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권능, 혼절
- 큰일이야. K-576 터미널 근처의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야.
그 행동이 마치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 행동하는 좀비와 같다는 얘기가 들어왔어. 지금 언론에는 엠바고가 걸려 있어서, 아직 이 소식이 퍼지진 않고 있는데 엠바고 조치도 얼마 버티질 못할 거야. 이미 SNS를 통해 사건의 전말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니까. 정부에서도 급했는지 긴급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민간인들이 마치 좀비와 같은 집단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터미널 근처에서.
이 경우에는 딱 하나의 원인만 떠올랐다.
‘집단 빙의(憑依)!’
이미 망유계의 망자들이 균열을 타고 넘어온 상태다.
터미널에 갇혀 있는 일반 몬스터들과는 달리, 망자들은 균열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들에게도 빙의를 하기 시작해서 더욱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케이스가 보고되고 있진 않았지만, 만약 놈들이 몬스터에 빙의해서 균열을 넘어온다면?
엄청난 대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백유현은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쇼크가 생겼어요? 아니면 더블 카오스의 징후나...”
백유현은 차분하게 상황을 체크해나갔다.
쇼크나 더블 카오스가 생기지 않는 이상, 망유계의 망자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경우는 이제까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성진의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 아니, 그런 징후는 전혀 없었어. K-576 터미널은 초창기에 생겨난 터미널로, 각성자 레벨 대응 90레벨 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 뒤로 쇼크나 더블 카오스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어. 완벽하게...
이미 백유현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눈치 챘는지, 박성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옛 모습 그대로야.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심각한 얘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균열의 생성 없이 나타난 망유계의 망자들이라니...!
그렇다면 기존의 터미널들도 상당히 위험해졌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놈들은 기존의 터미널을 통해서도 출몰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백유현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야 했다.
“일단 그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주소 찍어 주세요.”
- 그래, 알파 팀도 비밀리에 잠입해 있어. 무전 코드하고 주파수도 보내줄 테니 도착하면 교신 시작하자. 아, 그리고 지금 강원도야? 신호가 강원도로 잡히는데?
일이 급박하다 보니, 국가기관과 같이 움직이는지 백유현의 위치를 바로 파악해낸 박성진이었다.
“네. 일이 있어 강원도에 와 있었어요.”
- 일단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겠어.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볼 테니, 최대한 빨리 와. 경찰이 협조하기로 했으니 교통 통제도 해줄 거야. 정부에 헬기 지원 요청도 해 놨다. 중간에 연락이 닿으면 그걸 타고 오도록 해.
그 말에 박성진의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백유현은 씩 웃었다.
헬기? 교통 통제?
필요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네, 팀장님.”
- 어서 와라. 급하다.
알파 팀이 현장에 도착해 있다는 말에 백유현은 든든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그들이 그리웠던 참이었다.
주소와 무전 코드 등은 바로 전송이 되어 왔다.
전화를 끊은 백유현은 그를 확인하고는 강효와 문광을 보며 말했다.
“서둘러야겠어. 너희들도 어서 와. 이번에는 정말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거든.”
강효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염려 마시옵소서. 부정한 존재를 척살하는 것이야말로 차사의 의무.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이따 만나자.”
“알겠사옵니다.”
강효와 문광이 귀문(鬼門)을 열면서 대답했다.
백유현도 시선을 돌렸다.
한 시가 급했다.
그가 생각한 것이 맞는다면...
지금은 대위기가 벌어진 것이었다.
콰앙-
백유현은 지체 없이 발을 구르더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콰콰콰쾃!
그의 등 뒤에서 폭풍 날개가 미친 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파아앙-
그리고 백유현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표지는 서울 관악구.
시간 여유가 많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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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뭐, 뭐야! 저 사람 미쳤나봐!”
이미 관악구의 한 동네에는 경찰의 접근 금지 라인이 둘러져 있었고, 군부대와 각성자들, 그리고 경찰들이 출동해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여기는 관악구의 한 동네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이 동네에서 벌어진 기현상은 인근 주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인 좀비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습격하여 살을 물어뜯고, 피를 빨아먹는 끔찍한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정부 당국에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주민들의 불만과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무속인들이 대거 상경하여 진혼굿과 퇴마 의식을 치르고 있으나, 소용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징과 꽹과리 소리를 듣고 몰려든 반 좀비 상태의 주민들에 의해 무속인들이 공격당하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어, 정부는 인근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각성자.
