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음 상대는
정적을 깬 것은 의외로 장준식이 아니었다.
파앗-
손에 훈련용 나무망치를 든 백유현이 오히려 저돌적으로 장준식에게 파고든 것이었다.
“뭐야, 저 새끼!”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런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놀랐지만, 지금 백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잡히면 죽는다.
그건 확실하다.
근력이 장준식에 비해 확연히 밀리니까.
‘하지만 내가 너에게 앞서는 게 있어!’
순간적으로 짓쳐든 백유현을 보며 장준식도 흠칫 몸이 굳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백유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무망치를 휘둘렀다.
빠각-
“흐윽!”
‘얕았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탓일까?
백유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무망치로 놈의 정강이 쪽을 후려 쳤는데, 살짝 빗나가 놈의 정강이뼈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은 실패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웠는지 장준식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이 보였다.
‘너와 나의 순발력 차이는 3. 이것으로 널 이길 거다. 장준식!’
사실 압도할 만큼 엄청난 차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차이도 절대 아니었다.
백유현이 마음을 먹고 피한다면, 열 번 중 일곱 번 정도는 무조건 피해낼 수 있다.
그 일곱 번 안에서 백유현은 장준식을 끝낼 생각이었다.
까딱 잘못해서 놈에게 잡히면 끝이다.
“이 새끼가...!”
장준식이 두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깔보고 있었던 백유현에게 공격을 허용한 것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그를 보며 숨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흥분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장준식이 거대해보였지만, 백유현 역시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에 일진들에게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그 때와는.
‘절대...다시는 너희들에게 짓밟히지 않아!’
순간 장준식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놈 역시 내로라하던 유도선수였는지라 거구 치고는 꽤 빨랐다.
그 때 백유현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장준식은 손을 뻗어 백유현의 왼쪽 어깨를 틀어잡고 오른쪽 다리를 크게 걸어 균형을 무너뜨리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았다]
‘이건!’
스포일러!
마치 미래의 일을 알려주듯, 그 문구는 빠르게 백유현의 눈앞을 스쳤고 놀랍게도 백유현은 그 단어 하나, 하나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왼쪽이다!’
백유현은 급히 몸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장준식의 커다란 손이 허공을 쓸 듯 부웅- 소리를 내며 백유현의 왼쪽 어깨를 잡아왔다.
치잇-
하지만 백유현이 몸을 틀어 피하는 바람에 간발의 차이로 장준식의 두꺼운 손가락이 백유현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였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그에 채 대응할 수가 없었던 탓에, 아래에서 쓸어오는 장준식의 다리를 피해지 못한 것이었다.
빠각-
“크흑!”
콰당탕!
장준식의 단단한 기둥 같은 다리가 그대로 백유현의 다리를 휩쓸었고, 백유현은 그 자리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장준식은 틈을 주지 않고 넘어진 백유현을 향해 덮쳐들었다.
백유현은 오른쪽으로 굴러 피하려다 말고 움찔했다.
갑자기 그의 뇌리 속에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백유현이 오른쪽으로 재빨리 굴러 공격을 피했지만, 장준식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왼손을 뻗어 그를 잡아챘다]
‘내가 오른쪽으로 구를 것을 예상하고 있어!’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백유현은 바로 왼쪽으로 몸을 던져 굴렀다.
이번에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파앗-
그와 동시에 장준식의 왼손이 허공을 갈랐다.
역시나 백유현이 오른쪽으로 굴렀다면 바로 잡혔을 상황이었다.
‘후우!’
백유현은 몸을 돌려 일어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광경을 미리 보지 못했더라면 엄청난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순발력이 3이 차이 난다고는 하지만, 역시 백유현은 실전의 경험이 많이 없어 장준식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장준식은 백유현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으로 구를 것까지 계산하고 치밀하게 왼손을 뻗어 백유현을 낚아채려 했을 정도로 싸움의 달인이었다.
조명재의 똘마니라 생각해서 실력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오산이었다.
녀석들도 기본적으로 베타 프로젝트의 팀원.
낙하산이든 뭐든, 그래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기에 들어온 것이다.
조셉의 스포일러가 아니었다면 아마 머리가 깨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 현재의 상황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백유현이 큰 위기를 피하는 것을 본 윤세연이 웃었다.
