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카오스 터미널 넘버 K-782
시귀 세 마리는 오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훈련 동에 교관들이 순찰을 도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백유현은 아무도 터치 하지 않는 유일한 한 곳을 떠올렸다.
100평이 넘는 자신만의 공간.
어차피 혼자 있는 공간이라 남의 눈을 의식할 이유도 없는 곳.
‘어서 와라. 시귀들아.’
백유현은 바로 자신의 숙소의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선지를 뿌려 놓고 시귀들을 유인했던 것이었다.
선지의 썩은 내는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최첨단 공기정화시스템에 의해 사라진다.
그러니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놈들을 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그리고 백유현은 훈련을 핑계로 숙소에 이런 저런 것들을 설치해 두었다.
자재실에 가서 재료들을 구해오기도 했고, 기초 무기 보관 창고에 가서 몇 가지 무기들을 가져와서 하루 종일 작업을 했다.
하루 만에 그의 방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누더기 시귀와 같은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한쪽 벽면에 날카로운 강철 송곳을 수도 없이 꽂아 두었고, 숙소 어딜 가든지 비상용 둔기와 단검이 비치되어 있었다.
필요도 없는 가구들은 싹 치워서 숙소 전체가 하나의 격투장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곳이라면 다른 이의 눈치도 볼 것 없다.
백유현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놈들만 기다리면 된다.
백유현은 현관문이 마주 보이는 소파에 기대 앉아 기다렸다.
선지의 피 냄새가 지금쯤 어느 정도 퍼졌을 것이다.
공기정화기가 작동을 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놈들이 맡는 것은 물리적인 냄새가 아닌, 그 냄새가 가지고 있던 고유한 흔적이니까. 놈들은 반드시 그 흔적을 좇아 올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복도 저 너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워어어-”
성대가 썩어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는 시귀들의 독특한 소리였다.
철벅, 철벅.
썩은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된 놈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로 미뤄보아, 적어도 둘. 혹은 셋. 아니, 확실히 셋이 맞을 것이다.
굶주린 시귀들에게 이 썩은 선지의 피 냄새는 치명적일 정도의 유혹일 테니까.
백유현이 씩 웃었다.
온다, 놈들이.
놈들은 날카로운 것만 아니면 통과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문이 잠겨 있어도 벽을 투과해서 들어올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워어어억-!”
뼈만 남은 팔 하나가 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 썩어 문드러진 눈알이 겨우 붙어 있는 머리통이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놈의 눈알이 자동적으로 한 곳으로 향했다.
그것은 소파에 앉아 있는 백유현 쪽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썩은 선지.
놈의 썩은 눈깔에 생기가 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래, 배고프겠지. 먹어. 마음껏.”
백유현이 씩 웃었다.
시귀 몇 마리를 잡아보고 놈들에 대한 특성은 완전히 파악했다.
누더기 시귀면 몰라도, 이 일반 시귀들은 썩은 피 냄새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래서 백유현을 놔두고 바로 선지에 달려드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방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다른 두 마리 시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워억! 그웍!”
놈들은 눈앞에서 썩어가는 선지를 마주하자 말 그대로 미쳐 날뛰며 선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놈들이 선지를 쥐고 입에 한 가득 쑤셔 넣는 순간이었다.
덜컥-
파각!
뭔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지를 쥐고 있는 놈들의 목을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콰당탕!
그리고 놈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툭- 투툭-
입 안 가득 선지를 문 채로 놈들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게, 먹을 때는 주변을 잘 봤어야지.”
끼익- 끼익-
정확하게 시귀들의 머리통이 있던 자리에는 하나는 커다란 도끼날이 천장에 고정된 와이어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와이어는 바로 바닥에 놓여 있던 선지와 연결이 되어 있었고, 선지를 잡아 당기면 바로 와이어를 고정해 있던 끈이 끊어져 도끼가 날아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손 짚고 헤엄치기!
백유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시귀 세 마리를 잡아낸 것이다.
지력이 낮은 놈들에게는 너무도 유용할 덫.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겠는 걸?’
물론 최하급 영체들에게만 해당하겠지만, 이렇게 효과가 좋은 덫이 있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미 썩은 선지의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영체들이 꼬여들 것이다.
