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순백색의 베타파
노블레스 멤버스 한국지부 앞에 도착한 백유현은 딱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크다!’
크다.
단순히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뿐만 아니라, 면적 또한 컸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방주(方舟)가 놓여 있는 듯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노블레스 멤버스 한국지부 앞에서 백유현은 잠시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각성자라는 선택받은 자들의 위상이 다시 한 번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건물 입구부터 수준 높은 각종 보안 장치와 경호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무장한 경비원 둘이 백유현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어깨에 걸려 있는 기관단총은 이곳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설 경호원들인데도 불구하고 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에서도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살벌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두 사람 앞에서 백유현은 대답했다.
“각성자 인증을 받고 싶습니다.”
백유현의 말에 경비원이 바로 어디론가 무전을 날렸다.
“도어키퍼, 코드 1 상황입니다. 반복합니다. 코드 1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유현을 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장을 입은 두 명의 사내와, 역시 정장치마 차림의 여성 한명이 입구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희가 상황 통제하겠습니다.”
경비원들은 그들에게 경례를 하고는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키가 크고 멀끔하게 잘생긴 사내 중 한 명이 백유현을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아, 네.”
다르다.
뭔가 달라도 달랐다.
백유현도 긴장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하나의 문 앞에 도착했다.
그 문에는 ‘CUBE' 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백유현이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수많은 방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백유현은 그 중에서 ‘1105’ 라는 숫자가 적힌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하나의 큰 테이블과 각종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거기 앉으면 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유현을 향해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내들은 그녀의 뒤쪽에 자리 잡고 섰다.
“예...”
백유현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긴장하는 모습이 귀엽네. 안 그래? 강 요원?”
사내 중 하나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팀장님, 공과 사는 구분하시는 것이...”
“어휴, 됐어.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자, 귀여운 우리 친구. 각성자 인증을 받으러 왔다고?”
백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반가워. 나는 각성자 인증 총괄 본부의 강서현 팀장이야.”
“네, 반갑습니다.”
백유현은 명함을 받아들었다.
각성자 인증 총괄 본부.
그 아래에는 강서현이라는 이름과 함께 '노블레스 멤버스 no. 47,327'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블레스 멤버스의 멤버, 즉 각성자로 47,327번째로 인증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명함이야말로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꿈의 물건.
하지만 손에 넣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자, 우리 친구...그럼 일단 인증 절차를 시작해볼까? 아, 너무 겁먹지는 마. 그렇게 어렵지는 않으니까. 정말로 ‘각성’ 했다면 말이야.”
유독 ‘각성’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강서현이었다.
백유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서현이 박수를 한 번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일단 파동 스캔부터 시작하자고! 강 요원, 정 요원!”
“예, 팀장님. 생체 에너지 파동 스캐너 준비해두었습니다.”
강서현이 백유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자, 갈까? 이리로.”
“예.”
백유현은 한쪽에 마련된 거대한 스캐너 앞으로 가서 섰다.
스캐너는 벽을 향해 설치가 되어 있었고, 그와 마주한 벽에는 검은 색의 천이 펼쳐져 있었다.
보통 병원에서 쓰는 MRI 기계와 비슷한 크기의 기계였는데, 그 곳에서는 작게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그냥 서 있어. 몸에 힘 풀고.”
그런데 MRI 촬영과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백유현은 그녀의 말대로 그냥 서 있었다.
위잉- 찰칵-
위잉- 찰칵-
그러자 기계가 스스로 움직이며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계와 연결된 모니터를 바라보던 강서현과 두 사내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그리고 모든 촬영이 끝나자 강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거?”
“기계 이상이 아닐까요?”
“아니, 오늘 점검 날이어서 고장은 안 났을 텐데?”
강서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백유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가 잘못됐나?’
마치 건강검진을 받을 때처럼 백유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검진 결과를 보며 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지금 백유현은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방 바꾸자.”
“예? 아, 알겠습니다.”
강서현의 말에 두 사내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 이리로.”
백유현도 두 사내 중 강 요원의 손에 이끌려 옆방으로 향했다.
“아, 미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기계라는 게 뭐 그렇잖니? 간혹 고장도 나고 뭐...”
강서현은 백유현을 보며 웃으면서도 표정에서는 심각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 다시 스캔을 해볼까?”
“네.”
강서현의 말에 백유현은 다시 기계와 벽 사이로 가서 섰다.
위잉- 찰칵-
기계가 한 동안 움직이며 백유현을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강서현은 물론, 강 요원과 정 요원의 표정은 아예 일그러져 있었다.
우우웅-
기계가 활동을 멈추고 주변에 정적이 찾아올 때까지도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강서현이 강 요원에게 불쑥 말했다.
“강 요원, 위치로.”
“네?”
“파동 스캔 해보자고.”
“제, 제가요?”
“얼른 안 가?”
“네!”
강서현의 싸늘한 말투에 강 요원은 황급히 기계 앞으로 가서 섰다.
