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본격 유통업
파캉-
키에에엑-
백유현의 손에 들린 막야가 소름끼치는 울음 소리를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망자들의 몸이 동강나며 쓰러졌다.
번쩍-
그 사이를 백유현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수많은 망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자루의 섬뜩한 칼날.
그 칼날은 그들을 베어내며 진득한 체액을 흩뿌렸다.
망자들은 수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무혼단과 진혼단을 복용한 백유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로도는 거의 쌓이지 않고 있었고, 공격 속도나 이동 속도는 미친 듯 올라가 있었으니까.
철컹-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몸이 멈추었다.
털썩-
그 앞에 한 구의 망자가 쓰러졌다.
어느새 백유현의 주변에는 수북하게 시체들이 쌓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 백유현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당신, 진즉 그랬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크크크...”
그의 눈앞에는 붉은 혈광을 뿜어내는 거대한 괴인이 서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초라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무초관이었다.
탐욕적으로 피를 갈구하는 두 눈빛, 그리고 입에서 질질 흘러내리는 침...
백유현은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쇠를 식히기 위해서만 피가 필요했던 게 아니구나? 당신 말이야.”
“닥치거라. 크흘흘! 흐음- 얼마만에 맡아보는 신선한 피 냄새이던가! 네 녀석은 잘게잘게 찢어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어야겠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지 모르니.”
백유현이 피식 웃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쩌엉-
그의 손에 들린 막야가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그 따위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처음에는 달군 쇠를 식히기 위한 핏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 무초관은 피 맛을 알게 된 것이겠지.
그 동안의 목마름을 달래줄 피의 진한 맛이, 그를 악귀로 바꿔 놓은 것이다.
“닥치...!”
무초관은 성을 벌컥 내며 소리쳤지만, 금세 두 눈을 부릅떴다.
쐐애앳-
백유현이 어느새 그의 눈앞으로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각-
그리고 어찌할 도리도 없이 막야가 무초관의 다리 한쪽을 베고 지나갔다.
촤앗!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돌아선 백유현은 번개처럼 움직이며 무초관의 또 다른 다리를 베어 버렸다.
“크윽!”
불의의 일격을 당한 무초관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백유현의 공격은 멈추지않았다.
아니, 아예 기회를 만났다는 듯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가가각!
촤아아앗!
수많은 칼날이 무초관의 몸뚱이 위로 쏟아졌고, 무초관의 다리는 순간적으로 너덜너덜해졌다.
쿠웅-
급기야 무초관은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었다.
“흐아아아아!”
그는 분노가 서린 얼굴로 괴성을 내질렀다.
이미 다리가 거의 베여나간지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쩌저정-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뒤쪽에 있던 대장간에서 수많은 쇠붙이들이 공중으로 둥둥 떠올랐다.
- 키에에엑!
- 케에엑!
그 쇠붙이들은 하나 같이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당연한 광경이기도 했다.
원혼에 물든 피가 놈들의 뜨거운 몸을 식혔을 테니까.
촤촤촤촷!
무수한 쇠붙이들이 백유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실 그 공격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쇠붙이들 하나, 하나는 무초관이 만들어낸 걸작.
그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사방에서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퍼퍼퍼퍼퍽!
“끄에에엑!”
“크웨에엑!”
하지만 백유현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수많은 쇠붙이들을 맞은 것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이었다.
백유현은 망자의 완갑으로 스무 구의 시체를 되살려 방패막이를 삼은 것이었다.
털썩-
본연의 임무를 다한 시체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놈들의 몸에는 수도 없이 많은 쇠붙이들이 꽂혀 있었다.
“어차피...다리는 필요 없겠지? 안 그래?”
백유현이 시체들 사이를 걸어가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크으으-”
무초관이 백유현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백유현은 그에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망치를 들고 두드리려면 두 손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아, 그리고.”
콰직-
“끼에에엑!”
백유현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수한 날붙이들 가운데 적당한 하나를 골라 그대로 무초관의 어깨에 박아 버렸다.
그리고 한 번 힘을 주어, 날붙이를 좀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딱 한 시간 주겠어.”
툭-
백유현은 뭔가를 작업대에 던져 놓았다.
하나는 크게 변색된 브리트라의 어금니, 또 하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브리트라의 어금니였다.
“봉인, 풀어.”
“네 놈...찢어 죽...끄아아아아!”
무초관은 백유현을 노려보다 말고 미친 듯 몸을 뒤틀었다.
“봉인 다 풀고 찢어죽이든 뭐하든 해. 그건 상관 안 할 테니까, 일단 봉인부터 풀어. 이제부터 헛소리 하거나 시간이 늦으면 계속해서 찔러 넣을 거야. 알지? 이 검의 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심장(心腸).
백유현이 꽂아 넣은 검은 바로 무초관의 심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백유현이 빙긋 웃어보였다.
그 때, 창이 떠올랐다.
[추방자들의 왕의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광혈마, 무초관을 제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가용 신체 능력치가 20 올라갑니다]
[오석 3,000개가 주어집니다]
[시편(尸片) 2조각을 얻었습니다]
[‘암부의 거주자’ 명칭을 획득했습니다]
추방자들의 왕이 의뢰한 임무를 달성했다는 창이었다.
그런데 백유현은 그 창을 보며 와락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 중에서 그의 시선을 유독 잡아끈 문구가 있었던 것이었다.
‘시편...!’
