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루드라의 칼바람
카앙-
불꽃이 튄다.
차사들의 검과, 그를 막아서는 망자들의 무기가 충돌한 까닭이다.
파각!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사들이 망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촤앗! 파각!
차사, 강효의 절명이,
콰앙- 콰드득!
차사, 문광의 언월도가,
번쩍-
백유현의 막야가 허공을 매섭게 가르며 망자들을 베어나갔다.
수백의 망자들이 그들을 막아섰음에도, 순식간에 밀려나가는 장면들이 연이어 연출되었다.
구미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백유현을 향해 유혹의 술(術)을 썼지만, 기이한 힘이 술법의 힘을 거칠게 밀어냈다.
마치, 백유현을 거대한 방패막이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 순간에 백유현의 눈앞에는 하나의 창이 떠올라 있었다.
[불멸자 시바의 권능이 발현되었습니다]
[권능 : 시바의 일침]
[권능의 주인 : 시바]
[시바의 일침 : 자고로 사내는 아내를 제외한 다른 여인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평생 한 여인을 사랑하며 아끼는 것이 뭇 사내로서 해야 할 도리. 굳이 두르가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 여자를 평생 지켜줄 줄 아는 사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온화한 죽음의 여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백유현은 그 창을 보며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듯하지만...뭔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듯한데?’
말은 정말 그럴 듯했다.
뭇 성인들이 후세에 전한 이야기에도 많이 나온 얘기니까.
그런데 그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이 시바라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어디선가 베껴 쓴 듯한 저 어색한 문장들이라니...
시바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욱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이 구미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능까지 발현시키다니...
대가를 좋아하는 시바가 왜 그랬을까?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로 권능 창을 바라보던 백유현은 마지막 문구에 가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온화한 죽음의 여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한 줄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백유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불멸자들은 계약 전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마련인데 이건 대놓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온화한’이라는 것은 두르가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죽음의 여신’은 분노한 두르가, 즉 칼리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시바도 남자일 뿐이었다.
두르가라는 여신을 아내로 둔.
아무튼 덕분에 백유현은 구미호의 술법에서 완전히 면역 상태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유혹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차사들은 원래 애욕(愛慾)의 감정이 철저하게 제거된 존재들.
그러니 그들에게는 구미호의 술법이 애초에 통하질 않는다.
파캉-
그런 이유로 싸움은 백유현과 그를 따르는 차사들에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구미호의 가장 강력한 권능 중 하나인 유혹의 술이 통하질 않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미호는 이를 으득 갈며 옆에 있던 망자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그녀의 옆에 있던 망자들은 다른 망자들과는 달리 무척 강해보였다.
“저 놈들의 목을 쳐라!”
이미 구미호의 유혹에 깊게 걸려든 망자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놈들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는 기다란 자루가 달린 낫을 들고, 또 하나는 거대한 참수도를 든 차사들.
“어딜 가려는 거냐? 망자(亡者)가 있어야 할 곳은 단 한 곳...”
나철의 눈이 번뜩였다.
“지옥의 불꽃 속뿐이거늘.”
나겸이 말을 받았다.
“자, 시작해볼까!”
촤라랏-
나겸의 손에 들린 낫이 묘하게 춤을 추었다.
그것은 도망치는 망자들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내는 죽음의 낫.
망유계의 망자들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앗-
나철과 나겸은 번개처럼 움직여 망자들을 덮쳤다.
이 임무는 백유현의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 역시 염라에게 직접 명을 받고 달려온 몸.
지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구미호를 수호하던 망자들이 나철과 나겸에게 가로막히자, 구미호는 이를 갈며 외쳤다.
“이 놈들이 죄다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다들 돌아와 나를 도와라!”
그녀의 목소리는 쩌렁- 하고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 홀린 모든 망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균열 곳곳으로 흩어진 망자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모여들자, 구미호는 재빨리 몸을 날려 도망치려 했다.
백유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폭풍 날개를 활짝 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아아앗-
콰앙-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구미호의 앞을 막아서며 차갑게 내뱉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네가 갈 곳은 없어, 구미호. 내가 있는 한.”
“이런 건방진 녀석!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냐!”
구미호가 앙칼지게 외쳤다.
스릉-
하지만 백유현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면서 막야를 들어올렸다.
“끝이다.”
파각-
백유현이 땅을 박차고 정확하게 그녀의 목을 겨눈 채로 내달렸다.
번쩍-
그리고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카앙-
그런데 그 때, 허공에 그려지던 섬광이 중간에 갑자기 뚝 끊기며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렸다. 백유현은 눈살을 와락 구겼다.
사휘가 막히다니!
그는 몸을 천천히 돌려 자신의 검을 막아선 존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에, 비쩍 마른 체구...
두 눈에서 뿜어지는 시뻘건 혈광.
그리고 손에 들린 하나의 거대한 칼.
[분류 명칭 : 무명(無名)의 망자]
[예상 레벨 : Lv 138, 구미호의 술법으로 강화 중]
[특징 : 균열을 통해 나타난 망유계의 망자. 하지만 다른 망자들을 다스릴 수 있는 군장(軍將)의 권능을 가졌으며, 본신의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다. 요괴, 요(妖)를 위해서라면 소멸을 각오할 정도로 유혹의 술(術)에 깊이 빠져 있다]
[생전에 상당한 실력을 가진 무인으로 추정된다.]
