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105화 (1,105/1,108)

1105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10)

검은 천이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갔다.

감찰원 밀실 유리창을 검은 천으로 가린 이유는 황궁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오죽이 두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것은 하늘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검은 천을 얼마나 오랫동안 오죽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걸까? 아마 수 백 년, 수천 년, 수만 년이 흐르도록 단 하루도 벗겨지지 않았을 거였다.

오늘 검은 천이 벗겨지자…… 무지개가 펼쳐졌다.

무지개가 오죽의 수려한 미간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깨끗한 두 미간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무지개가 순식간에 황궁 안 광장을 비추고 옅은 황색 형체를 관통했다.

무지개가 경제의 몸을 관통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비췄다. 이후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충격에 태극전에 전해지더니 화염이 순식간에 궁정을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제 폐하가 침착한 얼굴로 화염 속에서 의연하게 일어났다. 단 한 손에 의지해 일어난 그의 머릿속에 죽음을 앞두고 달갑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

‘원래 이런 거였군, 어쨌거나 이런 거였어. 어차피 이럴 것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강한 모습을 남기려 했다. 온화한 무지개 속에서 황제의 뒷모습은 더없이 냉혹하고 과묵하고 적막하고 외로워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없이…… 거만해 보였다.

하늘에서 검은 재가 서서히 떨어지더니 인간 세상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 황궁 안 광장에 고인 피를 덮었다.

이와 동시에 계속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황궁 벽 너머 동쪽 하늘에서 무지개가 생겨났다. 비가 갠 뒤 나타난 무지개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밤이 되자 태극전을 삼킨 불길이 잡혔다. 비가 많이 내려 땅이 젖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길이 경국 황궁 전체를 태워버렸을 거였다.

닫힌 황성 정문에 기이한 무지개가 출현하고 얼마 뒤 조정 군대가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모두가 알 정도로 큰일이 일어난 탓에 황제 폐하가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은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을 더욱 비통하게 하고 분노하게 했던 건 아무리 수색해도 황제 폐하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는 거였다.

황제 폐하를 죽인 건 북제 자객이 아니라 경국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저지른 반역자 범한이었다. 조정이 맨 처음 이 소식을 확인한 뒤 호 태학사와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진 섭중이 경도 사람들의 분노를 억누르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늘 밤 범씨 집안과 국공 골목에 있는 많은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을 거였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거였다.

물론 호 대학사와 섭중의 힘만으로 상황을 통제한 건 아니었다. 경도가 혼란에 휩싸이지 않았던 건 곧바로 용상에 오른 3 황자 이승평의 강력한 통치력 덕분이었다. 새로운 경국 황제 폐하의 강력한 통제 덕분에 경도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은밀하게 감찰원과 숨겨진 어떤 세력이 어떤 역할을 발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조정은 다시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높은 포상금을 걸며 범한을 지명수배했다. 하지만 범한은 절대 대다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범한은 여전히 황궁 안에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 숨어서 태극전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고 냉궁보다도 조용한 작은 전각 쪽으로 걸어갔다. 태극전은 이미 불타 무너졌고, 작은 전각도 이전에 불에 타 재만 남은 상태였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까지 자란 풀들 속을 걸어갔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섭경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은 걸까?

걸어가던 범한의 동공이 수축했다. 작은 전각이 있었던 자리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한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범한이 발견한 사람은 요 태감이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범한 앞으로 걸어와서는 작은 상자를 건네주고는 쉰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건 폐하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범한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상자를 받고는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요 태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범한은 요 태감이 고수들을 불러 자신을 포위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궁 밖에는 밖의 세상이 있었고, 궁 안에는 궁 안의 세상이 있었다. 궁 안의 세상에 사람 중에서 지금 그를 공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였고, 설사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에 공격할 수는 없었다.

‘폐하가 나에게 뭘 남기신 거지? 왜 남기신 거지? 설마 폐하께서는 자신이 오늘 죽으리라는 걸 사전에 알고 계셨던 건가?’

범한이 멍하니 손안에 들린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요 태감이 황제 폐하 곁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요 태감은 황제 폐하가 맡긴 임무를 실행하기 위해서 나타나지 않았던 거였다.

작은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흰 천과 얇은 편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안을 본 순간 범한이 움찔하더니 단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알아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흰 천은 그가 열쇠를 찾으려 처음 황궁 안에 침입했을 때 황태후의 침대 아래 비밀 공간에서 보았던 물건들이었다. 비밀 공간에는 그가 복제해서 상자를 여는 데 사용한 열쇠와 함께 흰 천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4년 전 장 공주가 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범한은 다시 한번 함광전에 들어가 두 물건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황제 폐하가 그 물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후 범한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황제 폐하는 이 편지와 흰 천을 범한에게 준 거였다.

