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불귀성
“앞장 서.”
백유현은 문광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광은 순식간에 그에게로 돌아왔고, 백유현이 복속시킨 차사들 또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인면초가 있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곳은 무간 지옥에서도 매우 깊숙한 곳에 있었다.
‘평균 레벨 145...’
전에 백유현이 돌파했던 지역을 한참 지나서야 나오는 거대한 절벽.
그것도 지옥 망자들이 우글거리는 그 절벽의 근처에서 문광은 걸음을 멈췄다.
“저쪽에 있사옵니다. 소주.”
그리고 문광은 절벽 꼭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꼭대기.
날아서 가면 문제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아주 새카맣게 몰려들었군.”
“짐(?)이옵니다. 수컷인 운일(雲日)과 암컷을 음해(陰諧)는 하루 종일 허공을 날아다니며 먹잇감을 찾아 다닌다 알려져 있사옵니다.”
“짐?”
“예, 소주. 예로부터 짐의 독은 지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그 독을 짐독(?毒)이라 부르옵니다. 놈들의 숨결에 조금만 스쳐도 절명한다는 극독이옵니다.”
그 말에 백유현이 씩 웃었다.
독이라.
‘한 번 시험해볼 좋은 기회인데?’
독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존재가 바로 독사(毒蛇)다.
사실 짐 또한 맹독사의 머리통만 씹어 먹어 엄청난 독성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유현에게는 그 독사들의 독에서 완벽하게 보호해줄 아이템이 있었다.
브리트라의 단장검.
‘창이 이기느냐, 방패가 이기느냐 싸움이네. 물론 난 방패가 이긴다에 걸겠지만.’
백유현은 이미 짐들로 가득한 절벽 위 하늘을 바라보았다.
못해도 수천 마리에 가까운 짐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일정하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사냥감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놈들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냥감은 나겠지? 당연히.’
이 지옥에서 백유현만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또 있을까?
죽은 자만이 득시글거리는 지옥에서 산 자의 존재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문광.”
“예, 소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
“예? 소주...! 하오나...!”
백유현이 문광을 바라보았다.
“너, 못 날잖아.”
문광이 쓴 입맛을 다셨다.
“절벽을 기어 올라가서라도...”
“늦어. 내가 금방 다녀오는 게 빨라.”
문광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받잡나이다. 소주.”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짐들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숫자가 보였다.
140 초반에서 150 후반까지 다양했다.
‘좋아, 사냥을 좀 해볼까?’
백유현은 순간 발을 크게 굴렀다.
콰앙-
그리고 그의 몸이 허공 높이 치솟았다.
콰콰콰쾃!
순식간에 그는 높다란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키에에엑-”
“캬아악!”
그런 그를 향해 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먹잇감을 언제 덮칠까 하고 있었는데, 놈이 먼저 치고 올라온 것이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나도 반갑다!”
하지만 그 먹잇감이 오히려 웃었다.
스릉-
그리고 뽑아든 한 자루의 검.
“가볼까?”
공교롭게도 인면초가 열려 있는 곳에는 무수한 짐들이 몰려 있어서, 놈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인면초를 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유현은 결심한 것이다.
놈들을 죄다 죽이기로.
무한낭에다 피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적절했다.
무조건 잡고, 또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콰콰콰쾃!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거대한 폭풍의 날개가 한 바퀴 크게 휘돌았다.
번쩍!
파가가가각!
그와 동시에 백유현의 몸이 제 자리에서 회전하더니, 수많은 칼날의 그림자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촤앗! 촤아앗!
그 칼날의 그림자는 무수히 많이 몰려든 짐들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갈라 버렸고, 짐들은 순식간에 몸이 분해되어 추락했다.
“날 잡아먹으려거든 말이야...”
백유현이 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겠어?”
“키야아아악!”
펑- 펑펑-
그 때, 갑자기 사방에서 짐들이 괴성을 내지르더니, 입에서 뭔가를 뿜어냈다.
그것은 허공에서 세차게 폭발하며, 사방을 가득 메웠다.
파스스스-
순식간에 짙은 먼지구름이 백유현을 가렸고, 그 먼지구름에 스친 절벽 위의 나무들이나 풀들이 순간적으로 누렇게 시들었다.
‘독!’
이것이 전설에 나오는 짐독이었다.
조금만 스쳐도 죽는다는 극독!
파스스스-
그 독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백유현이 입고 있던 옷조차 삭아버릴 정도였다.
[짐독(?毒)의 침습을 감지하였습니다]
[브리트라의 권능에 따라, 모든 독을 무효화합니다]
역시 무시무시한 독이었지만, 아무래도 이쪽의 방패가 더욱 단단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불멸자의 권능과 한낱 괴조(怪鳥)에 불과한 짐의 힘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파아앗-
독가루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백유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짐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번쩍-
파가가가각!
그와 동시에 검은 광채가 또 한 번 번뜩였다.
핏물이 솟고, 몸뚱이가 잘려나가거나 날개가 베여 땅바닥에 처박히는 짐들이 속출했다.
짐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독이 통하지 않는 이상, 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으니까.
촤르르-
그런데 백유현의 검에 짐들이 베여 죽어갈 때마다 핏물이 무한낭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무한낭은 그 주인처럼 피에 굶주려 있었는지, 짐들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싹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 시커멓게 몰려들었던 짐들은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백유현의 검에 놈들은 견딜 재간이 없었다.
수많은 짐들이 추락한 뒤, 이제 백유현의 주변에 남아 있는 짐들은 더 이상 없었다.
