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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04화 (1,104/1,108)

1104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9)

지금까지의 상황은 황제가 자신이 가장 총애한 신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자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아낀 아들을 죽이려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누구도 상황이 갑자기 변해서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가 혼자서 모든 적을 상대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황제 폐하는 담담한 눈빛으로 범한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황제 폐하는 아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강렬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그런 걸까? 황제가 범한을 죽이고 싶어 한 이유는 아들의 배신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지 경국에 천추만대에 길이 남을 위업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맥이 모두 망가진 대종사이자 가장 무정한 황제인 그도 실망에 분노하고 배신에 흔들리는 일반 사람일 뿐이었다.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황제 폐하는 자신이 이렇게 죽게 된다면 저승에서 무척이나 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저승에 간 승건, 승택이는 짐을 싫어할 텐데. 황후 등 가족들도 모두 차가운 눈빛으로 짐을 노려보겠지. 어마마마께서는 저승에서 잘 지내고 계시려나? 그 여인은 저승에서도 여전히 온화한 모습일까? 아마 내가 앞에 나타나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겠지?’

짙은 외로움이 노쇠한 황제 폐하의 몸을 덮쳤다. 멍하니 눈동자를 굴려 주변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인생의 마지막 싸움에서 자신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총과 그녀를 따르던 종과 그녀와…… 자신 사이에 난 아들을 적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발버둥을 치고 발악하며 살아왔지만, 그는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녀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황제 폐하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짐은 결국에는 그녀의 손에 패배할 운명이었던 건가?’

* * *

옅은 황색의 형체가 꿈틀거리더니 손을 뻗어 범약약의 손에 들린 저격총을 덥석 쥐고는 손마디에 살짝 힘을 주었다. 황제 폐하의 체내에 있는 패도의 정기가 강물처럼 흘러나오자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총열이 구부러졌다.

정기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황제 폐하의 몸에 난 상처가 더욱 심해졌지만,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여자를 바라보는 것마냥 땅에 던져진 고철 덩어리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 선생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황제 폐하가 고개를 숙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다리를 뻗은 채 범한의 다리에 기대앉아 있는 오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 선생은 많은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일어날 일은 결국에는 일어나게 되어 있는 법이지. 오 선생이 언젠가는 그 당시 발생한 일들을 떠올리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짐을 죽이고 싶어할 테니까.”

안색이 창백한 황제 폐하가 아이처럼 아무 말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죽을 바라보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일어나지 못하는 오죽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 선생은 또 과거를 잊어버렸군. 정말…… 행복하겠어.”

항상 강인하고 과묵하던 인물이 말을 많이 한다는 건 그가 정말 늙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니면 죽기 직전 일순간 정신이 말아져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걸까? 한쪽 팔이 잘린 황제 아버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범한은 순간 가슴 한쪽 귀퉁이가 허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인지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현실 같지 않았다.

황제가 생기가 점점 옅어지는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네 놈이 아니라 네 어머니가 이긴 거다.”

자조 섞인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는 황제는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동안 천하에서 가장 강한 군왕이었던 점과 걸맞게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북쪽에 있는 전씨 황제도 네 사람이고…… 셋째도 네 사람이지. 네 놈은 셋째가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그러니 앞으로 네 놈이 뭔 짓을 하든 앞으로 천하는 이씨 천하가 될 것이다.”

“네놈이 이전에 네놈이 죽으면 홍수가 넘쳐 하늘까지 닿을 거라 말했다지. 하지만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범한을 바라보며 말하는 황제의 입가에 웃음이 갈수록 짙어졌고 비웃는 말투도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네 어미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 했을 뿐인데, 네 놈은 경거망동하게도 역사의 흐름을 막으려 했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천진난만한 생각이란 말이냐.”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사실 폐하나 소신이나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잠깐 일었다 사라지는 물보라일 뿐입니다.”

“아니다. 짐이 한 일들은 반드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황제의 눈동자에서 순간 냉혹하면서 거만한 눈빛이 번쩍였다.

범한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에야 자신이 아직도 황제 아버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범한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황제 아버지는 그가 지금까지 말과 해온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심지어 북제에 있는 홍두반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리고 범한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누이가 황제 폐하의 손에 있는 데다가 자신이 지금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황제 폐하의 약해진 모습이 거짓인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은 죽음을 앞두면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도 그를 주저하게 했다.

