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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102화 (1,102/1,108)

1102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7)

황제 폐하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짓더니 옷깃을 털고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태극전 돌계단 위에서 뛰어올랐다. 그러자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에서 다시 빗물이 떨어지며 공중에 무수히 많은 잔상을 남겼다.

푸른 하늘 위를 우룡(雨龍)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황궁 안에서 갑자기 ‘웅웅웅’하는 용울음 소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에 쇠막대기를 들고 힘겹게 걷고 있던 오죽이 용 울음소리에 포위당했다. 장엄하고 위엄차게 공기를 가르며 내리던 빗물이 순식간에 오죽을 향해 가장 강력한 공격을 날렸다.

절세 강자 두 명을 제외하고 현장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비의 장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용의 울음 소리가 그치더니, 잠깐 공포스럽고 소름이 끼치는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무수히 많은 소리가 연달아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서 천둥이 연속해서 울리거나 거센 바람이 순식간에 불어와 달려 있는 등을 전부 깨뜨릴 때 나는 것처럼 ‘파바박’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 * *

오죽이 결국 완전히 쓰러져 버렸다. 경제의 폭풍우처럼 빠르고 강렬하게 내리치는 왕도의 주먹을 맞고 손가락에 찔려 결국 쓰러졌다. 눈 깜짝 사이에 치명적인 공격을 여러 차례 받은 오죽은 경제의 발 앞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힘없이 앉아 있었다. 하늘을 향해 벌어져 있는 창백한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오죽이 줄곧 아무 감정 없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을 힘없이 아래로 떨구면서 경제 앞에서 쓰러지자 쇠막대기를 쥐고 있던 오른손도 함께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가 결국에는 쥐고 있던 쇠막대기를 놓았지만, 떨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쇠가 바닥에 부딪히면 나는 종처럼 맑은소리가 나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쇠막대기가 경제의 복부에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복부에 박혀 있는 쇠막대기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경제의 복부에서 나온 피가 쇠막대기를 타고 아래로 흐르더니 오죽이 창백한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경제의 피가 오죽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그려진 생명선을 따라 화려한 복숭아꽃 무늬를 만들어냈다.

* * *

황제 폐하의 얇고 마른 입술을 살짝 벌어졌다. 그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했고, 눈동자는 너무 흐릿해서 감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던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복부에 박혀 있는 쇠막대기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과 짜증을 느낀 그가 복부에 박혀 있는 쇠막대기를 뽑아내려 했다.

황제 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전에 경맥이 완전히 망가져서 몸을 쓰지 못한 채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을 때도 그는 정신만큼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죽을 마침내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제의 마음속에 살짝 거만한 기분이 들더니 순간 더없이 강렬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입속에서 녹슨 쇠 맛이 나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범한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이 황제 폐하를 실의에 빠지게 했다. 황제 폐하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아들의 마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모질고 강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강하고 모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침착함을 유지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였다.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오죽이 완전히 쓰러져 버렸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거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들이 황제 폐하는 감탄스럽고 대견하게 느껴지면서, 가장 불효막심한 아들이 자신처럼 갈수록 냉혈한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황제 폐하는 범한이 훨씬 일찍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사람을 소중이 여기는 범한이라면 오죽이 처음 쓰러졌을 때나 왼쪽 다리가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았을 때 충분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언제든지 모습을 드러낼 걸 대비해서 남몰래 대비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황제 폐하는 옅은 실망감과 불길함을 느꼈다.

‘이제야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는 건 짐이 실패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눈을 통해서 짐의 실패를 보려는 것인가?’

붉은 피가 황제 폐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고 그의 복부에서 뿜어져 나왔다. 황제 폐하는 다시 한번 한기를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낮은 평상에 깔린 따뜻한 솜이불과 어서방 안에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가 오른손으로 쇠막대기를 잡고는 보는 사람의 속이 떨릴 정도로 침착하게 뽑기 시작했다.

옛말에 칼에 찔릴 때보다 몸 안에서 빼낼 때 고통이 더 심하다고 했다. 이 말은 인생을 가리킬 때도 쓰일 수 있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쓰일 수 있었다.

황제 폐하가 천천히 쇠막대기를 뽑아내자 몇 년 동안 줄곧 그의 가면에 감추어져 있었던 어둠 속 상처가 들춰지는 것 같았다. 이미 모두 나았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들춰지자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아주 많은 사람의 얼굴과 일들이 스쳐 지나갔고, 창백한 얼굴은 통증에 더욱 하얗게 질렸다. 건강한 사람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핏기 없이 창백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 황제 폐하의 팔이 고통에 견디지 못하는 건지 이상하게 뒤틀어졌다. 순식간에 깨끗하고 적막한 공기 중에 아주 이상한 굴절이 생겨났다.

뼈와 살이 굴절되고 분리되었다. 사람의 인체 구조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기괴한 각도로 꺾어지는 게…… 오죽의 다리와 비슷했다.

푸른 하늘에 피가 흩날렸고, 뼈와 살이 경제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그의 왼팔 팔꿈치 관절 부분이 어떤 신비하고 강력한 힘에 의해서 절단되어 버린 거였다. 절단될 팔이 맑고 아름다운 햇빛을 받으며 빗물에 씻겨 먼지 한 톨 없는 공중으로 날아갔다. 절단된 부위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아주 느린 속도로 공중을 선회했고, 춤추듯이 공중에 흩날렸다…….