신화에만 존재하는 줄로 알았던 수많은 신(神)들이 현실에 나타나고, 그 신들은 특정한 인간들을 골라 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힘을 물려주었다.
그들을 바로 각성자라고 불렀고, 그 각성자들은 이제까지 수많은 기현상들을 해결해냈고 몬스터들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세상을 지켜왔다.
그런데 그들조차 이번 사태는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불멸자와 계약한 각성자들도 도리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망자(亡者)’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으니까.
사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동네 상수원이 정체불명의 독에 오염됐다느니, 며칠 전 수상한 사람을 봤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속인들이야 동네 주민들이 귀신 들렸다고 주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목적이 이 상황을 이용해서 비싼 굿하고, 비싼 부적을 써주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들의 주장도 신빙성을 잃어갔다.
혹자는 영화에서처럼, 정체불멸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의 공작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도 있었다.
이런 대혼란이 일어난 사이, 치우의 알파 팀도 군중 속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워낙 유명하고 잘 알려져서, 그들의 위장법도 상당히 특이했다.
그래서 누구도 그들을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팀인 알파 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 유현이 오래 걸리겠지?
- 당연하죠...유현이 강원도라면서요? 거기서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몇 시간은 걸리지 않겠어요? 정부에 헬기 지원 요청했죠?
- 했는데, 헬기가 움직이는 시간을 감안하면 곧 올 수는 없을 거야. 후, 한시가 급한데 큰 일이네.
이미 엠바고가 풀려 기자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각성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비밀리에 해외의 각성자들과 접촉한다는 얘기까지 떠돌까?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간, 국내의 각성자들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최고의 팀, 치우의 알파 팀과 비밀리에 접속한 국가각성자관리부에서는 면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각성자라는 존재들이 나타난 후 만들어진 국가각성자관리부에는 장관이 새로 임명이 되었고, 이번 사태에서도 장관이 직접 나서서 알파 팀과 미팅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알파 팀의 의견을 존중해, 강원도에 헬기를 급파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지금 정부에서는 백유현 하나에 모든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곳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폴리스 라인이 뒤로 물려져야 할 정도로, 주민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어서 와라!’
박성진은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상대가 몬스터라면 자신이라도 들어가서 박살을 내놓겠지만, 민간인들이다.
그래서 섣불리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 리퍼, 현장에 도착.
그런데 그 때, 갑작스런 무전이 날아들었다.
그 무전에 박성진과 알파 팀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박성진은 황급히 무전을 날렸다.
- 뭐? 현장이라고? 너 얼마 전만 해도 강원도...
- 뭐, 그렇게 됐어요. 아무튼 중요한 건 제가 여기 왔다는 거죠.
“바로 여기에 말입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박성진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백유현이 후드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싱긋 웃고 있었다.
생존 팩에 들어 있는 위장용 후드였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백유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 전체에 가득한 귀기(鬼氣)를.
“심각하군요.”
그가 빽빽하게 운집한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보였다.
이 동네 전체에서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날뛰고 있는 수많은 망자(亡者)들이.
놈들은 박성진의 예측대로 동네 주민들에게 빙의해서 멋대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대로 놔뒀다간 주민들의 기(氣)가 완전히 빨려서 곧 죽게 된다.
하지만 주민들을 베어낼 수도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강효.”
파스스-
그 순간, 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강효가 고개를 숙였다.
“예, 소주.”
그리고 그는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백유현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사방에서 준동하고 있는 망자들의 영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경우의 방도는...”
그의 두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대왕께서 윤허하신다는 조건 하에...하나의 방도가 있사옵니다.”
“방도가 있다?”
다행이다.
방도가 없지 않다고 하니.
“대왕께서 가지고 계신 권능 중, 혼절(昏絶)이라는 권능이 있사온데...그것으로 망자들의 혼을 강제로 끊어낼 수가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이번 또한 대왕께 간청을 드려보시는 것이 어떠하실지요?”
“혼절이라...”
백유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산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망자의 혼만 베어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듯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백유현은 바로 염라에게 권능을 요청했다.
[계약 대상자, 염라에게 권능을 요청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지, 이번에는 염라의 대답이 바로 떠올랐다.
[불멸자, 염라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떤 권능을 원하는가?]
백유현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혼절의 이전을 허(許)한다. 너는 이를 받아, 명부의 법도를 바로 잡는데 쓰도록 하여라]
염라의 윤허가 떨어졌다.
[권능, 혼절의 전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1분.
“1분만 기다려 주세요. 다들.”
알파 팀은 그를 바라보았다.
백유현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