[시귀 사냥에 성공하여 400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명부의 척살자’ 호칭의 효과로 120 경험치가 더해집니다]
[시귀 사냥에 성공하여 400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세 마리를 동시에 잡아서 1,560 경험치를 한꺼번에 얻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명부의 긴급 임무가 완료되었다.
[얼굴 없는 자의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시귀를 소멸 시켜라! 10/10]
[얼굴 없는 자의 임무를 완료하여 700의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다음 레벨까지 1,160 경험치가 남았습니다]
[당신에 대한 명부(冥府)의 관심도가 크게 높아집니다]
[얼굴 없는 자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임무 완료 보상으로 얼굴 없는 자와의 친밀도가 5 올라갑니다]
[‘긴급 포고’ 임무 완료의 추가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치가 1씩 올라갑니다]
[근력이 17에서 18로 상승합니다]
[지구력이 11에서 12로...]
[순발력이 15에서 16으로...]
[행운이 9에서 10으로...]
[정신력이 12에서 13으로...]
[지력이 18에서 19로...]
[근성이 15에서 16으로...]
[체력이 10에서 11로 상승합니다]
[임무 완료 보상으로 가용 신체 능력치가 4 올라갑니다]
각성자 레벨 4
[근력 18] [지구력 12] [순발력 16] [행운 10]
[정신력 13] [지력 19] [근성 16] [체력 11]
이후 추가될 수 있는 능력 슬롯 수 [??]
가용 신체 능력치 4
(지력 적용 불가)
[둔기류(鈍器流)의 숙련도가 20 올라갑니다. 다음 레벨까지 110의 숙련도가 필요합니다]
[죽음을 수습하는 자들이 당신을 향해 경의를 표합니다]
임무 완료 창.
그리고 백유현은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명부의 차사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순조롭다.
하지만 이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조셉이 말했듯, 팀 대항전에서 우승을 해야 염라와 계약을 맺게 되니까.
아직까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명부(冥府)에서 당신에 대한 추가 의뢰를 하고자 합니다]
[내용을 보시겠습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별]
[긴급 의뢰]
[??? : 명부(冥府)에서 보관하고 있던 생사부(生死簿) 한 권이 사라졌다. 생사부를 훔쳐서 도망간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차원의 균열 중 한 곳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놈을 잡아 생사부를 찾아준다면 후한 보상을 내릴 것이다]
[임무 완료 보상 : 신체 능력치 5 포인트, 얼굴 없는 자와의 친밀도 30]
[얼굴 없는 자가 임무를 의뢰해 왔습니다. 임무를 받으시겠습니까? 추가 보상이 있습니다]
[임무 완수를 하면 얼굴 없는 자와의 계약이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제한 조건 : 임무 완수 기간은 열흘입니다]
[임무 정보 : 놈에게 당해 혼절한 생사고(生死庫)의 옥졸들의 말에 의하면, 놈은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매우 날쌔다고 한다. 놈의 흔적을 추적한 차사들의 보고에는 놈이 현세에서 K-782 카오스 터미널이라 불리는 균열에 은신하고 있다고 한다. 놈의 능력치는 측정불능. 본래의 모습은 온 몸이 황금빛 털로 뒤덮여 있었으나 지옥의 겁화(劫火)에 타올라 털이 모두 시커멓게 변색이 되었다고 한다. 차사의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놈은 각성자 레벨 6에 대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건!’
창을 보던 백유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바로 불멸자와의 계약 직전에 간혹 뜬다는 ‘키 퀘스트(Key Quest)' 즉, 계약 임무가 아닌가!
계약 임무가 뜨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그 결과를 비교하면 당연히 계약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훨씬 좋다.
친밀도를 한 방에 엄청나게 올릴 수도 있고, 얻을 수 있는 보상도 상당했으니까.
단, 그만큼 조건이 까다롭고 어렵다.
지금 같은 경우는, 그 원숭이라는 놈을 잡으려면 K-782 카오스 터미널에 가야한다는 건데...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가란 말인가?
베타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카오스 터미널은 혼자 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작 레벨 4짜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
게다가 시간 제약이 열흘...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너무 어렵잖아...이거!’
그 때, 갑자기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방마다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서 팀장 황정국이 직접 소집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 현 시간 부로, 모든 훈련생 강당으로 집합. 다시 말한다. 현 시간 부로, 모든 훈련생 강당으로 집합.
