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척준경
[당신의 권능 요청에 따른, 염라의 대가가 청구됩니다]
[요괴, 요(妖)를 소멸시키고, 그 내단을 회수하라]
[기일 : 한 달]
[보상 없음]
[추가 보상 없음]
[요괴, 요는 천년 묵은 구미호가 그 정체이며, 강원도 태백 일대의 지박령들과 원귀들을 복속시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요괴, 요를 소멸시키고 귀(鬼)를 부리는 요사스러운 요의 내단을 회수하라]
이것이 바로 백유현의 권능 요청에 대한 염라의 대가 청구인 모양이었다.
요괴, 요.
쉽게 말하면 구미호를 잡으라는 뜻이었다.
‘좋아, 곧 잡으러 가주지!’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를 잡는 것은 아직 기한이 남아 있으니, 선발전에 일단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 때 창 하나가 떠올랐다.
[검림마인(劍林魔人), 척준경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네 놈이 감히 나를 불러냈더냐?”
그리고 백유현의 눈앞에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혼령 하나가 서 있었다.
경무장을 하고 있는 그의 온 몸에는 온통 피가 선연하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두 손에 잡힌 두 자루의 검에서도 귀기(鬼氣)가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척준경은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 역시 검림마인들과 최고의 자리를 다투던 중에 불려나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듯했다.
스릉-
그 때 차사, 강효가 앞으로 나서며 절명을 빼어들었다.
“소주께 예를 갖추어라!”
강효의 서슬 퍼런 호통에도 척준경은 눈살을 와락 구기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사 따위가 감히 죽고 싶은 게로구나? 염라조차 내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거늘, 네 놈이 지금 명을 재촉하고 싶은 게지?”
혼령이 차사에게 으름장을 놓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강효는 눈살을 찌푸렸다.
월직차사인 그는 일단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그가 절명을 들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강효.”
강효가 백유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더니 살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매서운 기세를 담고 척준경에게 계속 고정이 되어 있었다.
백유현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부족하여 외람되이 척준경 장군의 신령(神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후손을 한 번 도와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물론 염라의 아패를 가지고 강제로 굴복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척준경은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는 무장.
그런 존재에게 함부로 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백유현이 알고 있는 척준경은 분명히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무턱대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하는 존재가 아닌, 자신만의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평생 그 신념에 따라 움직였던 희대의 명장.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는 자신의 오만함으로 결국 목숨을 잃은 관우보다 훨씬 더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다만, 역모(逆謀)를 꾀했다는 그 단점 때문에 척준경은 신이 되지 못하고 그 이름이 잊힌 것이다.
척준경도 백유현의 마음을 느꼈는지 비록 미간을 여전히 찌푸리고는 있었어도,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후손의 이름은 어찌 되는가?”
“백유현입니다. 장군.”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 제가 검을 쓰는데 부족함이 많아 장군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검술을 지닌 장군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신다면,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백유현은 어려서부터 귀신을 보아왔다.
그래서 굿도 많이 했었다.
그런 이유로 백유현은 혼령들을 달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무녀들이나 박수들이 혼령을 달래는 법을 듣고 자란 백유현이다 보니, 말이 술술 나왔다.
“재미있는 녀석이로다.”
척준경이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무가(巫家)의 장군신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존재.
그가 관심을 가지고 백유현을 낱낱이 훑었다.
그러더니 백유현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막야에 눈길이 멈추었다.
“그 검은...막야가 아니더냐?”
“예, 장군.”
“허어, 실전되었다 알고 있었거늘...어찌 너와 인연이 닿았단 말인가?”
척준경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막야를 면밀하게 살폈다.
“아직까지 귀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니, 막야의 원혼이 최근까지 서려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역시 척준경은 전후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척준경은 묵묵히 막야와 백유현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막야같은 귀검이 너를 선택했단 말이지...참으로 재미있지 아니한가?”
최고의 검.
그리고 최고의 무장.
우연 아닌 우연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이 곳.
척준경이 불쑥 물었다.
“검은 다룰 줄 아느냐?”
“그저 휘두르는 정도입니다.”
“껄껄, 검이야말로 휘두르고 때로는 찌르기도 하는 무기지. 좋다, 내 염라와의 일도 있고 하니 너를 보살펴 주마.”
역시 백유현의 달램이 먹혀든 것일까?
척준경은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호랑이와 같은 매서운 두 눈에서 뿜어지는 시퍼런 살기는 감출 수가 없었지만.