“제법인데? 백유현, 이겨라!”
“시끄러, 입 닥쳐! 너도 죽여 버리기 전에!”
얼굴이 벌개진 장준식이 씩씩거렸다.
그는 지금 너무 화가 나 있었다.
이해가 안 갔다.
놈은 분명 오른쪽으로 구르려 했고, 그래서 자신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놈이 방향을 틀어 버렸다.
‘싯팔! 이번엔 반드시 잡는다!’
오랜 유도선수 생활을 하면서 장준식도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게 되었고, 상황도 꽤 빠르게 파악할 줄 알았다.
그의 호흡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모든 신경이 백유현에게 집중되었다.
놈에게 맞은 정강이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그는 이가 부서져라 악물며 참았다.
“으야아앗!”
그리고 거구의 그가 움직였다.
파앗-
순간 그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나갔다.
마치 서 있는 백유현의 옷깃을 잡아나가려는 듯한 모습!
백유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했다.
[뒤로 빠져나가는 백유현이었지만, 갑작스레 오른쪽으로 휘도는 장준식이었다. 그가 자랑하는 천지 뒤집기의 준비동작에 백유현은 전혀 대응을 못하고 그에게 옷깃이 잡혀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참하게 꽂혔다]
‘빌어먹을!’
뒤로 가선 안 된다.
이건 그냥 옷깃을 잡으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아마 장준식은 이를 갈고 손을 뻗은 것이고, 그 뒤에는 분명 뭔가 숨겨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놈의 기술인 천지 뒤집기가 뭔지를 모르겠다는 것.
‘어떻게 해야 돼!’
잠시 멈칫하던 백유현은 바로 대응법을 찾아냈다.
파앗-
그 역시 앞으로 내달리며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장준식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쳤던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교관 김수성이 입을 떡 벌렸다.
‘맞불! 아니, 저 자식 저런 상황에서 맞불을 놓는다고?’
그런데 김수성이 생각해도 지금 백유현이 할 수 있는 것은 맞불 밖에 답이 없다.
장준식의 유도 기술은 정말 무시무시했으니까.
전국구 유도선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놈이다.
아마 백유현이 다른 행동을 했다면 분명 장준식에게 잡혀서 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백유현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보였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생각.
하지만 오히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장준식 또한 그를 예상하지 못했다.
콰직!
놈의 두꺼운 손이 백유현의 옷깃을 그러잡은 것과,
빠악-
백유현의 나무망치가 놈의 머리통을 강타하고 지나간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콰당탕!
장준식의 무식한 힘에 백유현은 거침없이 내던져져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데미지는 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장준식의 손에서 힘이 빠진 탓이었다.
“어윽!”
백유현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머리가 터져 피가 줄줄 흐르는 장준식은 그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홱 뒤로 돌았다.
그의 두 눈은 온통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이 시팔 새끼...!”
장준식이 이를 부득 갈며 백유현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멈춰.”
누군가 그를 멈춰 세웠다.
펄펄 뛰던 장준식이 그 말 한 마디에 흠칫 몸을 떨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명재야...”
조명재였다.
“아예 병신 되고 싶냐? 넌 빠져.”
“명재야! 그게 무슨!”
장준식이 벌건 얼굴로 항변하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조명재가 그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준식을 노려보더니 경멸 섞인 표정으로 내뱉었다.
“새끼, 그러니까 저런 새끼한테도 지지.”
“내가 진 건 아니잖아...”
“이미 넌 치명타를 입었어. 나무망치였으니 망정이지, 애초부터 저 자식이 들고 있는 게 쇠망치였다면? 넌 처음부터 정강이 한쪽이 박살난 채로 시작했을 거다. 그리고 지금은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이 났겠지. 그 뒤? 저 자식이 너한테 졌을 거 같아? 아까부터 못 느꼈어? 저 놈은 네 움직임 하나, 하나 다 읽고 있다고.”
“으음...”
장준식은 불만이 어린 표정을 짓긴 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자신의 필살기나 다름없는 천지뒤집기까지 간파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카운터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빠져. 어차피 저 자식...다음엔 나랑 붙는다. 내가 갚아 줄 테니 빠져 있어.”
