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5)
섭중의 창은 오죽의 등이 아니라 그의 왼쪽 다리 옷자락을 스쳐 바닥을 찔렀고, 이어서 빗속에서 더없이 처량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섭중이 창을 내던지고는 손바닥으로 자신을 찌른 고행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섭중의 대벽관에 고행자의 어깨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고행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작은 신음도 내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감각도 없는 나무 인형처럼 9품 강자인 섭중의 일격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고행자가 들고 있는 비수로 섭중의 가슴을 공격했다. 두꺼운 갑옷을 뚫고 치명적인 중상을 입히려 했다.
두 사람의 힘이 충돌하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면서 주변에 있는 경국 군대들이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거대한 새처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말 위에서 날아오르더니 빗속 어딘가로 날아갔다. 연신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아주 멀리 날아갔다…….
* * *
섭중은 오죽을 더는 공격할 수 없었다. 최소한 오늘 그가 상대해야 하는 상대는 그림자였다. 고행자는 경국 고수들의 시선에 띄지 않고 빗속에 숨어 은밀하게 섭중에게 접근했지만, 어둠 속에서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범한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고행자의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범한은 단번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는 감찰원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예리함으로 미세한 상황의 변화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범한과 그림자만 이 정도의 예민함을 가지고 있을 거였다.
범한은 그림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경도로 돌아온 뒤에도 그림자와 연락을 취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가 황제 폐하를 죽여 진평평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디에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오늘 황궁에서 난리가 났으니 어디에서든 기회를 틈타 나타날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범한도 그림자가 고행자들 틈에 섞여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년 전 두 사람은 고행자들과 큰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그림자는 무슨 방법으로 고행자들 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걸까? 범한은 이 점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림자는 지금 경제를 지키는 사람 중 가장 고수인 섭중을 막아서 오죽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만약 이전의 그림자였다면, 분명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을 거였다. 지난번 황궁에 침입해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 했을 때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칼을 휘두른다면, 범한도 그림자를 저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림자는 공격 대상으로 자신이 죽이고 싶어 하는 황제 폐하가 아닌 섭중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감찰원의 첫 번째 재사였던 오 대인이 황제 폐하를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림자는 평생 우상으로 생각한 오 대인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걸 선택한 거였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에 따른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 * *
범한이 서로 엉겨 붙어 싸우면서 빗속을 해치고 멀리 날아간 섭중과 그림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태극전 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섭중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고행자에게 공격을 받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고, 결국 오죽을 저지하려던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황제 폐하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행자 중 한 명이 섭중을 공격하는데도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죽의 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은 오죽 오죽에게만 고정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견고해서 어떤 상황을 겪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쇠막대기는 치열한 싸움이 몸통 부분은 휘어져 있었고, 끝은 갈려서 평평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무기라기보다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부지깽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부지깽이는 태극전에 내리는 빗물을 사방에 빠르며 살기를 내뿜어 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쇠막대기가 앞에 있는 긴 창을 공격했다. 이후 순식간에 가장 합리적인 각도에 따라 움직이더니 창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을 때렸다. 창을 쥐고 있던 사람의 손은 피부가 터지고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져서 더는 창을 쥘 수가 없게 되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쇠막대기가 칼을 따라 미끄러져 올라갔다. 묵직한 압력을 받은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마모되어 평평해진 쇠막대기 끝이 검의 돌출된 부분을 만나자 맹렬한 기세로 튀어 오르더니 묵직하게 떨어졌다. 쇠막대기가 검을 쥐고 있던 사람의 팔을 때리자 팔이 장작처럼 부러져 버렸다.
황제 폐하를 지키는 선택을 한 고행자 중 한 명이 손바닥을 들어 저지하려 하자 마모된 쇠막대기 끝이 엄청난 힘으로 고행자의 손바닥을 찔렀다. 피가 ‘후드득’ 떨어져 빗물이 고인 바닥을 적셨고, 손바닥을 찌른 쇠막대기는 그대로 방향을 바꿔 고행자의 머리를 공격했다. 빗물을 가려주던 삿갓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고행자의 반들반들한 머리가 드러났다. 피가 엉겨 붙은 쇠막대기가 경추 부분의 뼈를 부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행자가 힘없이 쓰러졌다.
쇠막대기는 움직일 때마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게 치명적인 공격을 날렸다. 쇠막대기는 끝은 갈려 평평해지고 몸통 부분은 휘었음에도 여전히 오죽의 손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위력을 뽐내었다. 오죽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칼날들을 부수고, 사람의 살과 뼈를 뭉개고 으스러뜨렸다. 쇠막대기가 움직일 때마다 빗물이 섞인 핏물이 공중에 뿌려졌다.
쇠막대기는 끝이 뭉뚝해져서 더는 황궁에 있는 고수들의 목을 찌를 수 없었지만, 그들의 목뼈를 때려 부러뜨릴 수는 있었다. 오죽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든 모습이었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쓰러진 것은 황제 폐하에게 가려는 그를 막아 세운 고수들이었다.