한쪽으로 밀려난 백유현은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위잉-
기계가 다시 움직였고, 기계와 연결된 모니터를 확인하던 강서현은 또 다시 표정이 와락 굳어져 있었다.
“강 요원...이번 정기 검진 때 받았던 최종 스캔 결과가 어떻게 되지?”
“네, 알파파 4등급, 베타파 5등급...”
그 때 강서현이 모니터를 심각하게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기계는 이상 없네? 그럼 정말 심각해지는데?”
두 요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뭐가 잘못 되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강서현이 백유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너한테서는 세타(theta,?) 파가 안 보여. 바로 불멸자와의 계약의 증표인 그 세타파가 말이야.”
강서현이 팔짱을 끼며 잠자코 바라보더니 갑자기 백유현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검은 두 눈동자가 백유현에게 뚫어질 듯 박혔다.
“왜 너한테서는 세타파가 보이지 않는 걸까?”
파동 스캔.
즉, 신체 에너지 파동 스캔은 각성자를 판별하는 가장 기초 단계다.
특수하게 만들어진 스캐너로 인체를 찍으면 인체에서 발산되는 몇 가지 특수한 파장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의 힘을 뜻하는 알파(alpha) 파동, ‘각성’의 존재를 나타나는 베타(Beta) 파동, 그리고 불멸자와의 계약 흔적을 나타내는 세타(theta) 파동.
차후에 어떤 힘을 얻었는지에 따라 입실론 파동이니, 델타 파동이니 하는 것이 검출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차후의 얘기다.
각성자라면 일단 기본 적인 세 가지 파동이 스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알파파, 각성자의 베타파, 불멸자의 세타파.
“그렇죠...그런데 각성자의 힘을 뜻하는 베타 파동이 검출되었고...”
“사실 그게 더 문제야. 베타 파동의 등급은 2등급, 이제야 갓 각성을 했다는 것을 미뤄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등급이지만 문제는 파동의 색...이건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서현은 두 눈을 빛냈다.
그 눈빛에는 진한 의구심과 호기심이 같이 녹아들어 있었다.
거기에다 상당한 기대심 또한.
“순백색. 이런 파동의 색은 본 적이 없어.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 어떤 보고서에도. 그 천재라고 알려진 루시조차도 진회색이었다고. 그런데 순백색이라니!”
루시.
미국의 천재적인 각성자를 가리켰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각성했지만 그 성장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베타파의 색은 불멸자의 힘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의 척도였으니까.
색깔이 어두워질수록 그 효율 또한 급속하게 낮아진다.
연구에 의하면 루시는 그녀의 계약자인 방황하는 자, 멀린의 힘을 최대 85 퍼센트 가량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게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그런데 백유현은 순백색이다.
단 하나의 잡티도 섞이지 않은 순백색.
그런데 문제는 백유현에게는 세타파가 검출이 되지 않았다는 점.
“이 녀석, 정체가 뭐야?”
세타파가 검출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불멸자가 백유현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계약자가 없다- 라는 뜻.
그런데 녀석이 각성한 것은 확실했다.
마치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라는 희대의 명언이 현실로 나타난 경우.
강서현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더니 불쑥 강 요원을 불렀다.
“강 요원.”
“네, 팀장님.”
“우리 귀여운 손님 잘 모시고 있어. 먹을 것도 좀 사 주고. 애가 비쩍 말라서 고생 좀 했겠다. 계산은 강 요원이 좀 해.”
“네. 그런데 팀장님은...?”
“나는 부장님한테 다녀올게. 이거,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강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백유현 군. 이리로.”
백유현은 영문도 모르는 채 강 요원과 정 요원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그는 강 요원과 정 요원이 자신을 흘끗거리며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백유현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눈으로 본 사실들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그들이 모르는데 백유현이 뭘 알겠는가?
그들은 곧 노블레스 멤버스 본부건물 안쪽에 위치한 식당에 도착했다.
“배고프지? 일단 여기서 팀장님 오실 때까지 뭐 좀 먹고 있자.”
“네.”
아닌 게 아니라, 백유현은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
이상하게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그랬었다.
뭔가를 강렬하게 먹고 싶은 욕구가 치밀고 있는 차에 잘 됐다.
“저...많이 먹어도 되나요?”
강 요원이 피식 웃었다.
이 조그만 녀석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는가?
가슴까지 내밀며 대답하는 그의 표정에는 여유로움까지 떠올라 있었다.
“먹고 싶은 만큼. 뭐, 제일 비싼 걸로 먹어도 돼.”
백유현은 싱긋 웃어보이고는 한쪽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강 요원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녀석의 많이 먹어도 되냐는 질문의 뜻을 이해한 것이다.
백유현은 그날 정말이지 배가 터질 정도로 음식을 먹고, 또 먹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이렇게 행복한 날이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날, 강요원은 블랙 카드를 내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