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불귀성
그런데 그 때, 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막야와 간장을 얻자, 새로운 인연이 생겼고 그 봉인이 풀린 것이다.
연리지(連理枝).
서로를 너무 그리워해서 가지가 서로 엮여 버린 형태의 나무.
[연리지의 업보를 해결하였습니다]
[간장과 막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얻었습니다]
[두 무기는 절대 당신 외에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연리지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연리지의 축복 : 두 검으로 인한 단말마(斷末魔) 발생시, 피해의 1퍼센트가 체력과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간장과 막야의 오래된 인연을 다시 이어준 대가로 연리지의 축복까지 주어졌다.
체력과 생명력이 회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지치지 않고 싸움을 지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간장과 막야를 다시 만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대가를 받은 것이다.
- 덕을 쌓으니 운 또한 따르는구나. 잘되었다. 간장과 막야는 이제 너만을 따를 것이니, 잘하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신검합일!’
과거 무협소설에서나 봤던 단어가 아닌가?
말 그대로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 일단 금혼식의 검의(劍意)는 다음과 같다.
파아앗-
그 순간, 놀랍게도 백유현의 눈앞에 처절한 전장의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병사들과 장수들이 뒤섞여 싸우는 피 비린내 나는 전장.
한쪽은 이미 역사 시간에 배워서, 혹은 사극에서 많이 봐서 알고 있는 고려의 갑주를 걸친 자들이었고 또 한 쪽은 특이하게 머리를 묶고 짐승의 가죽 털옷을 입고 덤벼드는 자들이었다.
‘여진!’
백유현은 이미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밀어댔고, 그 가운데서도 유독 피분수가 치솟는 곳이 있었다.
척준경.
그가 있는 곳이었다.
백유현은 마치 가상현실처럼 펼쳐지는 광경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쌍검을 든 척준경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적을 보면 바로 달려들었으며, 두 개의 검이 빛을 발할 때마다 적의 목은 반드시 떨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 창을 들고 달려드는 일단의 병력과 장수 하나가 보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당히 강력해 보였다.
그런데 척준경은 오히려 그들을 보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달려들었다.
여진의 대장이 든 커다란 칼이 척준경을 덮치려는 사이, 척준경은 마치 독수리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쩌엉-
그리고 그의 두 손에 들린 검들이 기괴한 소리를 울려냈다.
콰콰콰콰쾃!
두 검에서 발출된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을 모조리 베어 나갔다.
그 검은 무시무시했고, 날카로웠으며, 살아 있었다.
번쩍-
그리고 순간적으로 하늘이 빛을 잃은 듯 어두워졌다.
마치, 달이 태양을 잡아먹은 듯.
그 광경을 보며 백유현은 전율했다.
‘이것이...’
콰콰쾃!
촤라라랏!
피가 뿌려지고, 무수한 적들이 쓰러진다.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달려오던 대장조차 몸이 조각나 뒤로 넘어간 상태.
척-
진득한 피가 흘러내리는 두 개의 검을 든 척준경의 주변에는 이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 한 번, 주변이 모조리 어두워진 순간 그들의 목숨은 사라졌던 것이었다.
‘금혼식...!’
금혼식의 위력은 이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금혼식이었고, 쌍검의 위력이 이토록 강하다는 것 또한.
그리고 금혼식의 검식이 그대로 마음속으로 전해져왔다.
척준경이 직접 사사하는 것이었다.
우우웅-
그 검식을 사사하는 동안, 간장과 막야가 흥분한 듯 몸을 떨어댔다.
당장이라도 마물들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놈들의 간절한 욕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백유현도 마찬가지였다.
‘모조리...베어버리고 싶다!’
그 간절함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모든 사사는 끝났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바로 그 틈에 도척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지금 거래하다 말고 뭘 하는 거요?”
백유현이 씩 웃었다.
시간은 5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그래도 몸이 달아 있는 도척에게는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 뭐 좀 고민 좀 한다고 말이죠. 자, 어디까지 했지요?”
“일단 도령께 간장을 드렸고, 그 다음 절차를 진행할 차례요. 고대 독사의 어금니는 어떻게 되었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단 무초관에게서 강탈해온 무기들을 슥 내밀어 놓았다.
“그건 잠시 뒤에 말하고, 이 물건들은 어떻게 쳐주시겠습니까?”
“흐음...”
도척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 참, 이거 안 살 수도 없고.”
무초관이 만든 무기들이다.
하나같이 예기가 서려 있고, 진한 살기가 깃들어 있다.
“좋소! 내 이건 장부에 달아뒀다가 나중에 도령이 사고 싶은 게 생기면 드리겠소.”
“가격은요?”
“크흠, 검 다섯 자루에 10만 육편, 낫 두 자루에 7천 육편. 창 한 자루에 1만 육편 쳐주겠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거래 성립! 장부에 확실하게 달아두시고...자, 이제 이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볼까 하는데.”
그는 품 안에서 브리트라의 어금니를 꺼내들었다.
그건 백유현의 것이 아니라, 도척이 맡긴 것이었다.
즉, 아무 짝에도 쓸 모 없는 것.
이제 이게 도척에게 넘어가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다.
백유현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혼단 다섯 개 정도는 서비스로 더 받았으면 싶은데요.”
“크흐, 이 똥꼬에 낀 콩나물도 빼내갈 지독한 도령 같으니! 좋소! 무혼단 다섯 개 더 드리지.”