살아남은 짐들도 괴성을 지르며 사라졌고, 절벽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짐들의 독이 닿지 않은 그곳에,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저벅.
백유현은 그 꽃들을 향해 걸어갔다.
녹색의 잎을 가진 것이 아닌, 푸르스름한 잎을 가진 풀.
그 풀은 천 년마다 한 번씩 꽃을 피우는데, 꽃의 모습이 마치 고통에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인면초.
무수하게 나 있는 풀 들 중 단 하나에서만 꽃이 피어 있었다.
강효를 고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꽃이 필요했는데, 마침 딱 하나가 열려 있었던 것이었다.
“꺄아아악!”
백유현이 다가서자, 인면초가 갑자기 입을 떡 벌리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듣는 사람의 심장을 덜컥 멈추게 할 정도로 끔찍했고, 기괴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코웃음을 치며 인면초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주저없이 따버렸다.
후두둑-
줄기에서 시뻘건 핏물이 떨어졌다.
여러 모로 괴이한 식물이었다.
백유현은 인면초를 손에 쥐고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쿠웅-
그리고 그는 바로 땅 위로 착지했다.
땅 위에는 수많은 짐(?)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놈들의 시체에서는 독기가 물씬 피어오르고 있어, 차사들도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백유현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문광이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주! 괜찮으시옵니까!”
지독하기로 유명한 짐독을 뚫고 나오는 백유현을 보며 그는 안색이 완전히 질려 있었다.
차사들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짐독인데,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백유현이 씩 웃었다.
“괜찮아. 그리고 이 녀석, 꺾어 왔어.”
백유현은 인면초를 꺼내 보였다.
문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아, 그 후는 소인이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꽃을 건네주시옵소서.”
백유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문광에게 인면초를 건네주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옵소서.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
백유현의 대답에 문광은 바로 사라졌다.
백유현에게 허용된 지옥은 무간 지옥 뿐이었으니, 강효가 있는 곳에 가려면 문광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때, 저 멀리서 수많은 지옥 망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하나 같이 강해 보였다.
“이거 쉴 틈을 안 주네.”
백유현은 투덜거리듯 내뱉었다.
“뭐, 놀고 있는 것보단 낫지만. 차사, 명을 받들어라!”
“존명(尊命)!”
염라가 아닌, 백유현 개인에게 복속된 차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을 섬멸한다! 움직여!”
“명을 받잡나이다.”
펄럭-
이십 위(位)의 차사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백유현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막야를 빼들었다.
“하앗!”
파가가가각!
한 순간 피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이 되어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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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백유현은 피가 맺혀 흐르는 막야를 한 번 허공에 털고는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도 없이 많은 망자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역병의 전도자를 소멸시켰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익사자를 소멸시켰습니다]
....
무려 7,982 구의 망자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그의 검에 소멸된 것이다.
백유현의 주변으로는 이십 위의 차사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그를 호위하듯 서 있었다.
무한낭은 시체들의 피를 남김없이 빨아들였고, 육편(肉片)은 수두룩하게 쌓였다.
그런데 그 때, 그의 눈앞이 일렁이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주를 뵙습니다!”
한 명의 호리호리한 차사와, 그의 뒤편에서 나타난 풍채 좋은 차사 하나.
차사, 강효와 문광이었다.
“강효!”
독에서 백유현을 보호하려다 큰 피해를 입고 명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강효가 다시 회복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소주, 강녕하셨사옵니까?”
“이런...너야말로 좀 어때?”
“소주의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사옵니다. 은혜에 감읍드리옵니다.”
“됐고...일어나.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아.”
백유현은 강효를 일으켜 세웠다.
“문광, 그리고 강효. 이번 무간 지옥 행(行)에서는 내가 얻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그래서 너희들의 도움이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히 필요해. 도와줄 수 있지?”
차사, 강효과 문광이 부복했다.
“명만 내리시옵소서. 분골쇄신하여 그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가자. 저 바깥 세상에서 준동하는 불멸자들을 상대할 힘을 얻으러.”
“앞장서겠나이다.”
강효가 앞장을 섰다.
그가 앞장 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차사들, 따르라!”
백유현의 말에 차사들이 따랐고, 그들은 저만치 보이는 하나의 성(城)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성의 이름은 뭐지?”
“저 성에 다가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 불귀성(不歸城)이라고 하옵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차사들도 다가가길 꺼려하는 곳이옵니다.”
“그래? 그럼 다음 목표는 저기로 해야겠어. 가만 보니...저 곳에 아주 강력한 귀신이 있나 본데?”
백유현의 두 눈에는 다 보였다.
성 안에 떠오른 레벨 표시들은 모조리 빨갰고, 그 중에서는 검붉은 표시도 있었고 보랏빛을 띠는 표시들도 간혹 보였다.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야만(野蠻)이라는 악귀가 존재하옵니다. 맨손으로 짐승을 찢어 죽인다는 포악한 귀신으로 알려져 있사온데, 차사들도 여럿 놈에게 당했사옵니다.”
어렴풋이 보이는 보랏빛 레벨 표시.
거기에는 172 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보랏빛 표시는 세 개 정도가 있었는데 제일 낮은 것도 168 이었다.
백유현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 그럼 더욱 더 물러설 수 없지.”
까득-
그는 무혼단과 진혼단을 다시 씹어 먹었다.
“가자, 불귀성으로.”
파앗-
백유현이 내달렸다.
펄럭-
그 뒤를 차사들이 따랐다.
불귀.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