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추살 차사
균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과 함께, 절로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살기가 느껴졌다.
백유현은 안력을 돋우어 정면을 응시했다.
보였다.
균열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망자들을.
놈들은 군대(軍隊)였다.
지금까지의 망자와는 전혀 달리, 제대로 된 철갑을 입고 있었고 단단한 검으로 무장한 자들이 가히 수백.
그리고 백유현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놈들의 모습을 보고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여우불!’
놈들의 몸 주변에는 붉은 불꽃들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천천히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구미호의 여우불이라고 불리는 불꽃이었다.
구미호에게 정신을 빼앗긴 존재들에게서만 보인다는 특이한 현상.
즉, 이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역시 요괴, 요(妖), 즉 구미호가 확실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구미호와 그들의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균열 속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했을 뿐이었다.
제대로 무장한 망자의 군대는 균열의 입구를 틀어막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균열 안에 매우 중요한 존재나 물건이 있다는 듯.
이것 또한 새로운 광경이었다.
사실 카오스 터미널, 즉 균열은 처음 생성되었을 때 말고는 몬스터들이 그 안에 갇혀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
이쪽 각성자들은 균열의 차원문을 왕래할 수 있었지만, 균열을 통해 이쪽으로 난입한 몬스터들은 그게 불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미호와 망자들의 우두머리가 만약 균열 안에 있다면, 제 발로 들어갔다는 얘긴데 그것은 다시 나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구미호와 같이 영악한 존재가, 멍청하게 빠져 나오지도 못할 함정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놈들이 균열의 차원문을 왕래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강효, 문광.”
백유현의 나직한 심언(心言)에 강효와 문광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명하시옵소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일단 저 놈들을 치워야겠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차사, 문광. 제가 놈들을 유인하여 막아보겠사옵니다.”
“아니...너무 위험해. 아까 놈들과는 완전히 다른 놈들이야. 까딱 잘못하다간 문광, 너 죽을 수도 있어.”
그건 맞는 말이었다.
철갑을 단단히 갖춰 입고, 시퍼런 날이 서 있는 검을 들고 있는 망자들이다.
게다가 몸들이 다들 꽤 다부져 보이는 것이,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생전에 수도 없는 전장에서 생사의 결전을 벌인 듯한 노련함이 엿보였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놈들을 문광 혼자서 대적할 수는 없다.
강효와 자신이 아무리 빠르게 놈들을 정리한다고 해도, 최소 120 레벨은 넘어 보이는 놈들을 일거에 정리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백유현이 강해졌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럴 때 조셉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지만, 블러드스톤을 들고 사라진 조셉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권능인 스포일러, 미래를 쓰는 자가 있었으면 크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어쩔 수 없나?’
수행 차사 둘은 절대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호령(號令).’
수호 차사들을 불러들여 놈들을 미끼로 삼는 수밖에.
마음을 정한 백유현은 바로 염라의 권능, ‘호령(號令)’을 발동시켰다.
“‘대왕의 이름으로 부르노니...”
백유현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 시커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차사(差使)들은 명을 받들라!”
“소주를 뵙습니다!”
그의 호령에 차사들이 일제히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의 앞에 부복했다.
총 이십 위(位)의 차사.
백유현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강효와 문광은 매우 굳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유현이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불러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백유현이 차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
스릉-
그는 정면에서 엄청난 살기의 덩어리 둘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막야를 빼들었다.
살기에 뒤섞인 기묘한 광기는 정말이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불쾌한 것이었다.
펄럭-
스스스스-
강효와 문광이 백유현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십 위의 차사들도 검을 빼들고 움직여 백유현을 에워쌌다.
그런데 절명을 들고 있던 강효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들은...?”
그리고 그들 앞에 두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풀을 베는 커다란 낫을 지닌 자, 그리고 또 하나는 커다란 참수도(斬首刀)를 들고 있는 자.
차사와 비슷한 복색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두 눈에서는 시뻘건 혈광이 뿜어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마주한 수호 차사들은 물론, 강효와 문광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추살(追殺) 차사...그대들이 여긴 무슨 일이오?”
문광의 말에 두 차사가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대왕께서 하명하시면 어디든 가는 존재. 여기에 나타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
그 중 하나가 저 멀리 시선을 던지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곳에는 균열(龜裂)이 있었다.
“명부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죄인들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더욱 더.”
그리고 또 다른 차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백유현을 향해 예를 갖춰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옵소서. 소인은 추살 차사 나겸(羅鎌)이라 하옵니다.”
“소인 역시 추살 차사, 나철(羅撤)이라 하옵니다. 소주.”
그들은 백유현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지만, 그 예를 받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그러니까 백유현을 소주라고는 부르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느낌?