맞다.
다음 백유현의 상대는 조명재다.
장준식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대신 저 새끼 완전 박살 내줘.”
“걱정 마라.”
조명재가 흘끗 백유현 쪽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백유현은 그 살벌한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두근, 두근.
아직도 심장이 뛰었다.
‘내가 이겼어...!’
그랬다.
이겼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악을 쓰고 덤벼들었어도 절대 상대가 되지 않았을 상대에게 그가 이긴 것이다.
그 이면에는 조셉의 권능이 컸다.
스포일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백유현이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할 수 있게 지원해주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미래에 대한 상황을 알려줌으로 치명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불멸자의 권능.
‘후우...!’
이게 싸움이구나.
이래서 전사들은 전쟁터를 잊지 못하는구나.
이 가슴 터져나갈 듯한 짜릿함에, 두 손 가득한 희열에, 멈출 수 없는 심장의 박동에...
몸이 짜릿하다 못해 쥐어 터질 듯한 이 소름끼치는 느낌에!
‘즐겁다...!’
백유현은 그것을 또 한 번 느꼈다.
귀신 개와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도, 지옥견과 싸웠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 희열이 컸다.
아마도 자신이 이제까지 도저히 넘지 못했던 그런 벽을 넘었기 때문일까?
다음 벽이 조명재였지만 백유현은 이미 그것에 두렵다거나, 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싸우고 싶어! 저 자식이랑 싸워서...’
백유현은 조명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기고 싶어.’
불가능하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백유현의 가슴 속에서 뛰는 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상대를 원하고 있었고, 그 상대를 꺾은 뒤의 흥분과 희열에 목말라 있었다.
“오호, 아주 즐거워 보이는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 앞에 조셉이 나타났다.
백유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셉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쉿! 사람들 많으니, 조용히. 생각만 해도 됩니다. 아, 그건 그렇고 제 서비스는 좀 어떠셨는지?”
“매우 도움이 되었네요.”
“후후, 당연하지요. 그건 이 몸, 조셉이 자랑하는 최고의 기술인 '미래를 쓰는 자' 의 스포일러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자주 보여드리기에는 제가 좀 힘들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하하!"
그리고 조셉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위기에 처하면 뭐, 어쩔 수 없지요. 당신이 죽어 버리면 제가 정말 난처해지거든요. 뭐, 미래의 당신에게 받은 것도 있고 하니...정말 위급시에만 제가 조금 도와드리도록 하죠. 나중에 당신이 불멸자의 룬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면...그걸 제게 대가로 주신다면, 항상 발동시키는 것도 가능해지긴 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니까요."
백유현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쓰는 자'의 스포일러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지만, 조셉이 힘들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아쉽지만 알겠어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백유현이 다시 조셉을 바라보았다.
“꼭 팀 대항전에서 우승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거, 염라를 당신 것으로 만드는데 아주아주 중요하거든요. 뭐, 그래서 오늘 조금 도와드린 것이기도 하고요."
“우승...을 하라고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승을 해라...
조셉이 싱긋 웃었다.
“자, 전 할 말 다 했으니 여기까지. 앞으로도 조셉의 서비스는 계속되니 마음껏 즐겨 주시고!”
파앗-
말을 마친 조셉이 사라졌다.
백유현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뭔가 묘했다.
‘팀 대항전에서 우승을 해야...염라와 계약을 할 수 있다?’
염라의 힘이 있어야 엄마를 살릴 수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염라는 1티어의 불멸자, 그것도 최상위에 속한 불멸자다.
각성자로서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조건 중 하나가 이번 팀 대항전에서의 우승이라니.
다음 상대가 조명재라는 것을 알면서 조셉은 그렇게 말을 했다.
팀 대항전에 나가는 것은 단 세 명.
백유현이 그 세 명 안에 포함되려면 반드시 조명재를 이겨야 한다.
그런데 조셉은 매우 묘한 말을 했다.
마치 백유현이 조명재를 이기고 올라갈 것처럼.
그래서 팀 대항전에 나갈 세 명 중에 포함될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하던 백유현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셉이 무슨 말을 했건, 일단 지금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래. 최선을 다하자.'
상대가 조명재라고는 하지만, 무력하게 지고는 싶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