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곳은 정글이다
“허! 참.”
사내가 백유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미련한 놈이 또 있었군. 그 녀석이 마지막인줄 알았더니.”
강서현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잖아요. 그 녀석도.”
사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니 문제야. 아무튼 좋다. 어차피 상부의 명령이기도 하니 베타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단은 받아들이지. 하지만 기억해라. 짐이 된다고 느껴지는 순간, 넌 곧바로 제명이다.”
“네. 감사합니다.”
백유현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 녀석 데리고 들어가. 수성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네? 아, 알겠습니다! 가자, 유현아.”
강 요원과 정 요원이 백유현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강서현이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전하시네요. 황정국 선배. 어차피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애들 겁주는 거.”
황정국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겁주긴. 내가 애들을 얼마나 애정하는데. 그건 그렇고 정 부장 말 진짜야? 저 놈, 알파파나 베타파 전부 퓨어 화이트라면서?”
강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들으셨겠지만 세타파가 검출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부장님이 욕심낼 만하죠.”
황정국이 인상을 구겼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갓 각성자 인증 받은 놈을 여기다 집어넣으면 어떻게 해? 여기 있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뻔히 알면서.”
“잘 나가는 국회의원 아들, 지검장 딸...잘 나가시는 분들의 자제가 수두룩한 곳이죠.”
“세상 불공평하단 말이지. 이미 다 가진 놈들에게 더 주어지니...가끔 여기 있는 녀석들과 계약한 불멸자들 생각을 알다가도 모르겠어.”
“권력이라는 게 늘 그렇잖아요. 그래도 김현성 선배처럼 멋진 각성자도 있으니 마냥 불공평하다고 불평만 할 수도 없죠, 뭐.”
황정국이 팔짱을 끼더니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김현성 그 친구...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해야지 뭐. 대한민국 넘버원이니까. 완전 흙 수저 출신에서 인생 제대로 역전한 케이스잖아?”
“거기에다 인품도 좋죠. 겸손하기까지 하고. 얼굴도 잘 생겼지, 키도 크지...”
“너 안 바쁘냐?”
강서현의 말을 중간에 자르면서 황정국이 정색했다.
강서현이 피식 웃었다.
“어머, 질투하시긴! 선배도 멋져요. 가끔.”
“가끔? 이 녀석이!”
“호호, 저 갑니다. 우리 애들 나오네요. 아, 그리고 정국 선배. 유현이 잘 지켜봐 주세요.”
“걱정 마라. 베타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나도 책임감은 있는 사람이니까.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다.”
황정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강서현이 마음이 놓인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럼 저 가요. 가자, 우린.”
“예, 팀장님!”
강상진과 정기수가 재빠르게 강서현 뒤에 따라붙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황정국은 인상을 굳혔다.
“내가 잘 지켜본다고 달라질 거 없다는 거 알면서. 후우...쉽지 않겠군.”
각성자들의 세계가 되면서 기존 질서가 모조리 무너졌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각성자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더욱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잘 나가는 각성자들과 선을 댄 자들이 권력을 쥐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오히려 권력 질서는 과거보다 더욱 심하게 요동을 쳤던 것이었다.
국회에서는 빠르게 각성자 관리법을 입법하여 통과시켰고, 행정부에서도 각성자들에 대한 각종 규제를 신설했다.
그래서 예전보다 권력을 쥔 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강서현이 백유현을 걱정한 이유도, 황정국이 한숨을 내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베타 프로젝트 팀.
이 안은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으니까.
팀 엑스 선발을 위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짐승들의 세계.
이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김수성 요원은 백유현을 인계 받아 거대한 홀 안으로 들어섰다.
평상시에는 강당으로 쓰이는 이 홀에는 마침 쉬는 시간인지 백여 명 정도의 인원이 흩어져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명상을 하거나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스무 살 이상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도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자는 서른 둘.
뒤늦게 각성이 이뤄진 케이스였다.
그리고 가장 어린 각성자는 중학교 2학년.
그것도 두 명이었다.
“어? 신입이다!”
그 중 하나가 백유현을 가리키며 외쳤다.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소년이었다.
녀석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진성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 헤, 진짜네?”
그리고 진성우 앞에 있던 검은 머리의 소녀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백유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둘의 얼굴이 매우 흡사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여자 아이의 명찰 적힌 이름은 ‘진성연’.
즉, 둘은 쌍둥이였던 것이었다.
둘이 같은 시기에 각성했고, 성격이 전혀 다른 불멸자를 받아들였다.
그게 벌써 삼년 전, 하지만 대한민국의 루시라 불릴 정도로 둘의 성장속도는 무시무시했고 실제로도 둘의 베타 파장은 진회색이었다.
루시보다 여섯 단계 아래의 진회색이긴 했지만, 그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 남매는 팀 엑스의 멤버로 뽑히는 것은 당연하고, 그 중에서도 주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뭐야? 저 새낀?”
그런데 한 쪽에서 모여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한 무리의 고등학생 무리가 백유현을 고깝게 쳐다보았다.
