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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03화 (1,103/1,108)

1103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8)

범한이 나무 파편을 막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왼손 손바닥과 오른손 주먹을 내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몸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온 피가 입고 있는 옷을 붉게 적셨고, 격렬하게 기심을 시작하자 입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 공격은 범한이 생명까지 걸고 한 날린 일격이었다. 게다가 나무 파편을 막기 위해 억지로 몸을 멈추는 바람에 더는 그런 신출귀몰한 속도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경맥이 거의 다 망가진 범한은 무수히 많은 작은 칼날이 몸 이곳저곳을 찌르고 베는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느꼈다.

황제 폐하의 상처는 범한보다 훨씬 심각했다. 다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 당장 이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범한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격렬한 기침을 겨우 멎은 그가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물항아리에 기대 숨을 헐떡이고 있는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순간 범한의 눈동자에서 숨기고 있던 진짜 감정이 드러났다.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멍하니 황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대설산 정산을 바라볼 때처럼 고개를 들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고, 뼈가 시릴 정도로 냉정하고 매정하며 너무나도 강해서 감히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던 황제 폐하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모습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앞에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범한이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황제 폐하의 얼굴이 언제 저렇게 노쇠하게 변한 거지?’

* * *

“폐하께서 패배하신 겁니다.”

태관 복장을 한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은 뒤 복잡한 눈빛으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범한은 사실을 말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경제는 최소한 십여 곳에 깊거나 가벼운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왼팔은 절단되었으며, 복부의 터져 있었다. 이곳 상처들에서 계속해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오죽에게 했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진짜 신이 없었다. 오죽도 신이 아니었고, 그 역시 신이 아니었다. 1년여 동안 이어진 반역, 암살을 겪으면서 계속 상처를 입은 황제 폐하는 완전히 상처를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오죽과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치르고 저격총이 쏜 총알에 맞아 팔이 잘리고, 약간이나마 경지를 돌파한 범한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서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왕도 결국에는 최후의 순간에 다다르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제 폐하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조 섞인 차가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현제 그는 세 손가락으로 궁녀의 목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궁녀의 손에는 저격총이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각혈하던 황제 폐하가 고개를 돌려 온화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범약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좋은 황제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좋은 황제가 되려면 먼저 불필요한 감정을 버려야 한다. 쓸모없는 감정에 마음이 약해지는 건 절대 안 되거든……. 약약아, 너는 마음이 약한 탓에 오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궁녀 복장을 한 범씨 집안 아가씨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미간 사이에 살짝 보이는 주름은 그녀의 마음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침착하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작년 가을부터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 들어온 범약약은 어서방에서 외로운 군왕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녀는 어서방에서 머무르면서 매일 겉옷을 어깨에 걸친 채 늦은 시간까지 등잔불 아래서 상주문을 읽는 황제 폐하의 마른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병약한 기침 소리를 들어야 했고, 수척해진 노인의 주름진 미간을 보아야 했다…….

정월 초파일, 눈보라가 쳤던 날에 적성루 위에서 총을 겨눴던 범약약은 멀리 보이는 옅은 황색의 형체가 진짜 황제 폐하일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에 조금도 떨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문틈 사이로 점점 노쇠해지는 익숙한 군왕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치명적인 부위가 아닌 황제 폐하의 팔을 겨누는 선택을 했다.

황제 폐하의 말이 맞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범약약의 마음이 약해진 거였다.

* * *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기 마련이지. 신아는 지난 1년 동안 황궁에 찾아와 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끊이지 않고 노력을 했지만, 짐은 설득되지 않았다. 약약이 네가 막돼먹은 안지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걸 짐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1년 동안 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너희들이 마음이 오히려 약해진다는 건 알지 못했던 것이냐?”

