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징표
악신 브리트라.
인도 설화에 등장하는 악신의 이름이었다.
인드라와의 싸움에서 비록 지긴 하지만, 해마다 다시 부활하여 인드라와의 싸움을 벌이는 사신(蛇神).
놈이 바로 조셉이 말한 여덟 카르마의 혼종이었던 것이다.
172.
지금 백유현이 보고 있는 놈의 레벨.
브리트라 치고는 낮은 레벨이지만, 그것은 이제야 불멸자가 되었다는 얘기일 뿐, 앞으로 저 레벨은 더욱 올라갈 것이다.
그 한계는 아무도 모를 일.
그러니 빨리 잡아야 한다.
아마 일행의 눈앞에 떠오른 타이머가 그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브리트라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
이 균열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브리트라라고? 그거, 고대 인도의 악신 아니야? 인드라와 싸웠다던!”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이 없어요. 지금 레벨은 172. 하지만 놈은 계속 진화 중이에요.”
“이번에 싸웠던 상류처럼? 그 녀석, 전투 중에 확연히 달라졌었어.”
“맞아요. 놈이 더 진화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잡아야 해요.”
“이런...!”
박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악의 상황이다.
K-666은 148 레벨 대응의 터미널.
보스 몬스터가 나와도 150레벨 후반대나 160대 초반으로 예상되는 터미널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브리트라는 172레벨의 엄청난 괴물.
거기다가 입구는 막혀서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보다 더욱 최악인 것은 감마 팀까지 있다는 것이다.
172의 괴물 앞에서 100에서 120레벨대의 감마 팀은 짐만 될 뿐이다.
‘후우...’
박성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았다.
경험이 많은 그로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최악(最惡)을 가리키고 있다.
알파 팀으로서도 놈을 잡을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상황.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 때, 백유현이 입을 열었다.
“음? 너 혹시 지금...?”
“예. 이곳도 다르지 않아요. 이제야 균열 밖에 물귀신들이 왜 그렇게 많이 몰려 있었는지 알 것 같아요. 어떤 망자인지는 몰라도, 놈의 기운이 수많은 귀신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어요. 물귀신들은 몰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끌려 들어왔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놈은 균열을 통과해 들어온 물귀신들을 꾸준히 잡아먹고 브리트라가 된 것이고요.”
백유현의 말에 박성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방법이 있다는 거야?”
“일단, 어차피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우린 죄다 죽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7시간 여...그 동안 승부를 봐야 해요.”
‘게다가...’
백유현은 뒤에 이어질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조셉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은 절대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더블 카오스.
조셉은 이곳에 곧 더블 카오스가 덮칠 것임을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 안의 모든 몬스터와, 망자들이 더욱 강해진다.
브리트라 역시 균열의 힘에 영향을 받을 지도 모른다.
더블 카오스가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브리트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힘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남은 시간은.’
그래서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떠 있는 7시간 50분이 아니다.
‘앞으로 두 시간 이십 분. 그 뒤는 더블 카오스가 덮쳐와.’
구조 요청도, 탈출도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팀인 알파 팀과 감마 팀으로서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
[스페셜 퀘스트(Special Quest) -내용 변경-]
[조셉 : 이런! 이젠 불멸자를 잡아야 겠군요!]
[임무 완료 조건 : 악신, 브리트라의 소멸]
[임무 완료 보상 : 신체 능력치 15 포인트, 조셉과의 친밀도 150, 수수께끼의 상자, 조셉의 권능 이전]
[조셉이 퀘스트 내용을 수정 했습니다. 수정된 퀘스트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2시간입니다]
[임무 정보 : 여덟 카르마의 혼종이 불멸자, 브리트라로 진화했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큰 뱀이라는 별칭이 붙은 놈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 또한 2시간 여 후면 더블 카오스가 발생, 놈의 힘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 전에 놈을 잡아야 한다. 아니면...]
[추가 : 임무 완료 후 주어질 보상인 조셉의 권능, ‘약점 포착’이 특별 발동됩니다]
[특별 발동되는 약점 포착은 임무 실패 시 소멸됩니다]
스페셜 퀘스트의 내용까지 바뀌었다.
덩달아 보상도 바뀌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브리트라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욱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조셉 역시 적극적으로 백유현을 돕고 있었다.
약점 포착.
아마 조셉은 시간을 선행해서 놈의 약점을 보고 온 것일 것이다.
그것을 현재 시간대에 각인시켜 백유현을 도우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 볼만 하다.
사실 몬스터들마다 약점은 다 달라서, 목만 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조셉의 권능, 약점 포착이 특별 발동되었습니다]
[대상 : 악신, 브리트라]
[지속 시간 : 3시간]
3시간 밖에 지속이 되질 않는 권능.
일단 균열이 닫히는 것이나, 그로 인해 퇴로가 막힌 상황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2시간 20분 후에 발생할 더블 카오스.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브리트라의 진화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좋아, 일단 세광이는 감마 팀과 함께 여기 남아. 무현이도 여기서 천리통으로 지원하고. 수향이, 현성이, 유현이. 나와 함께 브리트라를 잡으러 간다.”
박성진으로서도 생전 처음 겪는 위기 상황에, 그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는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주세광은 만일을 대비해 감마 팀을 보호하기 위해 남았고, 천무현은 천리통으로 지원사격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유지혜 씨, 가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마 팀의 유지혜는 가호술사였다.