[불멸자 염라의 임무의 대상자]
[불멸자 시바의 명령의 대상자]
조셉의 스포일러를 통해 드러난 그의 정체.
하지만 놈의 이름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놈이 뛰어나다는 것은 불멸자 염라와 시바가 동시에 놈을 지목하여 임무와 명령을 내렸다는 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백유현의 사휘를 막아낸 순간만 떠올려 봐도 놈은 절대 백유현의 아래가 아니었다.
순간 사방에서 구미호에게 조종당한 수많은 망자들이 몰려들었다.
구미호와 망자의 우두머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빼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백유현이 싸늘하게 눈빛을 발한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내게 맡기고 가거라.”
척준경.
바로 그였다.
그가 들고 있는 두 자루의 검에는 시퍼런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검림옥의 패자(覇者)답게 균열 바깥쪽의 망자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엄청나게 강한 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말하고 있었다.
뒤는 맡아줄 테니 가라고.
그 말에 백유현은 더 할 수 없는 든든함을 느꼈다.
그것이 사방에서 수백의 망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백유현이 주저 없이 등을 돌릴 수 있는 이유였다.
“강효, 문광! 가자!”
두 차사가 백유현의 뒤를 따랐다.
파스스-
구미호와 망자의 우두머리는 이미 사라졌지만, 망자향과 조셉의 화살표가 놈들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놈들을 찾아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앗-
백유현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강효와 문광은 귀문(鬼門)의 틈으로 모습을 감췄다.
콰아앙-
그리고 백유현은 다시 한 번 땅위로 착지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구미호와 망자의 우두머리가 서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을 찾아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내가 말했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고.”
구미호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고, 망자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를 보며 백유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두 번은 없어. 넌, 반드시 죽는다.”
콰콰콰쾃!
그와 동시에 백유현이 들고 있는 막야를 휘감으며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루드라의 칼바람.
시바의 또 다른 이름, 폭풍의 신 루드라의 권능이 깃든 칼바람이었다.
[루드라의 칼바람이 발동되었습니다]
[공격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강효, 문광. 구미호를 막아. 죽여도 좋아.”
“명을 받잡나이다.”
차사, 강효가 망자의 우두머리를 앞세우고 도망가려던 구미호를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몸을 날려 앞을 막아섰다.
앞에는 강효가, 뒤에는 문광이.
구미호는 이를 으득 갈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믿을 것은 망자의 우두머리 뿐.
그의 칼이 백유현을 베어내고, 강효와 문광을 두 동강으로 갈라버리길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요망한 것! 네 년의 목숨을 거두어 명부의 법도가 지엄함을 알릴 것이다!”
“미친! 네 놈들 같은 잡것들에게 죽을 내가 아니다!”
강효와 구미호, 구미호와 문광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백유현과 우두머리의 싸움도 시작되었다.
먼저 치고 나간 것은 백유현이었다.
번쩍-
사휘가 번뜩였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이미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이번에는 막아낼 수 없음을 직감한 듯했다.
그런데 순간, 백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철컹-
막야를 거둬들이며, 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방금의 공격은 놈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을 뿐, 진짜는 지금이었다.
콰쾃!
번쩍!
백유현의 발이 깊숙하게 바닥을 파고들더니,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그 앞에는 망자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그는 공격을 피했다 생각하고는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앞으로 파고드는 백유현을 보며 놈은 두 눈을 부릅떴다.
놈이 어떻게 반응할 수이도 없이 막야의 예리한 칼날이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조셉의 스포일러.
놈이 피할 방향을 정확하게 보고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촤앗-
망자의 우두머리의 가슴팍이 쪼개지며 시퍼런 피가 솟구쳤다.
그의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어어어!”
놈은 크게 비틀거리더니,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을 뿜어내며 백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뒤.
그 후에 이어진 놈의 공격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사휘(死輝)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적의 치명적인 급소를 끊어 놓고, 순식간에 침몰시킨다.
그래서 설령 적이 반격할 기회를 잡더라도, 그 힘은 이미 소멸된 후.
이것이 고려의 무신(武神), 척준경의 검이었다.
번쩍-
달려들던 우두머리를 향해 또 한 번의 검광이 번뜩였다.
휘청-
가슴팍의 상처가 더욱 벌어지며 우두머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커윽...”
생전의 뛰어난 실력도, 균열로 강화된 힘도...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루드라의 칼바람으로 강화된 막야는 그야말로 재앙(災殃).
막아설 수도, 피해낼 수도 없다.
쿠웅-
우두머리가 허망한 눈빛을 뿌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철컹-
그가 들고 있던 거대한 칼이 땅에 떨어졌다.
그 앞으로 백유현이 다가섰다.
그리고 놈을 내려 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잘 가라.”
촤앗!
우두머리의 목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파스스-
그리고 놈의 영체가 사라져갔다.
백유현은 시선을 돌렸다.
차사, 강효와 문광이 구미호와 싸우고 있는 그 곳.
파앗-
백유현이 허공을 격해 내달렸다.
키이이잉-
그의 손에 들린 막야가 나직하게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번쩍-
태양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