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새로운 불멸자
금정산은 금방 도착했다.
멀리서 봤는데도 불구하고 음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뭐가 있긴 한 것 같았다.
“강효. 차사들을 풀어서 알아 봐.”
“존명.”
내 말에 그 주변에 있던 차사들이 한데 모이더니 금정산 자락을 타고 사방으로 쫙 퍼졌다.
그리고 나 역시 짙은 안개가 깔린 금정산 자락으로 들어섰다.
흰 소, 브라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풀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무섭지도 않나...? 하긴 시바하고 있었던 소인데 이런 게 무서울까?’
백유현은 브라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의 주인이 시바였다는 사실에 그러려니 했다.
아무튼 브라만도 본신에 강력한 힘을 지닌 소이니만큼, 웬만한 망자들에게는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놈들이 위험하면 위험했지.
그 때 저 멀리서 붉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바라본 강효가 나직하게 말했다.
“소주, 표식이옵니다. 아마 저 곳에 무명이 있는 듯하옵니다.”
“가자.”
백유현이 바로 움직였다.
그 뒤로 두 명의 수행 차사, 강효와 문광이 따랐다.
그 쪽으로 향할수록 음산한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망자들이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두 눈에서는 원독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산 가득 헤매고 다니는 그들은...
“강효...봤어?”
“예, 소주. 겁에 질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앞에 포식자가 있다는 뜻이지.”
그들은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망자들의 발은 마치 수렁에라도 빠진 듯 느릿했고, 앞으로 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이 그들을 잡아당기고 있사옵니다. 이런!”
“왜 그래?”
갑자기 강효가 표정을 와락 굳히자, 백유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힘은! 차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사옵니다! 문광과 소인은 괜찮지만, 다른 차사들이...!”
삐익-
순간 문광이 재빨리 허리춤에서 호각을 꺼내 부는 것이 보였다.
그 호각 소리에 맞춰,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각(刻) 17호, 각 21호, 각 26호는!”
차사는 자신의 이름을 시간 속에 새긴다.
그래서 각(刻)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삼 위(位)의 차사들이 오지 않았다.
문광이 분 것은 초혼각(招魂角)이었다.
어떤 차사든, 그 초혼각의 소리를 들으면 와야 되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차사가 셋.
문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주,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사옵니다!”
강효 역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야?”
“저 쪽이옵니다.”
공교롭게도 세 차사는 같은 방향으로 갔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백유현은 지체 없이 바닥을 찼다.
파아앗-
그의 신형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 뒤로 차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
그들은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크르르-”
“크웨에에엑-”
차사는 본질적으로 망자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렇듯, 망자들이 차사들에게 적개심을 대놓고 드러내며 몰려드는 장면은 유사 이래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이 세계의 망자들이라면 그랬겠지.’
시뻘건 혈광으로 물든 두 눈.
그리고 벌린 입에서 풍겨나는 지독한 썩은 내.
거기다가 한국의 망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죄다 중세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다 낡고 해졌지만, 확연히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갑옷이었다.
그 수는 무려 수백.
아니, 안개 저 편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놈들을 감안하면 더 될 지도 몰랐다.
그에 반해 이쪽은 수십.
숫자적으로는 상당한 열세였다.
스릉-
백유현은 막야를 꺼내들었다.
숫자?
그게 뭐가 중요할까?
“가자.”
짤막한 말을 던지고 그는 앞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캬악!”
그런 그를 향해 사방에서 망자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파각-
번쩍-
막야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섬뜩한 광채가 일었고 백유현에게 달려들던 망자들은 몸이 갈라져 소멸되었다.
촤앗!
그리고 강효가 그 뒤를 따르며 차근차근 놈들을 베어나갔다.
월직 차사인 강효는 봐주는 게 없었다.
명부의 법도를 어긴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
때문에 그의 손에 들린 절명은 결코 가볍게 휘둘러지지 않았다.
부웅-
콰앗!
그것은 문광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시퍼렇게 선 언월도를 휘두르며 망자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은 가히 무서울 정도였다.
[썩어 문드러진 자들의 포식자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한참 백유현이 망자들을 베어 넘기고 있을 때, 그의 눈앞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불멸자?’
불멸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문구였다.
그런데 여기서 왜 이런 창이 뜨는 것일까?
그리고 썩어 문드러진 자들의 포식자는 또 누구일까?
사실 불멸자가 관심을 보이면 뭔가 기대감이 들어야 하는데,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름부터가 묘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강효, 차사들의 움직임은?”
강효가 고개를 저었다.
“느껴지지 않사옵니다.”
“이런...벌써 일이 벌어진 건가?”
그 말에 강효가 입을 꾹 다물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 망자들을 보면, 차사 셋이 무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후우...’
백유현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저쪽에서 거대한 힘이 감지되옵니다!”
