙어 있을 때 많이 떠들어 놓고. 크크크!”
짐승과도 같은 시퍼런 눈빛을 뿜어내던 세르게이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동료들도 다 나갔고, 직원들도 퇴근했으니 이제 그만의 의식을 치를 시간이었다.
“...!”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리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의 뒤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세르게이.”
그는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 꼬맹이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세르게이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을 때였다.
저벅.
소년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순간 세르게이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이 자식!’
“아니, 고라고 불러야 하나?”
세르게이의 얼굴이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찌푸려졌다.
“너...뭐하는...”
그리고 그는 급히 숨을 들이삼켰다.
사방에서 뿜어지는 냉기를 느낀 것이었다.
‘이 기운은!’
망자(亡者)라면 가장 두려워하는 음산한 기운.
‘차사(差使)!’
바로 저승차사들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르게이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이 놈들이 지금도 예전과 같을 줄 아나!’
망령, 고는 이미 세르게이의 육체를 빼앗아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세르게이의 레벨은 이미 130 후반대.
망령, 고의 빙의로 세르게이는 그 육체의 한계까지 내몰리며 강제로 강해졌던 것이었다.
그 대가로 세르게이의 육체는 이미 완전히 갈가리 찢겨 나가 있었다.
수명이 확 줄어들었을 정도로, 망령 고는 그의 육체를 가혹하게 굴렸던 것이다.
쿠오오오!
망령, 고는 힘을 끌어냈다.
그와 계약한 불멸자는 육체적 능력을 크게 강화시켜주는 권능이 있었고, 망령, 고는 그 권능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알았다.
그 힘은...
파각-
망령, 고가 빼앗은 세르게이의 거대한 몸이 가볍게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세르게이의 단단한 다리가 순간적으로 눈앞의 소년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보이지도 않는 사각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이 킥에 얼마나 많은 각성자들이 턱뼈가 부러지고, 이가 몽땅 날아갔던가!
그래서 세르게이는 러시아의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었던 것이다.
그의 킥은 곰이 후려치는 힘보다 훨씬 강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고, 실제로 힐러들의 치유 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불구가 된 각성자도 여럿 있었으니까.
스윽-
그런데 세르게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소년은 자신의 공격을 막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허공을 가볍게 유영하듯, 오히려 가볍게 거리를 좁혀온 것이었다.
빠각-
그와 동시에 세르게이는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소년의 주먹이 그의 턱을 그대로 부숴버리고 지나간 것이었다.
콰당탕!
“크악!”
강력하게 킥을 날리던 세르게이는 그 기세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별이 보였고, 일어나보니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턱이 박살나 있다는 것뿐.
스릉-
그 때, 갑자기 쇠가 가볍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세르게이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 뭐 이런 놈이!’
러시아에서조차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각성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조차 세르게이를 상대하려면 진이 빠질 정도라는 것.
그만큼 세르게이는 강했고, 또 강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허무하게 부숴버릴 정도의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미안. 시간이 없어서.”
감정이 전혀 서리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세르게이, 즉 망령, 고는 느꼈다.
‘죽는다!’
죽는다.
그것도 반드시.
“흐아아악!”
죽음을 느끼자, 그는 본능적으로 튕겨 올라 소년에게 덤벼들었다.
그냥 덤빈 게 아니다.
그의 전신에는 거대한 불곰의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걸리면 박살난다.
콰아앙-
마치 지금, 그의 주먹에 걸려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는 대리석 벽처럼.
그런데 그 벽의 색깔이 이상했다.
“커흑!”
대리석은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가슴팍을 하나의 검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피는 그곳에서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 절대 멈추지 않을 듯.
“강효.”
그리고 한 마디가 들렸다.
“차사, 강효. 명을 받잡나이다.”
육체의 힘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망령, 고는 그것을 느끼며 급히 몸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목에 섬뜩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끄륵!”
절명(絶命).
염라의 명을 받아 망자의 숨을 끊어 놓는다는 그 예리한 검이 망령, 고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었다.
망령, 고는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절명은 깊숙하게 그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소멸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유현은 그 모습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임무는 완료되었다.
망령, 고는 사라졌고 염라의 임무는 모두 완료되었다.
파앗-
그리고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창을 바라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특별 포고(布告)]
[염라(閻羅) : 망자(亡者)들의 혼을 불러내는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를 잡아 소멸하라]
[임무 완료 조건 : 초혼사(招魂士) 제거]
[임무 완료 보상 : 신체 능력치 15 포인트, 염라와의 친밀도 250, 시편 2조각]
[염라가 임무를 의뢰해 왔습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보름입니다]
[임무 정보 : 엄연히 명부(冥府)의 존재인 망자들을 불러내 사적으로 이용하는 존재가 발견되었다. 초혼사를 발견하려면 서해의 무관도로 가야 한다]
초혼사.
망령들을 사사로이 부려 명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보상에는 시편이 들어가 있었다.
염라가 백유현이 어떤 것을 원하는 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이런 거라면 백유현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제 러시아에서 볼 일은 끝났다.
그가 향해야 할 곳은 총 세 곳.
영국의 UK-2992 터미널, 그리고 우리나라 동해의 울릉도, 그리고 서해의 무관도.
어느 쪽이 더욱 중요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셋 다 빨리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은 하데스와의 계약을 위해, 그리고 울릉도와 무관도는 시편을 얻기 위해.
‘할 일이 많네.’
백유현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팀-엑스 대회가 눈앞으로 닥쳐 왔다.
사실 백유현으로서는 팀-엑스 대회보다는 세 곳을 다니는 것이 더욱 중요해 보였지만, 일단은 상황이 벌어지는 대로 판단할 생각이었다.
저벅.
그는 러시아 각성자관리국을 나섰다.
들어왔을 때처럼, 은밀하게.
그가 사라진 방에는 러시아의 강자, 세르게이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아마 아침에는 일대 소란이 일 것이다.
얼굴 없는 암살자(暗殺者)를 찾아서.
하지만 그들은 결코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찾는 암살자는, 이미 알리바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음머어어어-”
흰 소, 브라만이 백유현을 등에 태우고 미친 듯 내달렸다.
이대로 서울까지 쭉 달릴 셈인 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내로, 서울의 CCTV에 백유현의 모습이 찍히면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난다.
입증되지 않으면 범죄도 없다.
백유현의 대담한 범죄는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었다.
두두두두-
브라만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