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검림마인의 일인(一人)
선발전을 하루 앞둔 지금, 강효와 백유현은 오늘 역시 K-244라 불리는 카오스 터미널에서 사냥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각성자 레벨 대응 80레벨에 해당하는 K-244 던전에서 수련한 것은 다름 아닌 검술(劍術)이었다.
가상훈련을 아무리 반복하면서 느낀 바는, 최고의 타이밍에 찔러 넣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술을 가지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이었다.
지금 백유현의 순발력으로는 김무준의 회피 능력을 따라잡기는 버거웠다.
단 일격을 찔러 넣으면 되는 순간까지는 수도 없이 만들어냈지만, 김무준을 완벽하게 침몰시킬 수 있는 그 ‘일격’을 도무지 완성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검술이라는 것이 빠르기만 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영체나 몬스터라면 또 모르지만 상대가 인간, 그것도 김무준과 같은 강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김무준은 무신(武神)이라 불리는 관우의 계약자.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 반해 백유현은 제대로 된 검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뛰어난 순발력과 지력으로 그 간극을 좁히고는 있었지만, 과연 김무준에게도 그것이 통할까?
“후우...”
요새 그런 고민에 사로 잡혀 있는 백유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그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염라의 권능 ‘단죄’와 ‘압도’가 동시에 터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무준을 확실하게 순수한 힘으로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쉬울까?
그렇기에 단박에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최강의 검술이 필요했다.
하지만 염라나 조셉은 애초에 싸움과는 거리가 먼 불멸자들이다.
신체 능력치를 올려주거나, 미래를 예지하긴 하지만 지금 백유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채워줄 수가 없는 것이다.
“소주, 무슨 고민이 있으시옵니까?”
강효의 말에 백유현은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백유현은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있잖아.”
강효는 백유현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강효가 고개를 저었다.
“소주의 허락 없이는 제가 감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백유현이 강효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 소주께서 가지고 계신 고민을 저에게도 나눠 주시면 어떠시옵니까? 소인, 소주께서 고민하시는 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사옵니다.”
강효.
역시 충직한 자였다.
“사실 말이야...”
백유현은 요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말했다.
강효는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면 어쩌면 방책이 있을 수도 있을 듯하옵니다.”
백유현의 두 눈이 순간 번뜩였다.
“방법이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일찍이 대왕께서는 팔대 지옥 외에 따로 하나의 뇌옥(牢獄)을 만들어 두신 적이 있사옵니다. 여기는 망자(亡者) 중에서도 실력이 매우 출중한 자들이 그 업보에 대한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곳이옵니다. 이 뇌옥의 이름은 검림옥(劍林獄). 말 그대로 역사상 최고의 무장들이 갇혀 있사옵니다.”
“검림옥?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데?”
강효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것이옵니다. 검림옥의 존재는 지금까지 절대 외부로 유출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균열이 발생한 이후, 대왕께서는 위험한 임무에 차사(差使)를 배제하고, 검림옥의 마인들을 보내 그 문제를 수습하기 시작하셨사옵니다. 대다수의 차사들이 검림옥의 존재를 이번에야 알게 되었을 정도로, 매우 은밀한 곳이었지만 이번에 대대적으로 알려진 곳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검림옥이라...”
백유현은 흥미가 이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지옥에도 검림산(劍林山)이라고 해서 죄인의 몸을 갈가리 찢는 지옥이 있긴 하다.
그런데 검림옥의 검림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수많은 검사들이 쉬지 않고 싸움을 벌이고 있는 지옥이라고 생각이 드는 그런.
마치, 그 안에서 누가 최고인지 가리려는 듯.
그리고 그게 맞는다면 염라는 영악하게도 일부러 검림옥을 만들어 최고의 마인들을 키워내는 느낌이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 안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뛰어난 마인들이 한군데 갇혀 있다면, 결국 누가 강한지 가리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잖아.”
강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사옵니다. 대왕께서도 바로 그 점을 노려 검림옥을 따로 만드신 것이옵니다. 혹여 명부에 일이 생겼을 시, 그 자들을 풀어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의도셨지요. 그리고 이번에 균열이 생기면서 결국 그 마인들이 풀려나 대왕께서 내리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사옵니다. 그로 인해 그 마인들은 ‘검림마인(劍林魔人)’들이라 불리게 되었사옵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걸 몰랐어. 그런데 그 정도로 강한 존재들이 탈옥을 하지 않았다는 게 좀 놀라운데? 얼마든지 차사나 옥졸을 공격해서 탈옥할 수 있잖아.”
“그 배경에는 침혼충(侵魂蟲)의 역할이 컸사옵니다. 마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세 마리의 침혼충은 유사시, 마인들의 뇌를 녹여버릴 수 있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침혼충은 절대적으로 대왕의 명령에만 반응하는 존재. 아무리 뛰어난 마인이라 하더라도, 침혼충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이상, 대왕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마치 제천대성,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진 금고아를 연상케 하는 조련법이었다.