[시편 : 시신의 조각. 100조각을 모으면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다. 암부에서만 획득 가능하다]
백유현은 주먹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100조각을 모으면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다.
‘엄마...!’
이제까지 그가 달려온 이유.
그 단서를 이제 겨우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염라를 통해 엄마를 되살릴 수도 있지만, 이제는 시편을 모아서 되살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어진 보상.
[암부의 거주자 명칭을 획득했습니다]
[암부의 거주자 : 이제 간수들이 당신을 보고 선제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암부의 존재들과 우호적이 됩니다. 암부의 척살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면, 그들의 반응속도가 둔화됩니다. 암부의 존재들을 공격해도 카르마 지수가 1,000이 되기 전까지는 우호도가 유지됩니다]
더 이상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척살자들이 붙은 이상, 제한은 걸려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숨어서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크으으-”
그 때, 무초관이 원독이 잔뜩 서린 눈빛으로 백유현을 노려보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불의의 일격으로 하체를 급습당해 완벽하게 제압당해 버린 것이 큰 실수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계속 쳐다만 볼 거야? 시간 가는데?”
으득-
무초관은 다시 이를 갈아 붙이더니 주먹을 부르르 떨며 브리트라의 어금니 두 개를 들었다.
다리가 엉망이 되어, 배를 땅바닥에 붙이고 기어 다니는 모습이 매우 불쌍해 보였지만 그것은 그의 업보였다.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짓을 해 버린 업보.
그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니까.
카앙-
그는 어쩔 수 없이 망치를 들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허튼 수작을 부렸다간 죽는다.
부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어깨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검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움찔 거려서 그럴 수도 없다.
어깨가 욱신거려 상당히 신경이 쓰였지만, 그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 지금의 무초관의 상황이었다.
따앙- 땅-
무초관은 어느새 이마에서 구슬땀까지 흘리며 브리트라의 어금니의 봉인을 깨기 위해 몰두하고 있었다.
그 동안 백유현은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암부의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무초관의 대장간.
역시 이곳에 걸려 있는 무기들이나 쇠붙이들은 보통 범상치 않았다.
예리하게 세워져 있는 날이며, 재질의 단단함까지...
모든 것이 백유현으로서도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검(劍)도 몇 자루 있었지만, 막야보다는 좀 떨어지는 물건들이었다.
역시 간장이 막야를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무초관이 정성을 들여 만든 무기는 ‘창(槍)’이라는 것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창은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하나 같이 범상치가 않았다.
‘대단하네...역시...’
백유현조차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창에는 하나 같이 원귀(寃鬼)가 서려 있어 보통 사람은 줘도 사용하기가 힘들 듯했다. 백유현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러다 문득 백유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두 눈에 하나의 물건이 들어왔던 것이었다.
‘음...’
그것은 여러 개의 짧은 단창(短槍)이었는데 등에 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겁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매우 가벼웠지만, 상당히 견고해 보였던 것이다.
‘이거 마음에 드는데?’
백유현은 그 단창을 들며 이리저리 살폈다.
그 때, 무초관이 불쑥 말했다.
“함부로 만지지 마라. 잘못 만졌다간 네 놈을 죽일 수도 있는 물건이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끼에에에엑!
모두가 다 원한 서린 물건이었지만, 유독 이 단창에서는 더욱 강렬하고 지독한 원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아. 그래서 더 마음에 드네.”
백유현은 창을 꽉 쥐었다.
창 하나, 하나가 한 손에 들어오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었다.
단, 끊임없이 파고드는 창에 서린 원독이 무시무시했지만.
그 때 창 하나가 떴다.
[칠흑의 단창]
[지독한 원독이 깃든 피로 식혀낸 걸작. 무초관이 아끼는 단창으로, 창 하나, 하나에는 원귀가 스며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도, 예리하게 번뜩이는 창날을 보고 있자면 심장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조심하라. 창날은 주인과 적을 가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물건이네.’
백유현은 그것을 집어 들어 등 뒤로 맸다.
- 끼에에에엑!
놈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지만, 백유현은 내버려두었다.
일반 사람 같으면 혼비백산했겠지만, 백유현은 워낙 익숙했으니까.
‘그건 그렇고...가만 있어봐...’
대장간의 벽에는 창이나, 도, 작은 비수 같은 것도 걸려 있었는데 백유현은 그걸 보면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걸 그냥 이곳에 걸어두기에는 왠지 아까웠던 것이었다.
‘이걸 갖다 팔자!’
그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챙겼다.
“지, 지금 뭐하는 게냐!”
“전리품 챙기는데 불만 있는지?”
“뭐라고?”
“네 목숨 값이라고 해두자고. 어차피 당신을 죽이고 가져갈 수도 있는 물건이잖아?”
백유현의 말에 무초관이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어서 일이나 하라고. 아, 이럴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좀 방문을 해야겠네. 평소에 꾸준히 만들어 두도록 해. 피가 필요하면 말하고. 간수들 몇 잡아다 줄 테니까.”
“미친...!”
백유현은 지금 장난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느꼈는지 무초관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자신보다 더 미친놈이 나타난 것이다.
무기들을 챙긴 백유현이 더 이상 가져갈 것이 없나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무초관이 쓰던 솥이나 작은 냄비까지 싹 쓸어 담았다.
명색이 최고의 야장이 쓰던 물건이다.
값이 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걸 사줄 존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런 게 유통업이지.’
명부.
바로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