그녀와 계약한 불멸자는 이른 바 버프 형 불멸자였던 것이었다.
물론 치유도 가능하지만, 다른 이의 힘을 북돋아주고 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다.
파앗-
유지혜는 모든 팀원들에게 가호를 걸어주었다.
‘와, 이거 좋은데?’
백유현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의 가호의 효과는 상당했다.
쾌속(快速), 순검(瞬劍), 강권(鋼拳), 철피(鐵皮).
네 가지의 가호는 모든 팀원들에게 더욱 빨라진 속도와, 공격 속도, 파워, 그리고 방어력을 올려준 것이다.
“제가 아직 등급이 낮아서 지속 시간은 겨우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뭘요, 이런 엄청난 버프가 한 시간이면 아주 훌륭하죠.”
“그래, 한 시간 내로 브리트라를 잡자고. 라이플, 놈의 위치 추적해봐.”
“예!”
천무현은 권능 ‘사냥꾼의 직감’을 사용하여 대상을 추적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매우 훌륭한 효능을 보여주는 권능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 말했다.
“목표물에 징표(徵標)찍었습니다.”
“오케이, 이제 무전 대기 모드로 전환. 출발한다.”
“옛설.”
박성진과 김현성, 김수향, 백유현은 팀을 이뤄 이동했다.
그들의 뒤에는 감마 팀과 천무현, 주세광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감마 팀의 유지혜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혜씨!”
감마 팀의 다른 팀원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이미 울음을 터뜨린 후였다.
아무리 치우 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악마의 도시에서의 엄청난 위기감은 그녀를 완벽한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이었다.
“흑흑, 이제 우리 어떻게 하죠?”
“후우, 그러게 말이다...”
감마 팀의 팀장, 유한재도 걱정 서린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더 이상 그녀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때, 알파 팀의 두 사람이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형. 여기서 잡으면 된다니까요? 자리 딱 좋구먼.”
“야, 거기도 좋지만, 여긴 어때? 둘 다 지원 가능해 보이는데.”
“거긴 자세 잡기가 힘들다니까요? 쯧, 총을 쏴봤어야 알지.”
“뭐? 이 자식이, 형님 말씀을 무시해?”
천무현과 주세광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투덕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감마 팀의 팀원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씩 웃었다.
“아, 저희 형이 좀 철이 없죠?”
“이 녀석이 아직 철이 안 들어서...하하!”
“두 분...긴장 안 되세요?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감마 팀의 조경준이 조심스레 물어왔지만, 둘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가요? 아, 브리트라 잡는 거? 하나도 걱정 안해요.”
“걱정 할 게 뭐 있나요. 어차피 잡힐 거. 우린 그거보단, 누구의 손에 잡히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주세광의 말에 천무현이 씩 웃었다.
“그러게. 현성이 형일까, 아니면 유현일까? 형은 어떻게 생각해?”
“뭐, 얼마 전이라면 현성이 형 편 들었겠지만...지금은 아무래도...”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현이가 잡을 것 같단 말이야.”
둘이 주고받는 말에 감마 팀의 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지금 말하고 있는 현성이라는 사람이 김현성인가요?”
장호영이 무심코 내뱉었다가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가렸다.
이곳에 있는 현성이 대한민국의 전설, 김현성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감마 팀이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김현성이 질 수도 있다는 상대 때문이었다.
그것도 같은 알파 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이름.
“아까...그 고등학생...그러니까 백유현이라는 친구가 김현성 선배를 이길 수 있다는 건가요?”
누구나 들으면 놀랄 얘기였다.
김현성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그리고 그는 최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예. 당연하죠. 유현이가 싸우는 걸 본다면,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사실 아직까진 모르지만, 그래도 유현이에 한 표. 지금 현성이는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유현이는 진화 중이니까. 무시무시한 놈이거든요. 그 놈.”
“와...”
감마 팀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을 보며 주세광이 씩 웃었다.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녀석은...직접 보셔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으니까.”
“후후. 그건 나도 인정. 어? 싸움 붙었다!”
천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준경에 눈을 갖다 댔다가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서 이미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파앗-
촤앗-
감마 팀에게도 수많은 몬스터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김현성과 백유현.
둘은 공교롭게도 검사(劍士)였고, 쾌검을 썼다.
그런데...
“뭐...야?”
“저, 저건...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야!”
내로라하는 각성자들인 감마 팀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김현성의 검은 역시나 빨랐고, 정확했으며, 강했다.
그런데 그 김현성의 반대편에서 움직이고 있는 백유현이라는 소년의 검은...!
번쩍-
간결하다.
하지만 강력했다.
한 줄기 섬광이 허공에 새겨지는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이 녹아 내렸으니까.
너무도 효율적이고, 너무도 아름다운 몸놀림이다.
김현성과 비교해서도 이쪽이 더욱 사냥이 빨랐고.
감마 팀은 자신들도 모르게 김현성 쪽에서 백유현 쪽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천무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요. 저 녀석, 괴물이라고. 그러니...”
천무현이 씩 웃었다.
“우리가 걱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저 둘이 못하면, 대한민국에서 이 위기를 벗어날 존재는 아무도 없으니까.”
기이한 신뢰감이었다.
하지만 감마 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백유현.
그 이름이 가슴에 콱 박혀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