강효의 말을 간추려보면, 역대 최강의 무장들을 검림옥이라는 뇌옥에 한꺼번에 몰아넣고 알아서 서열정리를 하게 한 뒤, 유사시에 그들을 풀어 문제를 해결하는 염라의 큰 그림이라는 것인데...
그 때 백유현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들은 애초에 불멸자도 아니어서 나와 계약도 못할 텐데...”
강효가 마른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왕께서는 하해와 같은 이해심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분이시옵니다. 하물며 죄인들에게도 그러실진대, 대왕께서 직접 선택하신 소주의 청을 듣지 않으시겠사옵니까? 소인이 알고 있는 바, 불멸자들에게 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고 있사온데, 그것을 써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
그 말에 백유현은 아- 하는 탄성 소리를 냈다.
‘맞다! 권능 요청!’
계약자가 불멸자에게 권능을 요청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존재했다.
요청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게 치러야 했지만, 받아들여지면 정말이지 엄청난 이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강효는 염라에게 권능을 요청해서 검림마인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전이 받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강효...그런 걸 막 말해줘도 되는 거야?”
강효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월직차사에게는 생각하시는 것보다 광대한 권한이 주어져 있사옵니다. 그리고 소주를 보필하는 것은 대왕께서 소인에게 직접 하명하신 일. 그에 대해 대왕께서 언짢아하실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월직차사도 그냥 월직차사가 아니다.
백유현이 겪어본 바, 강효는 월직차사중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듯했다.
“성공 가능성이 있을까?”
“대왕께서는 소주를 도우시려 하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물론 업보에 따른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소주께는 큰 해가 되진 않으실 것이옵니다.”
백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건 해볼 만하다.
물론 지금 상태로도 김무준과 붙는다고 해서 질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에 가상 전투를 시작했을 때는 그를 절대 넘어설 수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단점과 약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그 틈을 노려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단 하나의 문제는, 그와 싸움을 수도 없이 벌였지만 결국 백유현도 상당히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백유현에게는 단 일격(一擊)을 제대로 넣을 수 있는 검술이 필요한 것이었다.
필요할 때, 필요할 곳에 정확하게 찔러 넣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검.
‘권능 요청을 써보자.’
이것은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방법이다.
각성자들의 요청을 들을 것인지, 아닌지는 해당 불멸자가 결정하는 일이니 성공여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권능 요청을 해서 불멸자와의 친밀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치명적이진 않다.
단, 두 번째의 요청부터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첫 요청부터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백유현에게 있어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
[계약 대상자, 염라에게 권능을 요청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불안하게도 염라가 응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각성자들이 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백유현도 어느 정도 마음은 비우고 있었지만, 막상 염라의 응답이 없으니 조금은 초조해졌다.
그 때, 다시 창 하나가 떴다.
[불멸자, 염라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떤 권능을 원하는가?]
백유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첫 단계는 넘어섰다.
그리고 두 번째...
꿀꺽-
백유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검림마인에 대한 지배권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백유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자, 염라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번에도 창이 계속해서 올라갔지만, 답은 의외로 빠르게 돌아왔다.
[일인(一人)에 대한 지배권을 허(許)한다]
단 한 명.
역대 최고의 무장(武將)을 고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백유현은 저도 모르게 강효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청에 염라가 화답한 것이다.
단 한 명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응답이었지만, 그것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누굴 골라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갈등에 빠진 백유현의 두 눈에 뭔가 떠올랐다.
[불멸자, 염라의 전언(傳言)이 도착했습니다]
[불멸자, 염라가 소통을 폐(廢)하였습니다]
[불멸자, 염라와의 소통이 종료되었습니다]
백유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염라는 자신의 말만 툭 던지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검림마인 중 하나라면 상당한 실력자임은 분명하니까.
제대로 된 무장이 아니었다면, 염라에게 발탁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검림마인이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백유현은 떨리는 눈빛으로 염라의 전언을 열었다.
[발신 : 불멸자, 염라]
[수신 : 계약자 백유현]
[염라의 서(書)]
[계약자의 간곡한 청에 의해 한 번에 한해 그 청에 응답하기를 결심하다. 이제 본 왕은 계약자 백유현이 요청한 바에, 검림마인 중 일인에 대한 지배권을 전이 할 것이다. 대상 검림마인은...]
그 뒤를 읽어내려가던 백유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상 최강의 무장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설마 이 인물이 나올 줄이야!
[대상 검림마인은...]
백유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척...준경(拓俊京)!”
고려 시대, 아니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라 불렸던 전설의 무장.
바로 척준경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백유현에게 가장 필요한 그 이름이!
척준경.
이미 잊힌 지 오래된 전설의 무장의 이름이, 오늘 백유현을 통해 부활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