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폭풍전야
선발전은 하루가 남았지만, 백유현은 척준경과 함께 엄청난 훈련을 강행했다.
하루에 뭐가 될 것이라는 생각 따윈 없었다.
뭐라도 해야 되는데, 하루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
그리고 그 하루는 바로 척준경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더욱 소중했다.
- 검의 끝이 흔들렸다. 다시 하여라!
- 다시!
- 어허, 살의(殺意)가 담기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단 일격에, 적의 심장을 꿰뚫는다 생각 하여라!
척준경은 아무리 백유현이 몬스터를 일격에 잡아내도 봐주지 않았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일격에 잡아내는 것.
즉, 막야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제대로 꽂아 넣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검의 초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척준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살검(殺劍)의 기본, 즉 살의를 검에 싣는 것이었다.
파각!
“꾸에엑!”
얼마나 지났을까, 백유현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몬스터 하나의 목에 막야를 박아 넣었다.
깔끔하게 목을 꿰뚫고 지나간 검.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잘했다.
망설임이 없이, 그리고 막 휘두른 것이 아닌, 제대로 노리고 찔러 들어간 일격.
백유현에게 빙의한 상태의 척준경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유현이 어디를 노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검을 찔러 넣었는지.
- 그것이 살의니라. 알겠느냐?
백유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내 의지가, 검이 되어...적을 죽인다.’
손에 들린 막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의지.
의지가 실린 검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이제까지 가상 전투를 벌이면서 그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일격.
그 문제가 풀린 것이었다.
백유현은 잠시 두 눈을 감고 김무준과의 가상 전투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파각-
‘됐어...! 이젠...됐어!’
마지막 순간, 살의가 깃든 검은 김무준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백유현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것이 무신, 척준경의 검.
- 살의를 검에 실을 줄 알게 되었으니, 사휘(死輝)를 전수하겠다.
“사휘...”
해석하면 죽음의 빛 정도가 되었다.
[검림마인, 척준경이 사휘를 전수하고자 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라 척준경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사휘는 쾌검 중의 쾌검. 허나, 빨리 베어낸다고 모든 검이 쾌검이 될 수는 없다. 네 몸의 모든 근력을 한 번의 공격에 담아 폭발시키는 것. 이것이 쾌검의 기본이다. 빠르되, 강하고, 강하되, 빠른. 마치 삭풍(朔風)과도 같은 것이 쾌검이라 할 수 있다.
삭풍.
추운 겨울날,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을 뜻한다.
빠르고 강하며, 날카로우면서 예리하다.
천년거암도 삭풍의 칼날 바람에 깎여 나가기도 할 정도로, 삭풍에 실린 힘은 강하다.
- 단, 살의가 실려 있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가 없다. 검은 애당초 생명을 거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 검에 의지를 전달하여 삭풍을 일으켜라. 그렇게 되면 죽음을 담은 섬광이 그려질 것이니, 이것을 사휘라 부른다.
그야말로 지독한 쾌검을 뜻하는 말이었다.
- 이제부터 사휘를 전수하겠다. 검을 잡아라.
백유현은 검 손잡이를 꽉 말아 쥐었다.
- 기억해라. 살의를 담은 삭풍. 그것이 사휘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다.
척준경이 생전, 수많은 적들을 베어냈던 그 검.
그 검이 이제 백유현을 통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파각-
백유현은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진득한 살기를 뿜어냈다.
파앗!
막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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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앗- 파가각!
수많은 살생이 벌어졌다.
그 동안에도 막야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피에 굶주린 검답게, 막야는 더욱 사납게 모든 것을 베어나갔고 허공에는 핏줄기가 뿜어졌다.
“헉, 헉!”
백유현의 눈앞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의 사체가 가득했다.
하지만 백유현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직, 아직이야!’
김무준을 완벽하게 이기기 위해서는 사휘가 필요하다.
절호의 기회를 완벽하게 살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일격!
그것 때문에 그는 지금도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더 간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선발전은 바로 내일.
그 전까지 완성해둬야 한다.
파가각-
온 몸의 근육이 한껏 수축되었다가 거대한 힘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콰드득!
막야가 매섭게 목표물을 꿰뚫었다.
살의를 담는 것은 이제 자연스럽게 되었다.
백유현의 검에는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로지 그의 검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 검은 확실하게 대상의 목숨을 끊어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막무가내로 휘두르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점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알고 있었다.
사휘에 다다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크워어어!”
그 순간, 갑자기 옆에서 거대한 몬스터 하나가 달려들었다.
곰처럼 생긴 몬스터였는데 팔이 네 개에다 머리가 두 개인 트윈 헤드 베어였다.
레벨은 95.
