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더 리퍼
철컹-
노리쇠가 움직였다.
콰콰콰쾅!
라이플, 즉 천무현이 눈을 갖다 대고 있는 조준경 저 너머로 맹렬한 폭발이 이는 것이 보였다. 수도 없는 몬스터들이 그 폭발에 휩쓸려 사라져 갔다.
천무현은 이제 박성진의 공격 지시가 내려오면 바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조준경을 바라보던 그의 눈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
그의 시선은 자신이 쏘아 죽인 몬스터들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시선이 향한 곳은 그것보다는 좀 더 뒤, 즉 소드 맨(Sword man)들이 활약 중인 뒤쪽이었다.
그곳에서는 엄청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콰콰쾃!
파가가각!
한쪽에서는 미친 듯 몰아치는 검은 폭풍이, 또 한쪽에서는 시뻘건 뇌전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재앙(災殃)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장관이었고, 누가 봐도 엄청난 전율이 일 정도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천무현이 눈살을 찌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건...!’
그는 조준경으로 그 광경을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폭풍은 백유현이었고, 뇌전은 김현성이었다.
둘은 마치 내기라도 하는 듯, 무자비하게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는데, 여기서 천무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던 것이었다.
‘현성이 형이...밀리고 있어?’
김현성.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라 불리는 그가 오히려 백유현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유현이 일으키는 검은 폭풍은 갈수록 더욱 거세지고 있어서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천무현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설마.’
상대는 아무리 대단한 이슈를 몰고 다니는 신성이라고 하지만, 김현성은 부동(不動)의 국내 제 1위의 근접 딜러다.
이제까진 누구도 그 자리에 범접할 수 없었고, 또한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천무현은 바로 생각을 고쳤다.
‘에이, 현성이 형 너무 살살하네.’
그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성은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제야 갓 두각을 드러낸 백유현을 상대로 전력을 다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천무현은 다이렉트 콜(Direct call)로 김현성에게 바로 무전을 넣었다. 다이렉트 콜로 전해지는 무전은 다른 팀원들은 모르게 김현성에게만 바로 전해졌다.
- 형, 너무 살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유현이한테 지겠다. 크크!
농담을 섞은 그의 목소리에 김현성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나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에 천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전에 귀를 기울였다.
- 전력을 다하고 있는 거다. 천무현.
천무현의 표정이 와락 굳어졌다.
김현성.
그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저 멀리 시선을 두었다.
폭풍과 뇌전.
두 힘은 더욱 강력하게 서로를 향해 밀어닥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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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설마 현성이 형이 밀리고 있는 겁니까?”
주세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는 이미 상당히 포지션을 뒤로 당겨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라이플, 천무현의 지원 사격이 아주 제대로 박혀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뒤에서 몬스터들을 베어내고 있는 두 소드 맨들의 활약이 엄청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둘은 갈수록 무시무시한 실력을 뽐내고 있었고, 덕분에 최종 저지선까지 오는 몬스터들의 수가 확 줄어들었다.
그래서 서브 탱커인 그가 박성진 일행과 합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으음...!”
그 말에 박성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수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딱 봐도 그래 보이잖아. 현성씨가 너무 봐주는 거 아니야?”
그런데 박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안 보여? 저 뇌전...현성이의 레벨 5의 일렉트릭 드라이브가 발동했다는 증거다.”
주세광이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레벨 5? 그거, 현성이 형이 웬만해서는 안 쓰는...”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 5의 일렉트릭 드라이브는 김현성과 오랜 시간을 같이 한 그조차도 많이 보지 못했던 기술이다.
저번 팀-엑스 대회에서나 몇 번 나왔을까, 그걸 쓴다는 것은 김현성도 최대의 힘을 끌어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 그걸 꺼내들 정도의 괴물이 등장했다는 뜻이지. 아니, 그걸 쓰고서도 지금 현성이가 밀리고 있다는 뜻이야. 일대 일의 싸움에서는 아직 모르지만, 일대 다의 싸움에서 현성이가 밀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주세광과 김수향이 미간을 좁힌 채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부동의 1위였던 천재, 김현성의 자리를 위협할 존재가 등장했다는.
