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신뢰
망자향의 연기는 사방으로 퍼졌다.
차사들은 그 흔적을 좇았고, 백유현은 강효와 문광과 함께 움직였다.
쏴아아아-
비가 더욱 거세게 내려, 주변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척-
하지만 백유현은 이미 그가 목표했던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요괴, 요(妖)는 균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자만심에 빠져 숨어 있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딱 한 군데만 그 비가 미치지 않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수백 마리에 달하는 망자들이 오체투지(五體投止)자세로 엎드려 있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일산(日傘) 아래 호화로운 침상에 누워 있는 한 명의 미녀가 있었다.
미녀의 옆에는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인 사내들 몇이 그녀를 시중들고 있었고, 미녀는 이곳의 여왕처럼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요괴, 요.
즉 구미호다.
“소주.”
백유현이 어둠 속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강효와 문광이 나타났다.
백유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망자향은?”
강효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곳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소인의 망자향은 보다 강력한 존재를 추적하는데 쓰이는 바, 아마 저 곳에 놈들의 우두머리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구미호도 저기에 있어.”
“예, 소주. 허나, 그녀는 이미 여우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아마 암천계(暗天界)의 균열의 힘이 그녀를 그렇게 강화시킨 것이겠지요.”
“그러니 여우 냄새가 사라진 것이고.”
“맞사옵니다. 소주. 요망한 요괴가 강력한 힘을 얻어 향신(鄕神)이 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마치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 것처럼, 그녀 역시 환골탈태했을 것이라 판단되옵니다.”
백유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난처하네.”
지금 눈앞에 있는 수백의 망자들도 상당한 걸림돌이었다.
거기다가 환골탈태한 구미호에, 또 망자의 우두머리까지.
하지만 백유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이런 상황에서 써먹으라고 염라가 친히 차사들을 보내주지 않았던가?
“추살 차사는 들어라.”
심언(心言)은 차사가 어디에 있든지 전달이 된다.
이미 추살 차사 나철과 나겸은 백유현에게 일시 종속이 되어 있는 상태.
- 하명하시옵소서.
역시 그들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좀 와줘야겠다.”
오래지 않아 바로 대답이 전해졌다.
- 존명.
소주의 명이다.
차사들이 그 명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다.
이걸로 일단 일반 망자들은 해결됐다.
그리고 그 때, 다른 일반 망자들을 추적하러 갔던 이십 위(位)의 수호 차사들이 돌아왔다.
그들 역시 추살 차사나 수행 차사들에 비해서는 약했지만, 그래도 강력한 힘을 지닌 차사들이다.
도움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유현의 눈앞에 뭔가 일렁이며 한 영체(靈體)가 나타났다.
백유현은 미간을 좁혔다.
“장군!”
그는 바로 척준경이었던 것이었다.
그 동안 잠잠했던 그가 왜 갑자기 빙의를 풀고 나온 것일까?
“무인은 늘 전장을 갈구하며, 싸움을 꿈꾸는 법. 이제까지는 너의 처지를 보아 가만히 있었으나, 나의 두 칼이 필요하다면 말하라. 저 버러지들에게 검림마인(劍林魔人)의 무서움을 가르쳐 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몸이 근질거려서 나왔다는 뜻이다.
사실 적들 또한 망자.
즉, 척준경과 똑같은 영체다.
그럼 척준경이 도움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림옥에서도 수많은 적을 베어 넘긴 그의 쌍검이라면, 저 망자들 정도는 능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백유현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장군이 있었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척준경의 진짜 힘을 보지 못했었는데, 이제 곧 그 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탁드립니다. 장군.”
척준경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의 두 눈은 이미 눈앞의 수많은 망자들에게 가 있었다.
“오랜 만에 피를 좀 보겠구나. 후손은 염려 말고 할 일을 하여라. 너의 적은 곧 나의 적. 믿고 나아가라.”
“감사합니다. 장군.”
척준경의 손에는 이미 쌍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척준경을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라 불리게 했던 무기.
그 척준경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불과 수십 기의 병력으로 그 수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무너뜨린 맹장, 척준경.
이제 그 때와 똑같은 상황에서, 그는 다시 나서려 하고 있었다.
“소주를 뵙습니다!”
이십 위의 호위 차사들도 나타나 일제히 부복했고, 두 명의 추살 차사들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 허공이 일렁이더니 또 하나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 잊으시면 안 되지요. 유현 군.”
조셉.
바로 그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안색이 좋아 보였다.
“후우, 추적자 놈들을 좀 따돌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뭐, 그래도 제 때 도착한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무사했구나!”
백유현의 말에 조셉이 씩 웃었다.
“자, 유현 군이 뭘 원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 그럼...시작해볼까요?”
조셉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조셉의 마법을 말입니다. 후후.”
파앗-
순간, 허공에 화살표가 각인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붉은 색, 하나는 푸른 색.
“원하시는 목표에 징표를 찍어두었습니다. 시공간을 넘어선 징표이니, 절대 피할 수가 없지요.”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까지 나타났으니 이젠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그의 말에 모두가 태세를 갖추었다.
“목적은 단 하나.”
백유현의 두 눈이 번뜩였다.
“모든 적의 섬멸. 뒤를 부탁합니다. 장군.”
“가거라.”
파앗-
백유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파가가가각!
그의 몸이 허공 높이 치솟았다.