그렇지만 95치고는 상당히 빠른 몸놀림을 보여서, 각성자들을 애먹이는 놈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백유현을 상대로, 놈은 매우 빠르게 공격을 해왔다.
파각!
놈의 거대한 발톱이 허공을 사납게 찢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에 이어 예상치도 못한 방향에서 불쑥 치솟는 또 한 번의 공격!
백유현은 그 공격들을 피해내며 놈의 안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놈의 스피드가 빠르다 한들, 백유현의 순발력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파앗-
품속으로 파고든 순간, 백유현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보였다.
완전히 열려 있는 놈의 가슴이.
저 두꺼운 근육으로 둘러싸인 가슴팍 안쪽에는 심장이 펄떡이며 뛰고 있겠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백유현의 손에 들린 막야가 치솟았다.
진한 살기를 머금은 검, 막야!
놈이 매서운 기세로 솟구치던 찰나였다.
번쩍!
허공에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콰직!
그리고 트윈 헤드 베어의 가슴팍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
오히려 검을 내질렀던 백유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이...이건?’
이제까지 수도 없이 싸워오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분명 막야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고, 막야의 칼끝이 트윈 헤드 베어의 가슴팍에 닿지도 않았는데 놈의 가슴이 꿰뚫린 것이다.
실제적으로 막야가 놈의 가슴팍을 뚫은 것은 오히려 그 다음.
그런데 그것은 확인사살에 지나지 않았고, 이미 트윈 헤드 베어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죽은 상태였다.
‘이것이...사휘!’
백유현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방금 전, 허공에서 번뜩이던 음산한 광휘를.
그 광휘의 끝에는 죽음이 있었다.
- 잘했다.
척준경이 흡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감사합니다.”
너무도 이질적인 경험에 백유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 사휘를 얻었으나, 그것을 네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 더 정진하여라.
척준경의 말에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백유현은 다시 막야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사휘가 어떤 것인지는 맛을 보았다.
이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방금 전 느꼈던 그 손맛을, 온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느낌을 떠올리며 백유현은 땅을 박찼다.
“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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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백유현은 일찍 일어나 명상에 잠겨 있었다.
김무준과의 가상 전투를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는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눈을 감고 있던 백유현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준비는...끝났어!’
그는 막야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를 차사, 강효가 따랐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서니 세단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부우웅-
세단은 곧 선발전이 열리는 대회장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이미 수많은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백유현이다!”
“백유현이 도착했다!”
백유현이 차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후레쉬가 터지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선발전에 참가하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지금 심정 좀 말씀해 주십시오!”
“첫 상대가 김무준으로 잡혔는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백유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대진표는 당일 날 공개가 된다 해서 그도 모르고 있었는데, 김무준이 첫 상대로 잡힌 모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저쪽에서 또 한 번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무준이다!”
“야, 서둘러! 김무준이 나타났어!”
저 쪽에서 천천히 등장하고 있는 한 사내.
온 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상으로보다 실제로 보니 그는 더욱 거대했고, 더욱 단단해 보였다.
그 동안 김무준 역시 엄청난 수련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선발전에 임하는 각오를 말씀해주십시오!”
“오랜만인데, 지금 심정 좀...”
그런데 떠들썩하게 질문공세를 퍼붓던 기자들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김무준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무감정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툭- 한 마디 내뱉었다.
“꺼져 주시겠습니까?”
“예? 아니...”
기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김무준은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백유현과 눈이 마주쳤다.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김무준의 두 눈빛.
하지만 백유현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늘, 전...’
백유현은 김무준의 두 눈을 마주하며 속으로 조용히 내뱉었다.
‘당신을 반드시 잡을 겁니다. 김무준 씨.’
상대가 맹수이든 뭐든 상관없다.
오늘의 승자는 분명히 백유현이 될 테니까.
“오오, 저 눈빛 봤어? 시펄, 싸겠다, 싸겠어!”
“와, 김무준의 저 살벌한 눈빛 받고도 백유현이 웃었어! 소름 돋는다, 진짜!”
“역시 소문대로 둘 다 괴물이구먼! 오늘 진짜 무시무시하겠는데?”
기자들은 취재할 생각도 안하고 저희들끼리 쑥덕였다.
“백유현 씨. 장내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안내요원이 나와서 백유현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곧 대회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백유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야야, 어서 찍어! 어서!”
“백유현군! 오늘 각오 말 좀 해주세요!”
뒤늦게 기자들이 달려들었지만 이미 백유현은 장내로 들어간 후였다.
장내에 마련된 라커룸에 안내된 백유현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실제로 본 김무준은 훨씬 거대했고, 훨씬 강해보였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그런 상대를 보았다면, 그래도 긴장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드시 잡는다!’
백유현의 두 눈이 매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