그들의 놀라움이 가득한 시선은 전장 저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휩쓸며 죽음을 선사하는 검은 폭풍과, 쉴 새 없이 내리 꽂히는 시뻘건 뇌전이 번뜩이는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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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각!
번쩍-
검은 폭풍우가 몰아친다.
쉴 새 없이 사납게 내리치는 빗방울 마냥, 하늘에서는 날카로운 검(劍)의 비가 쏟아져 내려 몬스터들의 가죽을 찢고, 근육을 잘라냈다.
촤앗-
몬스터들은 죽어가면서도 발악을 해댔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절명(絶命)이라 이름 붙은 검에 의해 끝이 난다.
한 소년과 그 뒤를 따르는 한 차사.
그들이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폭풍은 그야말로 대재앙과 같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싸움은 백유현에게 있어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무간 지옥에서는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혼자, 최대한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권능, 염라의 ‘단죄’가 발동되었습니다]
[공격력이 20 퍼센트, 공속이 15퍼센트 증가하며, 절삭력(切削力)이 50 퍼센트 증가합니다. 염라의 격노(激怒) 효과로 반경 20미터 안의 모든 적대 대상의 체력이 30 퍼센트가 깎입니다]
[권능, 염라의 ‘압도’가 발동되었습니다]
[공격 성공 시, 피해를 더 입힙니다. 대상 적은 ‘부패(腐敗)’가 시작되어 240초간 받는 대미지가 늘어납니다. 부패는 전염되어 반경 20미터의 적들에게 시독(屍毒)으로 인한 피해를 입힙니다. 압도의 등급이 오르면 지속 시간과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동시에 주변 반경 30미터의 일반 등급의 몬스터들은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보스 급 제외]
염라의 권능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백유현의 주변에 있던 모든 몬스터들이 대혼란에 빠지고 역병이 전염되어 가죽이 썩어가고, 피부가 괴사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크에엑!”
퍼퍼퍼펑-
거기다 더해, 염라의 격노 효과로 몸뚱이가 터져나가는 몬스터들이 속출, 백유현의 주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번쩍-
그런 놈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검은 광채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단죄가 발동하면, 반드시 터져 나오는 수십 가닥의 검은 광채.
바로 ‘일몰(日沒)’ 이었다.
촤라라랏!
콰당탕!
일몰의 검은 광채는 그 하나, 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모든 것을 쪼갰고 갈라 버렸다.
폭풍은 그래서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백유현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의(殺意)에, 몬스터들이 죽어가면서 내뿜는 원독(怨毒)이 합쳐진 지독한 칼바람.
그래서 멀리서 볼 때는 마치 검은 회오리가 휘몰아치는 폭풍우로 보였을 것이다.
촤앗! 촷!
강효 역시 절명을 사납게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베어나갔다.
월직차사의 흉포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그의 검놀림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김현성...!’
저 멀리 시뻘건 뇌전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김현성과 거리가 크게 좁혀진 것이었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모른다.
서로가 합의한 적은 없으되, 자연스레 벌어진 이 싸움.
거대한 몬스터들의 에워쌈 속에서 누가 이기는지, 누가 지는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제 김현성을 만나게 되니 그 싸움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
‘한 놈이라도 더!’
김현성이 보이자, 백유현은 오히려 더욱 승부욕이 솟구쳤다.
김현성이 비록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이지만, 왠지 그와 제대로 승부를 겨뤄보고 싶은 욕심이 난 것이었다.
질 때는 지더라도, 시원하게 싸워보고 지고 싶었다.
“강효, 가자!”
“존명!”
파가가각!
그들은 다시 한 번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숨이 턱에 차고, 검을 쥔 손이 떨려왔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적을 베고, 또 베는 이 행위에 희열만을 느낄 뿐.