범한이 손가락 끝으로 하얀 비단 천의 부드러운 표면을 쓰다듬은 뒤 봉인되어 있지 않은 평지를 펼쳤다. 안의 내용을 꼼꼼히 읽는 범한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더니 이후 풀어졌다.

편지는 섭경미가 경제에게 쓴 편이었다. 안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 범한은 비로소 흰 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과거 황태후가 요녀 섭경미에게 자결할 용도로 사용하라고 준 천이었다. 하지만…… 섭경미는 태평 별궁에서 교지를 받은 뒤 흰 천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황궁 황태후 침대 앞에 두었다.

‘천을 전달하는 임무는 오죽 아저씨가 맡았겠지. 황태후가 천을 보고 경악을 했을 텐데. 그래서 줄곧 이 천을 보관하면서 요녀 섭경미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던 걸까?’

편지에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 일에 대해 말하며 자신의 강렬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 외에 섭경미의 편지에서는 다른 의미 있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편지에는 오죽이 어쨌다거나 범건이 기생집에서 뭘 했다거나 하는 평범한 일상에 관한 내용들이 딱딱하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편지는 총 얇은 종이 두 장이었다. 편지를 전부 읽은 범한은 더욱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 아버지는 어째서 이 편지를 마지막까지 소중히 간직해 왔다가 자신에게 준 것일까? 설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흰 천과 열쇠와 편지를 함광전에 숨긴 사람이 황태후가 아니라 황제 폐하인 걸까?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한은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마지막 장 아래 쓰인 글씨에 주의를 기울였다.

힘이 있으면서 감정을 필획에 가지런한 획순을 보니 황제 폐하가 쓴 것이 분명했다.

범한이 글씨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가 편지를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편지지를 다시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에 넣은 뒤 품속에 넣었다.

“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것이 경제가 편지지 아래에 쓴 말이었다. 보기에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선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여인을 향해 선언처럼 남긴 이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설사 근거를 가진 역사책이라 할지라도 황제 폐하의 공적과 과실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섭경미의 사건과 진평평의 사건으로 인해서 범한은 황제 폐하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지만, 황제 아버지와 그의 관계를 단순히 혈연관계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 세상과 다른 영혼을 가진 범한은 혈연관계에 구속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과거의 추억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범한의 마음은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황제 폐하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범한은 지금까지도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은 듯해서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범한은 항상 황제 폐하가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인 만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황제 폐하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범한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지만, 복수를 이룬 뒤 쾌감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약간 슬펐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나무 인형처럼 우두커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왕도란 없었다. 편지를 미리 자신에게 전해줄 준비한 것을 보면 황제 아버지의 몸은 지난 1년 동안 상당히 많이 나빠져 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섭경미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 역시 진정한 왕도는 아니었고…… 범한과 그가 고집했던 신념은 더더욱 아니었다.

눈이 내리던 밤에 범한이 황제 폐하에게 말하고 싶었던 말은, 요구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사사로운 원한을 끝내는 것일 뿐이었다.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인류는 옳을 걸 추구하는 종도 아니었고, 옳다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의는 항상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범한은 순간 정왕야가 섭경미의 서신을 숨기고 있던 게 떠올랐다. 섭경미가 황제 폐하에게 보냈던 서신에는 천하에 대해서 민생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었다. 오늘처럼 자질구레한 일상에 관해 이야기한 편지는 한 통 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황제 폐하는 이 편지를 유독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지어졌다. 황제 폐하와 섭경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두 사람은 서로 만난 건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황제 폐하가 섭경미라는 여자를 만난 게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섭경미가 경제를 만난 건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픈 일임이 틀림없었다.

범한은 어둠이 짙게 깔린 황궁 안 잡초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작은 전각이 있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섭경미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아버지 범건이 당시에 한 말이 오늘에야 이해가 되면서 위로가 되었다. 작은 전각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 황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이미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렸고, 황제 폐하도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천지 사이 어느 구석에 서로 다시 만나지 않았을까?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범한이 어둠 속에 숨어 황궁을 나가기 위해 태극전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 황궁에 걸린 등불들이 보였다. 어서방 안에서는 풋풋한 목소리와 비통함에 겨운 대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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