이 순간 오죽은 절벽 위에서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엄격한 스승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당시 오죽이 휘두르는 나무 막대기는 인정사정없이 정확하게 범한의 몸을 때렸다. 범한은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절벽에서는 나무 막대기를 사용했고, 지금 황궁에서는 쇠막대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였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쇠막대기가 궁정 시위의 무릎 연골을 산산이 부쉈다. 그가 옆으로 휘청이자 오죽이 다시 한번 쇠막대기를 휘둘렀고, 궁정 시위가 돌계단 아래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일렁였다.
마침내 오죽이 황제 폐하 앞에 섰다.
* * *
힘겨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황제 폐하 앞에 섰음에도 오죽은 잠시 서서 욕설을 퍼붓거나 쏘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오죽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곧장 쇠막대기를 들고 황제 폐하의 얼굴을 공격했다.
천하에서 누가 감히 황제 폐하의 얼굴을 때리려 할 수 있을까?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오죽은 서슴없이 때릴 수 있었다. 그에게 황제 폐하의 얼굴을 때리는 건 버릇없는 불효자를 잘못을 꾸짖으려 매질하거나 배신한 남자를 처벌하기 위해 때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이 앞에 서자 황제 폐하의 눈동자 동공이 살짝 수축했고, 노쇠한 얼굴에는 광채가 번뜩였다. 황제 폐하가 손을 치켜들었다.
빗물기가 진동할 겨를도 없는 찰나의 순간에 황제 폐하가 늘어뜨리고 있던 왼손을 들어 자신의 옆얼굴을 막았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오죽의 쇠막대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황제 폐하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곧장 오죽의 가슴을 공격했다.
황제 폐하의 양손은 눈처럼 하얗고 고왔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평생 더러운 건 만져본 적도 없고, 피 한 방울도 흘려보지 않았을 것 같은 손으로 오죽의 쇠막대기를 막는 동시에 가슴을 공격하려 했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절세 강자인 두 사람이었지만, 공격 방식은 아주 단순했다. 한 사람은 그냥 쥐고 있는 쇠막대기를 휘둘렀고, 다른 한 사람은 단순히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방식을 두 사람을 제외한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오죽의 쇠막대기를 손바닥으로 막으려 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엄청난 위력을 지닌 주먹이 오죽의 가슴을 강타했다.
순간 공기가 응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오죽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묵직하고 단단한 운석이 지면과 부딪친 것처럼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오죽의 몸이 화살처럼 순식간에 돌계단 위에서 날아갔다.
황제 폐하의 주먹이 오죽을 날렸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금군 병사들을 죽이고, 고수들을 쓰러뜨린 뒤 가까스로 태극전 앞에까지 온 오죽은 황제 폐하의 주먹에 피를 사방으로 뿌리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간 오죽의 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곤두박질쳤다. 오죽의 몸과 땅이 강하게 부딪치자 그 충격이 주변에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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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현장은 기괴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사실 이 시간까지 살아서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태극 전 아래 돌계단에서 부슬비를 맞으며 홀로 서 있는 황제 폐하는 여전히 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죽을 일격에 쓰러트렸으니 자만한 모습을 보일만 한 일인데도 황제 폐하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눈동자에는 오히려 차가운 한기만 번뜩였다.
오죽의 쇠막대기는 경제의 손에 응집되어 있던 웅장하고 힘찬 정기를 부수고 경제의 얼굴을 때렸다.
경제의 얼굴 전체가 창백한 것과는 달리 왼쪽 뺨은 따귀를 심하게 맞은 것처럼 발갛게 부어 있었고, 입술에는 붉은 피가 흘렀다.
그가 천천히 손을 거두더니 고개를 숙이고 쇠막대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왼손을 바라보았다. 이때야 그의 머릿속에 오죽의 쇠막대기가 구부러져 있던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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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사방이 뿌리며 빗속으로 날아간 오죽이 몸을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날아가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은 쇠막대기에 몸을 의지하자 쇠막대기가 부들부들 떨렸다. 오죽은 빗속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쇠막대기에 의지해 일으켜 세웠다.
사람이라면 절망해 주저앉을 상황이었다. 온갖 공격을 견뎌내며 자신을 두껍게 포위한 병력을 무찌르고 마침내 황제 폐하 앞에 섰으나 주먹 한 방에 다시 멀리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죽의 얼굴에는 조금의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태가 방금전보다 훨씬 심해진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기 시작했다. 훨씬 힘겨운 자세로 느릿느릿 태극전 아래 옅은 황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점점 약해지더니 이제는 그친 상태였다. 하늘에 두껍게 깔려 있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하늘이 맑아졌고, 황궁 안의 모습도 더 선명하기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