번쩍-
검은 광채가 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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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각하여, 저지선을 구축한다. 반복한다, 퇴각하여 저지선을 구축하라.
상황이 좋지 않아 퇴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섬멸했기에 다시 한 번 재정비하기 위한 퇴각이었다.
그리고 나눌 말도 있었다.
“수고했어.”
모든 팀원이 돌아오자, 박성진은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사실 두 소드 맨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은 애초부터 같이 모여 있었지만.
그 팀원들은 백유현과 김현성을 번갈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 고생했다.”
박성진이 두 사람을 치하했다.
사실 이번 싸움이 쉽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후방에서 적극적으로 몬스터들을 베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냥 열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승부욕.
두 사람 사이에 정말이지 치열한 승부욕이 발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
그리고 승부가 났다.
이미 백유현과 김현성은 모든 전장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 와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백유현,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
툭-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백유현의 어깨에 김현성이 손을 얹었다.
“힘들었다. 백유현.”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숨이 막힐 정도로, 온 몸이 부서져 나갈 정도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으니까.
무간 지옥에서 단련된 그였지만, 이번 싸움은 그조차도 피로함을 느낄 정도로 치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그리고 그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승부가 났다.
그것도 너무도 정확하게.
목표의 왼쪽에서 파고든 것이 백유현, 목표의 오른쪽에서 파고든 것이 김현성.
하지만 왼쪽에서 죽어나간 몬스터들이 좀 더 많았다.
가운데서 좀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백유현이 베어낸 몬스터들의 띠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 참...현성이가 고전할 정도의 괴물이 나타날 줄이야.”
박성진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번 대회 정말 기대가 되는데? 안 그래?”
김수향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우, 저는 현성이 형이 봐주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겠네요.”
천무현과 주세광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찬이세요. 사실은 저는 혼자 싸운 게 아니라서...김현성 선배님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혼자 싸운 게 아니라니?”
백유현이 멋쩍게 웃으며 차사, 강효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효는 백유현이 자신을 가리키자 움찔 몸을 떨며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안 보이시겠지만, 염라께서 저에게 차사를 붙여 주셨거든요. 몬스터들에게는 공격이 가능한 지라...좀 도움을 받았지요.”
그런데 박성진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이런! 백유현. 현성이를 너무 과소평가 한 거 아니야? 아무나 차사 하나 더 붙었다고 현성이와 호각을 이룰 정도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해? 기억해 둬. 저 녀석은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라는 것을. 그런 녀석을 네가 이긴 거다.”
“그래, 이건 네가 잘해서 된 거야. 그리고 너한테 뭔가 붙어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어. 현성이 형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고. 하지만 그것도 능력이지 뭐.”
팀원들은 백유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팀이니까 가능한 장면이었다.
그 때 김현성이 불쑥 말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세컨드 소드 맨은 이젠 유현이한테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을까요?”
박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두 가지의 의미였다.
“그래...코드 명이 너무 길기도 하고, 무엇보다 ‘세컨드(Second)’라는 말도 좀 어색해졌으니...”
박성진이 백유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는데, ‘더 리퍼(The reaper)’ 어때? 가만 보니, 네가 싸우는 모습이 꼭 저승사자 같았거든. 마침 차사도 옆에 붙어 있으니 오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더 리퍼라...좋네! 뭐, 예전 어떤 게임이 떠오르긴 하지만 걔는 총을 쓰고, 넌 검을 쓰니깐 상관없을 거고.”
백유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리퍼.
왠지 마음에 드는 코드 명이었다.
“네, 좋아요.”
박성진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부터 네 코드 명은 더 리퍼. 죽음을 가져오는 자다. 잘 부탁한다. 리퍼.”
백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신(死神).
이상할 정도로 죽음과 연관이 많았던 백유현의 새로운 이름.
백유현은 그 이름이 마음에 꼭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