그 뒤를 따라 수행 차사 강효와 문광, 그리고 추살 차사들이 따랐다.
그리고...
펄럭-
파파파팟!
수호 차사들이 망자들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척준경이 있었다.
고오오오-
콰아앙-
척준경이 산을 쪼갤 듯한 힘을 담아 두 칼을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열이 넘는 망자들이 그 기세에 휘말려 소멸되었다.
오랜 만에 피를 본 척준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너라.”
척준경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모조리 베어주마.”
그런 그를 향해 수많은 망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미친 듯 몰려들었다.
그 순간, 척준경의 뒤에서도 검은 그림자들이 쇄도했다.
콰아앙!
그리고 또 한 번의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척준경.
그의 검이 사나운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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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아앗-
번쩍!
카앙-
일반 망자들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른 백유현은 그대로 낙하하며 구미호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구미호를 노린 검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공격은 구미호 옆에 서 있던 한 망자에 의해 막혔다.
손이 저릿해질 정도의 충격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놈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백유현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조셉이 각인시켜 놓은 두 개의 화살표 중 하나는 구미호에게, 다른 또 하나는 바로 그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우두머리...’
비쩍 마른 체구에 키가 상당히 컸고, 검은 안개로 몸을 휘감은 사내가 시뻘건 혈광을 내뿜는 두 눈만을 내놓은 채 백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호, 먹잇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그 때 구미호가 뇌쇄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상당한 미모에, 몸매 또한 아찔할 정도의 미녀.
그 중에서도 보석을 빼다 박아 넣은 듯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두 눈동자는 정말이지 보는 이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구미호에 대한 전설들의 결말이 하나 같이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에게 홀려 죽었다- 라고 끝나는 것이던가?
백유현은 그녀의 두 눈을 노려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빛은 뇌쇄적이었고, 치명적으로 유혹적이었으며, 매력적이었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너의 목을 베러 왔다. 구미호.”
그 말에 구미호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호호호!”
한참을 웃던 그녀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그런 말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하는 게 어떨까?”
순간, 백유현은 뒤에서 뭔가 날카로운 기세가 찔러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막야를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카앙-
공격은 매우 날카로웠지만, 백유현은 어렵지 않게 그 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격을 막아낸 백유현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검을 내지른 그 자는...
“강효!”
눈이 붉게 물든 강효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가드는 두 개의 그림자.
추살 차사들이 섬뜩한 표정을 지은 채 백유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클클...네 놈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잘되었다.”
“네 놈의 목을 잘라 피를 마시고, 살점을 포를 떠 씹어 먹어주마!”
누가 나찰의 권속이 아니랄까봐, 백유현을 향해 입맛을 다시는 둘이었다.
백유현은 그들을 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놈들은 구미호에게 홀린 것이었다.
“호호호! 보아하니, 저 두 놈과는 별반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하구나. 그렇다면...”
스윽-
구미호의 손가락이 차사, 강효를 향했다.
문광은 저 멀리서 허리를 꺾은 채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구미호의 정신 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듯했다.
“네 놈의 주인을 네 손으로 직접 죽여라. 차사...”
구미호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이 상황이 퍽이나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강효.”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차사 강효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을 받잡나이다. 주공(主公).”
백유현이 그를 보며 눈살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든 강효의 손에 들린 절명이 시퍼런 광채를 번뜩이며 쇄도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카앙-
강효의 검을 막아낸 백유현이었다.
하지만 강효의 검은 더욱 치열하고 날카롭게 그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카앙- 카카캉-
일단 방어만 하고 있는 백유현이었다.
심언(心言)을 통해 강효의 정신을 되돌리려 해보았지만 헛일이었다.
그의 정신은 완벽하게 구미호에게 지배를 당한 듯, 도무지 통제가 안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절명은 날카롭게 허공을 파고들며 백유현을 몰아쳤다.
카앙-
그리고 한 순간, 방어만 하던 백유현이 갑자기 강효의 검을 크게 쳐냈다.
키이이잉-
막야가 나직하게 귀신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 때 백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뭔가...잘 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백유현의 눈은 강효가 아닌, 구미호를 향해 있었다.
구미호가 눈살을 찌푸렸고, 백유현이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아는 강효는.”
순간 백유현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날카로우며, 더욱 살 떨리는 검(劍)을 가졌단 말이다!”
번쩍-
그 순간 백유현이 막야를 한 차례 크게 내리그었다.
사휘(死輝).
그 검은 광채가 향한 곳은 바로...
파스스-
그의 눈앞에서 강효가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허공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그에 아랑곳없이 구미호 쪽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 장난의 대가는 확실히 받아가겠어. 강효를 내 손으로 벤 것은...아무리 환각이라 하더라도 기분이 무척 더럽거든.”
“소주! 괜찮사옵니까?”
그리고 그 앞에 두 명의 차사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서 있었다.
차사, 강효.
그리고 차사, 문광.
언제고 그의 뒤를, 그리고 옆을 지켜줄 수행 차사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행 차사뿐만 아니라, 추살 차사들 또한.
백유현은 순간, 구미호의 환술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백유현은 그들을 보며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그건 그거고.”
백유현이 구미호를 바라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저 요망한 것을 가만 놔두면 안되겠지? 그러니..."
그 말에 수행 차사와 추살 차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모조리 쓸어버려!"
“존명(尊命)!”
펄럭-
그리고 그들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