백유현이 웃으며 어금니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무초관이 직접 봉인을 푼 물건.”
도척의 얼굴에 환하게 밝아졌다.
“크흘흘,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는구나!”
그는 백유현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날름 어금니를 가져왔다.
“크윽! 이, 이게 도대체 뭐요!”
그리고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백유현은 모른 척하며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제 것은 엄청나게 좋은 능력치를 지녔던데.”
“아니, 이게 무슨! 이건 그냥 쓰레기잖소!”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냥 주는대로 가져왔을 뿐인데.”
“도령! 이것은 계약 위반...”
그 말에 백유현이 싸늘하게 도척을 노려보았다.
“난 당신이 시키는 대로 목숨을 걸고 암부에 다녀왔고, 봉인을 풀어서 가져온 겁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계약 위반이 발생했지요? 그럼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지옥시왕(地獄十王)들께 판결을 내려달라고 할까요?”
“끄응!”
지옥시왕까지 들먹이는 통에, 도척은 인상이 더 이상 구겨질 데가 없을 정도로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백유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봉인을 깨고, 좋은 것이 나오란 법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 오래되어서’ 라면야 더욱 그렇다.
“크으, 젠장! 기대를 한 내가 멍청이요!”
백유현이 피식 웃었다.
그 때, 창이 떠올랐다.
‘그래, 일을 했으니 보상은 받아야지.’
보상창이었다.
도척의 청탁에 관련된 임무 보상에 대한 상태 창.
파앗-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백유현의 가용 능력치가 10이 올랐고, 호의도가 150이 올랐다.
그리고 사자육전의 특등품 구역이 개방되었다.
거기다 더해 하나 더,
[지옥 유충 다섯 마리를 획득했습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유충 다섯 마리.
[지옥 유충 : 지옥철갑벌의 유충. 자라나면 무시무시한 턱 힘을 가지게 된다. 지옥 유충은 스스로 시취(尸臭)를 맡아 자신의 먹잇감을 찾아낸다. 암수 한 쌍만 있어도 순식간에 번식한다]
[지옥 유충 다섯 마리가 당신을 모체(母體)로 인식합니다]
‘지옥철갑벌은 또 뭐지?’
백유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옥철갑벌.
보니까 이 유충들이 커서 상당한 힘을 가진 벌로 자라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자신을 어미로 인식한 듯했다.
백유현은 시험 삼아 옆으로 살짝 움직여 보았다.
꾸물텅, 꾸물텅
그러자 지옥 유충들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뽈뽈뽈 기어왔다.
백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것들 봐라?’
사실 유충들의 크기는 작지 않았지만, 백유현의 눈에는 무척 귀여워 보였다.
“참 기분 좋겠수다! 그리 보상을 받으니 좋소?”
“나쁘진 않군요. 아무튼 잘 쓰겠습니다.”
도척이 눈살을 와락 구겼다.
“앞으로 각오하시오. 도령에게는 아주 철저하게 잣대를 들이댈 것이니!”
백유현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 이런...제 쪽에서는 무초관이 만든 무기들을 염가에 제공하고 싶었는데 그리 나오신다면야 제가 도리가 없군요.”
무초관은 이미 백유현이 꽉 쥐고 있었다.
그에게서 무기를 뽑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살짝 어필하자, 도척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의 생각으로는 정말이지 백유현을 가만 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힘도 없을 뿐더러 그래봐야 도척이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전혀 없다.
‘끄응, 이런 영악한 자식 같으니!’
도척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시선은 무초관이 만든 무기들에 향해 있었다.
생각 같아선 죄다 엎어 버리고 싶어도, 저 무기만 보면...!
‘크으! 속 터져!’
무초관이 만든 무기들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도척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역시 노련한 장사꾼이었다. .
“허어, 도령! 웃자고 친 농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시는 것 아니시오? 클클 이거 서운하려고 그러오!”
백유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농담이셨지요? 하긴 저도 설마 진지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실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처럼 서로 간에 깊은 우호도와 신뢰감을 가지고 거래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도척이 순간 똥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싹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오! 클클! 우리 관계는 영원할 거요!”
백유현이 빙긋 웃었다.
“그럼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크흘흘흘...”
도척이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그럼 도령,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크흘흘...”
마지못해 웃는 도척이었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할 일이 많아서 이만 실례를 해야겠습니다. 불귀성을 치려던 중이라.”
“아아, 그렇지요! 당연히 빨리 돌아가셔야지요. 어서 살펴 가시오, 도령!”
이만저만한 손해를 본 도척이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백유현에게 농락을 당한 정도로 손해를 보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지옥, 아니 명부와 암부, 이승에서조차 최고의 실력을 가진 야장, 무초관의 무구를 계속 얻으려면 이것보다 더한 짓도 할 수밖에.
“그럼. 다시 뵙죠.”
도척을 보며 백유현이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촤라라라랏-
그리고 사자육전이 사라졌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성, 불귀(不歸)가 서 있었다.
이미 불귀에는 어마어마한 악귀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금혼식...’
척준경의 혼령이 백유현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 검법을 익히고 펼쳐내는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깨달음도 바로바로 전달이 되었기 때문에 남들처럼 시간이 오래걸리질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바로 실전에 써먹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철컹-
백유현은 간장과 막야를 두 손에 나눠 쥐었다.
묵직함이 기분좋게 두 손 가득 전해지고 있었다.
‘가볼까?’
수많은 악귀들이 있는 불귀.
오늘을 레벨 업 장소는 그곳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