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금백산
파앗-
[암부(暗府)에 입장했습니다]
[암부의 주인이 당신을 보며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축출(逐出) 명령 발동]
[암부의 척살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축출까지 남은 시간: 00:50:00]
지옥 안의 지옥.
암부가 열렸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백유현은 도척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미 그는 진혼단을 먹어 이동속도가 올라가 있었고, 모든 신체 능력치의 5 퍼센트가 상승한 상태였지만, 암부에서 남은 시간은 겨우 50분.
게다가 암부의 척살자에게 걸리면 살아서 쫓겨날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 시체만 나갈 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다.
도척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 백유현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브리트라의 어금니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재밌네.’
시간은 흘렀다.
하지만 백유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럴 때 쓰라고 타임 뱅크가 있는 거지.’
그는 아껴두었던 타임 뱅크의 시간을 투자했다.
‘일단은 두 시간부터.’
파앗-
[암부의 척살자의 움직임이 둔화(鈍化)되었습니다]
[축출까지 남은 시간 : 02:50:00]
상황이 바뀌었다.
백유현은 씩 웃었다.
역시 조셉은 대단한 존재였다.
‘자, 그럼 움직여볼까?’
암부의 풍경은 무간과 비슷했다.
다만 더욱 더 어둡고 음산한정도?
그런데 이곳에는 지옥 망자들이 아니라, 낫이나 쇠못이 박힌 몽둥이를 들고 있는 간수(看守)들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보였다.
‘자치구(自治區) 같은 곳인가? 지옥과 비슷해 보이지만, 뭔가 다르네?’
명부와 암부.
명부 속에 암부가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
이곳은 죄인을 벌주는 곳이 아니라, 사악한 망자들이 모여 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검림지옥과 비슷한.
- 이곳은...?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몸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척준경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장군.”
- 이곳은 암경(暗境)이 아니더냐? 검림지옥에서 들은 적이 있다. 이곳에 진정한 검의 달인이 숨어 있다고.
“검의 달인이요?”
- 그렇다. 그 자의 이름은 맹광척. 검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검의 신(神)이라 불리는 존재라고 들었다. 내 언젠가 한 번 그 자를 찾고 싶었거늘!
“그럼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척준경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내, 검림지옥에서 수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단 한 명의 사내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닷새 밤낮을 서로 치고 받았지만 결국 내가 무릎을 꿇고 말았지.
‘척준경을 이긴 상대라고?’
고려의 무신이라 불리는 척준경이다.
비단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에도 그의 엄청난 위명이 잘 알려져 있다.
그 관우조차도 척준경에게는 밀리지 않았던가?
백유현이 알고 있는 한 그보다 강한 존재라고는...
- 항우. 그 자의 이름이다.
“아...!”
백유현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항우라면 그럴 수 있다 생각이 들었다.
척준경도 물론 엄청난 무위를 떨쳤지만, 항우는 그야말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괴물. 그라면 척준경과 접전을 벌일 수 있는, 그리고 그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 때, 척준경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런데 그 자는 뜻밖의 말을 했었다.
“뜻밖의 말이라 하심은...?”
이어지는 척준경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그 자가 천 번을 덤볐지만, 결코 이기지 못한 자가 있었다고. 바로 그 자가 암경(暗境)에 산다는 맹광척이라 했었다.
항우가 말한 최고의 무인.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 이곳은 검림지옥보다 훨씬 위험하고 사나운 곳. 그러니 조심하여라. 항우조차 치를 떨었던 곳이니.
어떻게 항우가 여기에 왔다갈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조차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곳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군.”
- 아, 그리고.
“예, 장군.”
- 이곳에 한 명의 야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 이름은...
이유는 모르지만, 사자육전에서는 척준경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있었던 얘기는 척준경은 아예 모르는 것이다.
“혹시, 금백산이라는...”
- 아니다. 그 자의 이름은 무초관. 뭐든지 만들어내지 못하는 날붙이가 없다는 전설의 야장이라고 들었다. 항우가 맹광척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맹광척이 그 무초관이 만들어낸 무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었으니. 그 자를 찾아내면 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역시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도척이 말한 대로, 무초관은 전설적인 야장이 분명했고 그가 브리트라의 어금니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존재였으며, 또한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반드시 찾아야겠어.’
그런 자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막야도 강했지만, 상대가 이제 불멸자로 바뀌는 단계다 보니 어느 정도는 강화를 시켜 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장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여라. 이곳은 나 역시 궁금했던 곳이니 힘을 다해 도와주마.
척준경의 목소리에서 묘한 떨림이 전해지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척준경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고, 백유현은 다시 안력을 돋우어 사방을 살폈다.
그리고 이곳의 상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사방에 눈(眼)이 있다.’
검붉게 물든 허공에도, 핏물이 스며든 듯 붉은 땅 위에도, 심지어 그 아래 지하(地下)에도. 눈이 있었다.
그 뜻은, 사방에 간수(看守)들이 쫙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허공에는 기괴한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자들이, 땅 위에도 계속 해서 돌아다는 간수들이, 지하에는 파묻힌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들이.
귀안(鬼眼)이 열려 있는 백유현에게는 다 보였다.
‘하지만.’
백유현은 마른 미소를 지었다.
눈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보이지 않으면 말짱 헛것임을.
펄럭-
백유현은 검은 그림자 장포를 이용해 몸을 감춘 것이었다.
아무리 포악하고 강하다 해도 놈들은 망자(亡者).