황제 아버지에 대해서 범한은 선천적으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범한은 궁 밖에 있는 금군이 자신이 사전에 마련해둔 조치를 돌파하고 다시 궁문을 열고 안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그림자와 섭중 쪽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요 태감을 비롯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은 가장 두렵게 만들었던 건 황제 폐하가 죽기 직전에 반격을 가해 오죽 아저씨와 누이, 자신을 저승에 함께 갈 동반자로 삼으려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범한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황제 아버지에게 그런 힘이 남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 * *

황제 폐하가 힘들게 고개를 들고는 눈을 찌푸리며 황궁 벽 너머 동쪽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쪽에 있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황제 폐하가 무언가 생각이 난 표정을 지으며 눈가 주름을 지었다. 그가 용포 밖으로 오른손을 내밀고 무언가를 잡으려는 했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시선에 한 곳으로 고정된 채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화면이 스쳐 지나가는 듯 무언가를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경제 자신보다 더 그의 몸 상태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눈이 내렸던 정월 초파일 날부터 그는 언젠가는 오늘이 오리라는 걸 예견했을 거였다. 이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난 숙명이었다. 이미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경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쾌하고 불만스러웠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비가 내린 뒤 맑게 갠 하늘을 향해서 끊임없이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소년 시절 몰락한 왕부 안에서 굴욕을 참으며 성장한 뒤 청년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쌓았고, 장년 시절에는 말에 올라 병사들을 이끌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 천하를 누볐다. 검을 쥐고 천추만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끝을 맺지 못한 채 중단되어야 하니 어찌 불쾌하지 않겠는가? 짐은 아직 이루지 못한 게 너무 많은데…….’

만약 경제가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섭경미나 오죽이나 범한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면, 하늘이 자신을 버린 거지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탄식했을 거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모르기에 단지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만약 그 여자가 없었다면, 그녀를 따라 오 선생이 인간 세상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안지도 이 세상에 있지 않았겠지. 황실 금고를 비롯한 많은 것들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짐은 과연 천하를 가질 수 있었을까?’

멍하니 생각하던 경제의 눈동자에서 단호한 기색이 비쳤다.

‘아니, 짐은 할 수 있었을 거다. 늦더라도 해내고 말았을 거야. 이름 없는 무공 비결이 없으면 어떠한가? 짐에게 대적할 수 있는 대종사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게 아닌가?’

‘다만…… 만약에, 만약에 섭경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짐이 지금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황제 폐하는 자신의 생명이 다해간다는 것도 잊은 채 의문 속에 빠져 있었다. 이 문제는 작은 전각 안에서 범한이 제시했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황제 폐하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난 수십 년 동안에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 질문을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가 하늘에서 눈길을 돌리고는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군왕의 위엄과 의지가 있었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앞에 있는 범한과 오죽을 바라보았다. 마치 언제든지 생명의 마지막 힘을 이용해 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다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황제 폐하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얇은 입술이 황제 폐하를 아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은 동작까지도 아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 폐하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잠시 뒤 웃음을 거둔 황제 폐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오늘에야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알았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구나.”

황제 폐하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죽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 말했다.

“짐은 오 선생의 검은 천 뒤에 뭐가 감춰져 있는지 알고 싶다.”

* * *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왕은 마지막 공격 목표로 범한이 아니라 오죽을 선택했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범한이 그의 혈육이기 때문일 거였다. 아니면, 오죽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신묘 사자라서 죽이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경제가 줄곧 인간 세상의 일은 인간 세상 사람들이 해결해야지 개똥 같은 신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경제가 마지막 순간에 범한의 얼굴과 몸짓에서 자신과 비슷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든 경제는 범한이 아닌 오죽을 선택했다. 바로 그 선택을 한 찰나의 순간에 경제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공기를 가르고 오죽의 얼굴을 공격했다.

범한은 살아남았다. 황제 폐하의 마지막 공격을 바라보면서 그는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생명 속 마지막 정기를 담은 황제 폐하의 손이 오죽의 얼굴을 강하게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제의 손이 오죽의 목을 강하게 때리자 오죽의 얼굴이 뒤로 젖혀지면서 검은 천이 벗겨졌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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