“음?”
백유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차사들이 들고 있는 망자향들의 연기가 죄다 한쪽으로 급속하게 빨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문광이 이를 으득 갈며 외쳤고, 강효는 재빨리 품속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주역(周易)의 원리대로 제조된 하나의 나경(羅經)이었다.
강효가 그것을 꺼내들자, 나경의 바늘이 미친 듯 돌기 시작했다.
파라라라락-
망자향보다 더욱 강력한 추적 능력을 가진 나경이다.
그런데 그 나경이 아예 방향도 잡지 못하고 미친 듯 돌고 있다니...
“이 놈 봐라...?”
무명(無明)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미루어보아, 놈은 지금 강력한 힘을 얻은 것이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월직 차사인 강효와 문광까지 농락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백유현의 두 눈이 시퍼런 살광을 뿜어냈다.
“모조리 쓸어버릴 수밖에.”
파앗!
콰콰콰쾃!
백유현은 폭풍 날개를 펼치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는 금정산 주변을 바라보더니, 한쪽을 향해 내리꽂혔다.
쐐애애앳!
콰콰쾅!
그가 바닥을 향해 몸을 던지자, 주변이 우르릉- 거리며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렸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곳에 있던 망자들은 온 몸이 박살이 나고, 찢겨져 나가 무수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처참한 광경에 약이 올랐는지, 사방에서 망자들이 백유현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녹슨 칼, 반쯤 부러진 도끼...
그런 무기로 무장한 놈들이 달려오는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그런 놈들을 보며 씩 웃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타탓-
그는 가볍게 땅을 찼다.
그리고...
번쩍-
사방에 검은 광채가 흩뿌려졌다.
촤아앗!
망자들의 몸이 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 한 순간의 일격, 즉 일몰(日沒)로 수많은 망자들이 소멸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놈들의 수는 많았다.
어찌나 이곳 금정산이 그 동안 음지(陰地)로 시간이 흘러왔던지, 오만가지 귀신들이 다 모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백유현을 향해 몰려드는 귀신의 수는 더욱 늘어갔다.
그 때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썩어 문드러진 자들의 포식자가 당신을 보며 웃어 보입니다]
백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웃어?’
썩어 문드러진 자들의 포식자.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젠 숫제 놈이 자신을 보며 웃는단다.
이 상황에서 어떤 불멸자가 웃을 수 있을까?
순간 백유현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순간, 망자들과 싸우고 있는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자.
‘설마, 이 자식...?’
불멸자의 문구가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차사 셋이 사라지고 나서 그 뒤부터 등장했으니까.
차사는 일반 망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힘은 망자에 비해서 더욱 강력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무명(無明)에게 당해 흡수당했다면?
‘네가...무명이냐?’
차사 셋의 행방이 묘연한 것도, 그들에 대한 추적이 지지부진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썩어 문드러진 자들의 포식자가 당신을 보며 깔깔대며 웃습니다]
백유현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놈은 놀고 있었다.
자신을 가지고 놀며, 자신을 찾아보라고 요망을 떨고 있었다.
‘새끼...쇼하고 있네.’
눈앞에 떠오른 문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놈은 향신이든 잡신이든...
어쨌든 불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놈은 불멸자로서 인간에게 계약을 제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 불멸자가 간섭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길까?
놈에게 조종당하는 인간들이 생겨나고, 그 인간들은 절대 좋은 일을 하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무명뿐만 아니라,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망유계의 망자들이 넘어와 그런 짓을 노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균열을 막기 위해 불멸자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가며 인간들과 계약을 했던 것인데, 놈들은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여 대혼란을 야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안 둬...’
백유현은 가만히 사방을 훑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망자들, 행방이 묘연한 무명.
“조셉.”
파아앗-
“오호, 여긴 어딘가요? 아주 무섭고, 끔찍한 곳이군요.”
“힘이 필요해.”
“후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두머리는 상관없어. 어차피 숨었을 테니까. 사라진 차사 세 명. 찾을 수 있지?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조셉은 자신의 의중을 정확하게 짚어낸 백유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후후.”
우두머리, 즉 무명은 이미 불멸자가 된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놈이 숨어 버렸다면 조셉으로도 찾기가 어려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차사 셋은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낸다면, 무명도 어디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백유현이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망자들을 싸늘하게 바라봤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우르르릉-
갑자기 지축이 미친 듯 울리더니 뭐가 저 아래서부터 치달아오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백유현은 눈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콰지직- 콰직-
나무가 박살이 나고 있었고, 바위들이 쪼개지고 있었다.
‘뭐야?’
백유현조차 의아한 얼굴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음머어어어어-”
콰아앙-
한 마리의 거대한 소가 달려오더니, 백유현에게 달려들던 망자들을 모조리 짓밟아 버리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브라만.
바로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