역시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라 불렸던 그다웠다.
“단, 조건이 있다.”
그런데 척준경이 조건을 내밀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내, 너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내리기 위해서는 너의 혼과 합일(合一)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혼의 합일.
즉, 빙의를 말함이었다.
백유현은 강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릴 줄 알았던 강효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마 이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염라.
그가 확실하게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빙의가 된다 하더라도 척준경의 제어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
일반적인 빙의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차사, 강효의 묵인 하에 백유현은 다시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장군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척준경이 그를 보며 굵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이승에 한이 남아 있는 자가 아니니. 네 부름만 아니었어도 검림옥에서 벌써 백기(白起)의 목을 베어냈을 것이다. 허나, 놈의 목은 언제든 취하면 되는 법. 지금은 너의 간곡함을 풀어주는 것이 먼저일 것 같구나.”
척준경 역시 이승에 미련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백기.
척준경은 진나라의 학살자라 불리던 용장, 백기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려서부터 따돌림을 당해 늘 책을 보곤 하던 백유현인지라 백기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괴물을 그저 어린애 취급하는 척준경이라니!
[검림마인, 척준경이 빙의(憑依)를 시도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앗-
그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며 눈앞이 빙글 돌았다.
“크윽!”
엄청난 어지럼증이 들며 백유현이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 잘 들어라. 나는 군신(軍神), 척준경. 내가 함께 하는 이상 너는 절대 이기지 못할 적이 없을 것이다.
빙의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빙의와는 전혀 달랐다.
척준경은 척준경대로, 백유현은 백유현대로 의식이 따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 자, 가보자꾸나. 너의 검을 이 눈으로 보아야 하겠다.
“예, 장군.”
백유현은 다음 터미널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80레벨 대의 터미널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백유현의 얼굴에는 온통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척준경.
최고의 무장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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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번에는 강효는 백유현을 돕지 않았다.
백유현은 혼자 이 드넓은 터미널의 모든 몬스터들을 쓸어 버린 것이었다.
그의 레벨이 104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상당히 힘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80레벨대의 몬스터라고 해도, 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백유현이 미친 듯 막야를 휘두르는 동안에도 척준경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 움직여라, 어떻게 베어내라...
이런 얘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백유현도 그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 검을 잡아 보아라.
그런데 모든 몬스터를 죽이고 나서야, 척준경이 한 마디 입을 열었다.
파앗-
그 순간, 척준경이 다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 개의 검 중 하나만 들고 있었다.
“이제 너는 나와 싸우게 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라.”
백유현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최강의 무인과 갑자기 싸우게 되다니!
하지만 백유현은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척준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파각-
그 순간, 백유현은 자신의 눈앞에 마치 거대한 검이 쏟아졌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흐윽!”
백유현은 다리에 힘이 빠지며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척준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척준경.
그는 백유현과 마주한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도, 단단하게 검을 그러잡은 손도...
그는 아예 처음부터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유현은 그 검의 기세에 꿰뚫려 버린 것이다.
“이것이 너의 첫 번째 검이다.”
척준경의 입이 열렸다.
“검의 첫 번째는 바로, 올바른 생각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의(意)라고 한다. 상대를 죽이려 마음을 먹었거든 주저 없이 검을 찌르고, 베어내라. 너를 지키기 위한 검이 아니니라. 이것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 바로 살검(殺劍)의 첫 번째, 살의를 검에 담아내지 못하면 살검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
백유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은 척준경의 검에 꿰뚫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척준경이 내뿜은 살의에 뚫린 것이다.
그저 생각이었을 뿐인데, 백유현은 그 가운데서 피를 쏟고 쓰러진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그의 착각이었지만.
‘이것이...살검!’
백유현은 방금 있었던 몬스터들과의 싸움을 돌아보았다.
사실 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에, 백유현은 신체 능력치만 믿고 싸웠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주저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옥에서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는 안일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척준경은 바로 그 점을 짚은 것이다.
“상대가 누구더냐?”
척준경이 다시 물었다.
백유현이 크게 숨을 토해내고는 대답했다.
“김무준이라고 합니다. 관우를 불멸자로 두고 있는...”
“관우? 촉(蜀)의 운장 말이더냐?”
척준경의 말에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말에 척준경이 피식 웃었다.
“관우 정도에 그리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걱정 말아라.”
척준경의 두 눈이 똑바로 백유현을 향했다.
“하늘 아래 무신(武神)은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