백유현도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단련복을 갈아입고 선지를 꽁꽁 싸매 치운 뒤 강당으로 향했다.
아직 신체 능력치를 올리지 않았지만, 그건 좀 더 생각해보고 배분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강당으로 가니, 황정국 옆에 몇 명의 각성자들이 서 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는데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백유현은 물론, 다른 훈련생들도 그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저 사람들 소드 포스(Sword Force) 아냐?"
“엥, 진짜네? 소드 포스가 왜 여기에?”
“국내 랭킹 20위 권 안에 드는 실력 있는 팀이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훈련생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황정국이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 다들 모였나?”
훈련생들을 바라보던 황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멀쩡해 보이는군. 그렇게 격렬하게 싸운 것치고는. 하긴, 응급실에 실려 간 놈들 빼고 모였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자, 다들 주목!”
훈련생들이 황정국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아, 일단 소개를 좀 하지. 내 옆에 서 있는 이 분들은 다들 알겠지만 소드 포스 팀이다. 이번에 특별히, 팀 대항전에서 우승한 팀을 위해 실전 경험을 직접 도와주겠다고 해서 급작스럽게 일시적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국내 랭킹 20위권이라 해도 엄청난 것이다.
그런 팀이 베타 프로젝트 팀을 지원하기 위해 오다니!
훈련생들은 그렇게 생각해서 놀라고 있었지만, 교관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들이 여기에 온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쯧, 대기업 양아치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대한 그룹에서 조명재 키우려고 오래 전부터 기획하고 있었다며? 그래서 전에 없이 팀 대항전이 끝나자마자 우승 팀의 카오스 터미널 실전 경험이라는 계획을 급히 집어넣은 거고.”
“그래도 좋겠다. 소드 포스 정도면 꽤 좋은 스승이 되어 줄 테니.”
교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그런데 누군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에이, 그것도 쟤네들이 우승해야 의미가 있는 거지. 잘못하다간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야. 조명재도 이번에 못 올라가는데 무슨.”
“어? 소식 못 들었어? 어제 강윤호 대신 조명재가 대신 올라가기로 했다고 하던데?”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어제 강윤호가 갑자기 진출을 포기했다고 하던데? 자기 대신 조명재가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교관들도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극비에 진행된 상황.
“뭐야, 그럼 대한 그룹이 벌써 손을 썼다는 거야? 허, 이 자식들 빠르네!”
아마 대한 그룹에서 강윤호에게 접근해서 손을 쓴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어떤 외부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것을 우습게 아는 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
그리고 강윤호가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했기 때문에 아마 그와 딜을 했을 공산이 컸다.
“그럼 이거 참, 9조가 우승할 확률이 높아지겠네? 조명재가 올라간다면 저 자식들이 여기에 괜히 온 게 아니게 되는 거고. 죽 쒀서 제 자식 먹일 확률이 매우 높아지겠군.”
“그렇게 되겠지...”
국내 최고의 대기업, 대한 그룹의 힘이 이 정도였다.
원래는 나중으로 계획되어 있었던 카오스 터미널의 실전 훈련이 ‘제한적’이지만 미리 앞으로 당겨서 실시가 되다니...
“자, 그래서 이번 팀 대항전의 우승팀에게는 또 한 가지 특전을 추가하게 되었다. 우승팀의 대표 세 명에게는 소드 포스와 함께 카오스 터미널의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대상 카오스 터미널은...”
훈련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도대체 어디일까? 소드 포스와 같이 할 수 있는 터미널은.
“카오스 터미널 넘버 K-782. 각성자 레벨 대비 10레벨에 해당하는 초급자용 카오스 터미널이다. 너희 레벨 대에서는 정말 좋은 기회가 되겠지. 그러니 다들 열심히 하도록! 이런 기회는 절대 흔치 않아."
쿵-
황정국의 말이 끝난 순간, 백유현의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K-782.
‘이...이거야? 조셉? 이걸 말한 거였어?’
조셉이 왜 팀 대항전에서 우승하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대항전에 나갈 수 있는 세 명에 들어가야 했는지도.
팀 대항전에서 우승을 해야 명부의 임무가 걸려 있는 K-782 카오스 터미널에 갈 수 있게 된다.
백유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절대 놓치지 않아!’
전에 없을 기회!
백유현은 이 기회를 꽉 잡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