황제 폐하는 침착하고 냉담한 말투로 말을 계속할 뿐 후궁으로 보낸 궁정 태감을 부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처가 깊고 피가 계속 나오는 데도 지혈을 하거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 안에서 계속 피가 흘러 나와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조 섞인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범약약이 몸을 살짝 떨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익숙하면서도 더없이 낯선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너무나도 깊고 복잡한 관계에 있는 황제 폐하를 바라보는 범한의 눈빛은 오묘하고 복잡했다. 순간 황제 폐하의 강인한 의지와 치밀한 계략에 감탄한 범한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방금 전 위급했던 순간에 범한은 자신의 일격은 맞은 황제 폐하가 패배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한 거였다. 바로 문을 부수고 숨어 있는 저격자를 찾아내 목을 틀어쥔 거였다.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던 범한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폐하, 누이의 목숨으로 저를 위협하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짐이 위협한다면 너는 과연 견딜 수 있느냐?”

천천히 고개를 돌린 황제 폐하는 피가 자신이 입고 있는 용포를 물들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범약약을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만약 죽으면 내가 따라가마.”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 범약약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오라버니,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니! 죽음의 두려움까지 초월하다니 정말 대단한 경지가 아니더냐?”

황제가 범한의 두 눈을 노려보며 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네 어미를 많이 닮았지만, 입만큼은 나를 닮았다. 무정하고 냉혈 하기가 이를 데 없지.”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중 황제 폐하가 갑자기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짐의 이번 생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범한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뒤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왔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무정하고 냉혈한 사람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황제 폐하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말을 하자 범한은 갑자기 속에 쓴물이 올라오면서 공허한 슬픔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평상시 모습과는 다르게 매서운 목소리로 황제 폐하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됐습니다! 충분하니까 그만하시라고요!”

황제 폐하가 배은망덕하게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아들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를 못 이겨 잘생긴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 폐하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범한이 예의 없이 행동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그가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이유와 분노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황제 폐하의 미소는 범한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전부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 * *

드넓고 화려한 황궁은 텅 비어 있었다. 빗물이 고인 바닥 이곳저곳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사방에 피가 뿌려져 있었다. 모든 게 축축하고 붉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네 사람뿐이었다. 범한이 오죽 아저씨 옆에 서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옅은 황색의 형체를 차갑게 주시하고 있었다. 범한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분노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슬프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황제 폐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 폐하의 바로 옆에 범약약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감히 대종사인 황제 폐하 앞에서 모험할 수 없었다. 비록 범약약의 손에 저격총이 들려 있었고, 황제 폐하의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짐은 이번 생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눈앞에 있는 아들과 오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그저 짐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패배와 죽음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패배는 싸움에서 졌다는 걸 의미하지만, 죽음은 주어진 천명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패배한 황제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모든 황제의 죽음이 패배에 따른 결과는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경제는 오늘 자신의 주변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다고 해서 자신이 패배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 자신이 죽는 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진정한 왕도는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난폭한 정기로 인해서 줄곧 안정적인 상태에 있지 못했다. 그러던 중 1년 동안 터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난폭한 정기는 그의 몸을 망가뜨릴 통로를 찾은 듯 빠른 속도로 그의 생명을 갉아 먹었고, 노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황제 폐하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로 앞에 있는 범한을 차갑게 노려보면서 모든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는 범한이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필연적으로 정해진 결과를 얼렁뚱땅 대충 말해 위로해 주려 하지 않았다.

“짐이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반역을 저지른 네 놈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황제 폐하가 허리를 살짝 굽히고 기침을 하다가 달갑지 않아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씨 황족의 천하가 열릴 것이다. 천하통일은 이미 정해진 숙명이니 바뀔 수 없다. 네 놈만 죽으면 짐의 두 아들 중 누가 제위에 오르든 천하통일을 이룰 것이고, 앞으로의 천하는 경국의 천하가 될 것이다.”

지금 남경성에서는 참혹한 전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려 하고 있었고, 이것이 범한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범한은 신묘에서 돌아온 뒤 천하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긴 채 살았을 거였다. 그렇다면 경제는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테고, 범한이 죽지 않는다면 경국의 천년만년 이어질 위업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곧 죽을 걸 알고 있는 경제로써는 절대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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