대략 열다섯 명의 인원.
그 중 하나가 백유현을 보며 재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아, 시펄, 경쟁자가 늘었잖아?”
“아씨, 우리 꼰대가 이번에 팀 엑스 못 들어가면 알아서 하라던데 저건 또 뭐야?”
녀석들은 거칠게 말을 주고받으며 백유현을 노려보았다.
이 안은 경쟁 사회다.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
“아니, 김수성 교관님. 더 이상 인원 안 받는다면서요? 그 자식은 뭡니까?”
그 중에서 한 녀석이 일어나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는 김수성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김수성은 녀석을 흘끗 보더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낙하산.”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니들처럼 말이야.”
“예? 지금 뭐라고요?”
“시끄러, 인마. 정재호 부장님이 직접 꽂은 애니까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마라. 평가에 문제 생기는 수가 있다.”
김수성의 말에 고등학생들은 표정을 와락 구기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김수성은 이곳의 교관이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평가만 나빠진다.
하지만 오히려 김수성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그들은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아, 저 새끼 꼰대가 대통령이라도 돼? 시팔, 여기 들어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여튼 저 새끼 때문에 경쟁만 더 치열해졌네! 아 진짜 개 같네.”
놈들은 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면서 욕을 내뱉었다.
“저 새끼 꼰대가 대통령도 아니고 어차피 저 녀석 때문에 니들 경쟁이 치열해질 리도 없으니 걱정 마라.”
순간 녀석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 팀장님...그게 아니고...저희 말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자, 황정국 팀장이 서 있었다.
“저 녀석은 애초에 바닥에서 노는 놈들하고는 레벨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니 니들이 괜히 긴장하고 그러진 마. 아주 옆에서 보면 가관이거든.”
“팀장님, 말씀을 너무 서운하게 하십니다. 그래도 저희도 여기 팀원인데...”
“그래, 팀원인 거 잘 알면 실내에선 금연해야 된다는 규정도 지켜야 되는 거 잘 알겠네? 다들 벌점 2점씩이다. 그리고 오늘 강당 청소는 너희들이 한다.”
“예...”
녀석들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냥 교관도 아니고 팀장이다.
감히 황정국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녀석은 없었다.
단 한 명만 빼고.
“그럼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실력으로 떨어뜨리면 되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고등학생들의 중심에 앉아 있던 키가 큰 녀석이 눈을 들어 황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황정국은 그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국내 최대 기업인 대한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
그리고 오너 일가(一家)의 유일한 각성자.
권력자들을 좌지우지한다는 대한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인 그 녀석은 황정국으로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였다.
“뭐, 그럴 수 있으면 그래보던가. 조명재.”
황정국의 말에 조명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황정국에 대한 조소와 싸늘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꼭 그래야겠네요. 제 친구들이 저 새끼 때문에 기분이 나빠 있는 걸 보니 저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황정국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맞다.
놈은 놈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진성연, 진성우 남매와 비견될 정도의 잠재력과 실력을 가진 놈이었으니까.
다섯 명을 뽑는 팀 엑스 대회 선발에, 이 셋은 무조건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놈의 각성자 레벨은 5레벨.
물론 여기서도 황태자 노릇을 하고 있다.
고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 각성자들도 조명재를 매우 어려워하는 분위기였다.
평가 또한 매우 좋다.
모든 분야에서 A를 놓친 적이 없고, 그 기록은 교관들마저도 감탄할 정도.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태도.
놈의 두 눈빛에는 늘 살기가 감돌고 있었고, 태도는 황태자로 자란 것을 티내는 지 안하무인이다.
그리고 누가 자신보다 더욱 주목받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뭐하냐? 실내 금연인데.”
조명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담배를 피고 있던 녀석들을 보며 툭 내뱉었다.
황정국의 말에는 대들던 녀석들이 조명재의 말에는 금세 기세가 죽었다.
“어? 어, 그래야지! 끄려고 그랬어!”
녀석들이 허둥지둥 담배를 끄는 것을 보며 조명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강당 앞쪽에 마련된 단상으로 향하는 백유현을 쳐다보았다.
‘...!’
그런데 백유현을 바라보던 녀석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을 알아차린 황정국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이 자식 봐라?’
벌써 먹잇감으로 점찍은 것인가?
놈의 미소에서 불길함을 느낀 황정국이었다.
놈이 찍은 먹잇감은 반드시 도태된다.
이제까지 늘 그래왔다.
하지만 이곳은 강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정글.
그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황정국은 강당 앞의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백유현이 서 있었다.
황정국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강당으로 돌렸다.
“모두 주목.”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 오늘 부로 마지막 신입이 들어왔다. 벌써 베타 프로젝트 팀이 가동된 지 보름이 지났지만 특별한 사연에 의해 들어온 거니 이해 바란다. 자, 신입 앞으로.”
백유현이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백유현이라고 합니다.”
강당 안의 모든 각성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거기에서는 선의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의(敵意).
백유현에게 그들 대부분은 적의를 품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백유현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건 이미 익숙하니까.
그는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박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