강행돌파도 가능하긴 하겠지만, 크게 소란을 피웠다간 암부의 척살자들에게 들킬 위험성도 있다.
그러니 백유현은 안전하게 검은 그림자 장포를 펼친 것이다.
대다수의 망자들에게서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차사들의 물건.
콰아아앗!
그리고 그는 바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날개가 있는데 괜히 걸어다닐 필요는 없었다.
진혼단에, 검은 그림자 장포의 힘까지 발동되자 그의 이동속도는 상당해졌다.
콰콰콰쾃!
그는 바로 암부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았다.
“키잉?”
뭔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스쳐 지나가자, 기이한 새를 타고 날던 간수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가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백유현은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고 암부의 모습을 모조리 눈에 담았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거대한 산맥과, 군데군데 보이는 망자들의 묘지, 썩은 늪, 동굴...
그리고 이곳에 잡혀온 것인지 지옥망자들이 한끼 식사가 되어 튀겨지는 모습들...
‘이곳이 암부...!’
지옥이되, 차분하고 차분하되, 지옥보다 더한 광경이 펼쳐져 있는 이곳이 바로 암부였다.
그리고 그는 아까부터 온 몸의 피부가 타오르는 듯한 뜨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불 속성에 상당한 내성이 있는 그가 이 정도로 느낄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뜨겁다는 얘기였다.
펄럭-
그는 허공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 하나의 거대한 산(山)이 있었다.
그냥 산이 아니었다.
그 산은 그야말로 화산(火山).
바위도, 흙도, 나무도 없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불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길.
그리고 그 불길 아래는 수많은 지옥 원혼들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원래 불은 모든 사특한 것을 태우며, 부정한 것을 소멸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불은 오히려 그 어떤 것보다 음산했으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저승불]
[무엇이든 녹여낸다는 저승의 불을 발견했습니다]
조셉의 스포일러 덕에, 백유현은 눈앞의 이 거대한 불이 저승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금백산이 근처에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일단 그를 만나야 했다.
그래야 그의 스승인 무초관의 행방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백유현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곳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저곳인가?’
연기가 올라온다는 것은 어쨌든 불을 쓴다는 뜻이다.
그리고 야장(冶匠)에게 있어 불은 반드시 필요한 것.
확인 해봐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파앗-
백유현은 빠르게 아래로 하강했다.
저승불의 뜨거움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견딜만했다.
주변에 간수들이 없음을 확인한 백유현은 천천히 땅에 내려 걸었다.
‘대장간이다!’
역시 그랬다.
하늘에서 본 연기는 이 곳, 대장간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였던 것이었다.
대장간은 무척이나 컸는데, 바닥에 놓여 있거나, 벽에 걸려 있는 것들은 보통의 농기구들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고기를 벽에 걸 때 쓰는 쇠고리, 끝이 수십 개로 갈라진 쇠 채찍, 쇠몽둥이, 수많은 가시가 박힌 의자...
말 그대로 지옥에서 쓰이는 온갖 고문 도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저 끝, 붉은 피부를 지닌 한 노인이 망치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꽈앙- 꽈앙-
그 망치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단금을 하는데 땅이 쿵쿵 울릴 정도였다.
‘저 노인이 금백산인가?’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그 자가 금백산일 확률은 높았다.
백유현이 좀 더 살펴보려는 찰나, 노인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런데 이상하게 노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느낌은 왜일까?
백유현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움직이려는 순간, 노인이 말했다.
“산 자가 여긴 무슨 일이냐?”
백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검은 그림자 장포를 뒤집어써서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 때 노인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클클, 고 놈, 재미있는 놈이로다. 모든 것을 환히 밝히는 저승불 앞에서 그깟 차사의 장포가 가진 잔재주가 통할 것 같았더냐?”
‘이런!’
그걸 생각 못했다.
사실 예측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백유현은 어쩔 수 없이 장포를 벗었다.
그 때 노인이 다시 말했다.
“허엇, 그렇다고 장포를 벗어버리면 도망은 어찌 치려는게냐?”
‘무슨...?’
순간 백유현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장간.
이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수도 없이 몰려든 간수(看守)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었다.
“클클,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클클클!”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후우...’
140.
152.
148.
...
그가 웃는 이유가 있었다.
백유현을 둘러싼 간수들의 레벨은 무시무시하게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 가면 보스 몬스터 급의 존재들이 수두룩하게 몰려와 있었으니.
그런데 순간 백유현 또한 씩 웃었다.
파앗-
그리고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뒤로 돌아갔다.
펄럭-
백유현은 장포를 벗지 않은 때로 돌아가 있었고,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던 간수들은 죄다 사라져 있었다.
백유현은 조셉이 주었던 시간의 시침핀을 하나 써서 시간을 뒤로 돌린 것이다.
자신이 장포를 벗기 직전으로.
“네, 네 놈!”
백유현이 피식 웃었다.
“저승불이니 뭐니 그런 거짓말은 그만 하죠. 이곳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저를 볼 수 있는 거, 다 알았으니까.”
아니었다면, 지금 역시 간수들은 죄다 몰려와 백유현을 둘러쌌을 것이다.
하지만 장포를 입고 있는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노인 단 하나.
그렇다는 얘기는 애초에 노인에게만 백유현을 볼 수 있는 특수한 힘이 있다는 뜻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어르신이 금백산 어르신입니까?”
노인은 뚫어져라 백유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