그런데 그 때, 낫을 무기로 쓰는 나겸이 앞으로 나섰다.
“대왕께서 하명하신 바가 있어, 저희 역시 이 일에 관여해야 할 것 같사온데, 윤허하여 주시겠사옵니까?”
말투는 공손했고, 존칭을 쓰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이 일에 무조건 관여해야 겠다- 라는 의지를 통보하는 말이었다.
백유현이 그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관여하려 하지?”
나겸이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더니 수행 차사 강효와 문광, 그리고 이십 위의 수호 차사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범을 잡을 때는 범을 잡는 칼을 써야하는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산군(山君)을 잡는데 닭을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는 일. 지금부터는 소인들이 소주를 모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강효와 문광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한 반박은 할 수가 없었다.
나겸과 나철은 나찰(羅刹)급의 존재들이자 나찰의 권속들이기도 했다.
즉, 무력이건 성정이건 나찰과 매우 흡사하며 상당히 괴팍했지만 또 그만큼 강력한 존재들이라는 뜻.
이들이라면 사실 자신들보다 백유현을 더욱 확실하게 보필할 것이다.
무력으로는 추살 차사에 비해 자신들이 밀리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 때 백유현이 싱긋 웃었다.
“아, 그렇군. 그러니까...너희들도 내 부하라 이거지?”
부하라는 말에 나겸과 나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그들은 표정을 풀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주(小主), 즉 작은 주인이라는 말뜻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은 맞았으니까.
아무리 그들이 마음속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명을 내리시옵소서. 소주.”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명을 내리지.”
그는 둘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추살 차사, 너희들은 가서...”
백유현은 손가락을 뻗어 균열 앞을 가리켰다.
“저 놈들을 좀 치워놓도록.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명색이 나찰의 권속들이니.”
그 말에 나철과 나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때 백유현이 뭔가 잊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내 수행 차사는 강효와 문광, 둘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 자리는 너희들이 감히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 또한.”
나철과 나겸의 표정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백유현은 강효와 문광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효, 문광. 움직이자. 장애물은 곧 치워질 테니, 우리는 빠르게 균열로 치고 들어갈 거다. 준비해."
강효는 쓰게 웃었고, 문광은 나철과 나겸을 흘끗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주의 명을 받잡나이다.”
백유현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 서 있는 나철과 나겸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서 움직여. 시간 없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존...명.”
펄럭-
그리고 둘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에는 썩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았지만, 백유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강효와 문광이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소주...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셨사옵니다.”
강효의 말에 백유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효.”
“하명하시옵소서, 소주.”
“미안하다. 이렇게밖에 못 해줘서.”
“소주...”
백유현이 씩 웃었다.
“가자, 늦겠어.”
백유현이 서둘러 움직였다.
강효와 문광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챙겨들고 그 뒤를 따라야 했다.
그리고 백유현을 호위하며 이십 위의 호위 차사들도 빠르게 내달렸다.
카앙-
저 멀리서 이미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나철과 나겸은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했는지,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망유계의 망자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역시 실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120 레벨 대의 망자들을 저렇게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다니...
파아앗-
백유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균열을 향해 내달렸다.
파각!
그 도중에 마주친 망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균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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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앗-
나철과 나겸이 망자들을 도륙내고 있는 사이, 그 틈을 타서 내달린 백유현과 차사들은 균열 안으로 빨려들 듯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들 눈앞에는 거대한 균열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시커먼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배경...
“냄새가 사라졌사옵니다. 소주.”
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여우의 냄새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강효였다.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넓은 균열이었지만, 놈들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차사들한테 망자향(亡者香)이라는 거 있지?”
“예, 소인들도 가지고 있사옵니다.”
“향을 피워. 그거면 우두머리 놈을 추적할 수 있지 않겠어? 놈도 일단 망자니까.”
강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망자향은 이름대로 향(香)으로 추적한다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로 망자를 추적하니까.
화르륵-
차사들은 망자향을 피웠고, 그 연기는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아직도 이 안에 망자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차사들은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강효, 문광은 나를 따라와.”
“존명.”
조셉이 나타나지 않는 지금,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다.
파앗-
펄럭-
그리고 백유현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콰콰콰쾃!
쏟아지는 빗줄기를 거칠게 밀어내며 펄럭이는 폭풍 날개.
그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구미호와 망자의 우두머리를 찾을 생각이었다.
분명 놈들은 어딘가에 있다.
주변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숨어 있지도 않겠지.
백유현은 바로 그 방심을 찌를 생각이었다.
쐐애애앳-
그는 순식간에 허공 저 너머로 사라졌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