이후 귀를 울리는 총성이 드넓은 황궁에 울려 퍼졌다. 날카로우면서 스산한 총소리는 마치 공중에서 춤을 추며 날아가는 절단된 팔의 장단에 맞춰 울리는 슬픈 음악 소리처럼 들렸다.

* * *

과거 북벌에 나섰다가 전천풍에게 패배를 당하고 체내의 경맥이 모두 망가져 어둠 속에 빠졌던 날을 제외하면 오늘 이 순간은 황제 폐하의 일생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약해진 순간이었다.

수십 년 동안 침묵하던 총소리는 1년 전에 다시 울렸었다. 그리고 다시 들리지 않던 총소리가 황궁 안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범한이 동시에 황제 폐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죽이 황제 폐하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범한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힘으로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마음을 찢는 비통한 심정을 삼킬 수 있었던 걸까?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모든 걸 참고 견디던 범한은 황제 폐하가 가장 약해진 순간에 가장 절묘한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시간이었다.

다시 태어난 뒤 20여 년 동안 범한은 고된 수련을 잠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해왔다. 그는 초원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고, 눈과 얼음뿐인 신묘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푸른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설원에서 사색을 거듭했다. 천지의 원기가 만들어낸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 쇠약함과 강인함의 충동, 삶을 연연하는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던 마음,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와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전부 하나의 감각, 하나의 기세로 융합되어 범한의 몸 안에서 폭발되어 나왔다.

항상 지니고 다니던 검도 없었고, 쇠뇌의 화살이나 비수도 없었다. 독 안개나 소수단이나 대벽관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범한은 검에 기대거나 기술에 의지하지 않았다. 모든 걸 버린 채 스스로 바람이자 빛이 되어 가장 짧은 찰나의 순간에 모든 힘을 손바닥에 모아 있는 힘껏 황제 폐하의 약해진 몸을 베었다.

웅장한 패도의 정기가 체내의 거칠고 굵은 경맥을 베고 상처를 내며 힘차게 용솟음치더니 그의 능력을 넘어선 맹렬한 속도로 이동했다.

무수히 많은 먼지와 연기가 맑은 가을 공기에 흩날렸다.

손가락 끝까지 보내진 정기는 밖으로 뿜어져 나오지 않고 안에 모였다. 손가락 끝에서 분출되지 않은 정기가 금속처럼 단단하게 응집되어 황제 폐하의 어깨를 찔렀다.

정기가 실린 손바닥은 동해 바닷바람처럼 맹렬했고, 티끌 하나 없는 대동산의 절벽처럼 묵직하게 황제 폐하의 가슴을 때렸다.

베고, 찌르고, 때렸다. 몇 년 동안의 과거를 베고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길을 찔러 가리키고 황제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경계선을 쳐서 갈랐다.

* * *

범한은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강해 본 적이 없었고, 경제는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약해져 본 적이 없었다. 두 부자는 1년 만에 만났지만, 눈을 마주칠 겨를조차 없었다. 태극전 앞에서 두 개의 그림자로 변한 두 사람은 이제껏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맞댄 채 서로를 죽이려 했다. 공중에서 또 다시 거센 바람에 등이 깨지는 것 같은 간담이 서리고 진저리가 쳐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한의 몸놀림 속도는 이미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라서 잔영조차 남기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몸을 휘감은 회색 그림자로 변한 그가 지금 수십 번 공격을 날렸는지 수백 번의 공격을 날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땅에 고여 있던 빗물이 갑자기 일렁이더니 물방울들이 갈라지면서 한줄기 길이 열렸다. 고여 있던 빗물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깨끗한 청색 돌판이 드러났다. 돌판 위에서 약 한 뼘 정도 높이에 있는 황제 폐하와 범한이 그림자처럼 엉켜서 하늘 위를 높이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태극전에서 벗어나 동북 방향으로 날아갔다.

고여 있던 빗물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피가 공중에서 흩뿌려졌다.

‘쾅!’하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울렸다. 연황색 그림자가 황궁 겹 벽으로 된 곳 문에 부딪혔다. 충격을 받은 두꺼운 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나무 파편들이 먼지처럼 자욱하게 일어났다.

강력한 힘이 실린 나무 파편들이 화살처럼 ‘쉭’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자 궁문 뒤 원형 석문의 돌이 부서지고 주홍색 궁벽이 파였다.

옆은 황색 그림자 곁에서 날아간 나무 파편들이 귀신을 쫓은 거센 바람처럼 범한을 덮쳤다. 나무 파편을 피하기 위해 속도를 늦춘 범한이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황색 그림자는 문을 부수고 옆에 세워둔 동으로 만든 물항아리에 부딪혔다. 쇠가 부딪칠 때 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제 폐하도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피가 묻지 않은 하얀 손이 허공에서 불쑥 나오더니 번개처럼 빠르게 차가운 금속을 쥔 가녀리고 부드러운 손목을 눌러 아래로 내리고는 부드러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궁녀 복장을 한 여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 * *

‘쾅!’ 소리와 함께 동으로 만든 물항아리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는 황제 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몸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데도 황제 폐하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기괴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의 한쪽 팔은 잘린 상태였다. 몸에는 손가락에 찔린 상처가 네다섯 곳이 있었고, 손바닥에 맞은 상처도 세 곳이나 되었다. 붉은 피가 물든 황색 용포는 무척이나 흉악스러워 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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