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4)
오죽은 망가진 다리로 힘겹게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신묘에 갔다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사람들의 강력한 무력과 정명으로 부딪쳐 당당하게 이겼지만, 그 대신 심각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니 황제 폐하의 말이 옳았다. 오죽은 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 역시 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1년 동안 연거푸 배신들을 당해야 했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기에 공격을 받아 다친 뒤 부상을 회복하지 못해 과거 최정상 단계에 있었을 때의 몸 상태에 이를 수 없었다. 하지만 오죽은 그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왼쪽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는 무척이나 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두 절세 강자 중 이번 대결에서 승리할 사람은 누구이고 패배할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시 섭중이 이끌고 온 병사들에게 포위당한 오죽은 과연 포위망을 뚫고 손에 든 쇠막대기로 경제의 목을 찌를 수 있을까?
경제의 차가운 눈빛이 오죽의 너덜너덜해진 옷을 스쳐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왼쪽 다리에 고정되었다. 오죽을 바라보는 경제는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복잡한 감정이 경제의 눈동자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비웃음과 감탄과 못마땅함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오죽은 다시 두꺼운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으니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상황을 역전시키기는 힘들 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범한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처럼 냉혹하고 매정한 인내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다.
태감으로 분장한 채 태극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어 상황을 주시하던 범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인 그는 어느덧 경제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갈고 닦은 심신으로 자신의 호흡을 통제하며 하늘에 천천히 내리는 빗소리와 사람들의 긴장한 호흡 소리에 숨어 천천히 접근했다.
황제 아버지가 기침하는 모습을 본 순간 범한은 남쪽으로 내려오던 길에 알게 된 소식이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황제 폐하의 몸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1년 동안 못 보는 사이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을 풍기던 황제 폐하는 많이 노쇠해져 있었다. 내리는 비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황제 폐하의 턱수염은 이전보다 많이 길어져 있었고, 눈에는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 폐하는 이제 확실히 신단에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태극전 앞에 서서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을 향해 느리게 걸어오는 오죽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강대했다. 그래서 그에게 도전하려 하는 사람들은 그 강대함을 마주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을 상실해 버리는 거였다.
범한은 오죽이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오죽 아저씨가 중상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범한은 이 세상에서 경국 황성의 방어막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금군 병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황제 폐하를 죽이려 황궁 안으로 들어오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본 해본 적도 없었다. 오죽 아저씨의 심각하게 망가진 왼쪽 다리를 본 범한은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범한은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감정들을 최대한 억눌렀다. 걱정과 두려움과 슬픔과 안타까움 등 온갖 감정들이 일어나 마음속을 지배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태극전 그림자 속에 숨어서 자신이 나설 절호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죽 아저씨가 이미 가장 위험한 순간에 처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범한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와 오죽 아저씨가 정면으로 싸우기 전에 자신이 나서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종사들의 싸움에서 범한처럼 평범한 사람이 제멋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나섰다가 오죽 아저씨가 오랜 시간 원했던 결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꾹 참으며 자신에게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섭중은 황제 폐하의 앞을 지키고 있었고, 요 태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고행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이처럼 황궁 안에 많은 고수들이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범한은 황제 아버지가 힘을 많이 소모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희망을 심각은 부상을 입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죽 아저씨에게 걸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세 사람을 포함해서 누구든 지금 심각한 부상을 입은 오죽의 모습을 본다면 곧 쓰러져 죽을 거라고 생각할 거였다. 하지만 오죽은 여전히 서 있었다. 범한은 그런 오죽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었고, 황궁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한없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오죽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가린 검은 천 너머로 십여 장 밖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옅은 황색 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늙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쓰라림과 강렬한 증오심과 경멸감이 마음속에서 끓어 올랐다.
그날, 대동산 사건이 끝난 뒤 경도 범씨 집안 저택 지붕 위에서 오죽은 범한이 술에 취해 읊는 시를 들었다. 그 시를 들은 그날 밤에 오죽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길을 찾고 정체를 알고 싶어서 신묘로 돌아갔다.
신묘 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오죽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들이 기억났고, 자연스럽게 궁금해했던 많은 일들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신묘는 그의 기억을 강제로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후 신묘로 찾아온 범한이 목숨을 걸고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오죽은 기억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오죽은 그동안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지워지기 전에 가장 강렬하고 짙었던 감정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죽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 감정은 심지어 범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보다도 더 강렬하고 선명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오죽이 이틀 동안 연달아 황궁을 바라보게 했고, 그가 황궁 광장을 걸어가게 만들었으며, 금군 병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황궁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오죽은 아직도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용포를 입고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에 대한 감정만큼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용포를 입은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살의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범한은 오죽에게 마음이 가는 데로 따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죽의 마음속에는 더없이 깊은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씨 황제를 보자 마음속 깊숙이 갇혀 있던 아픔과 슬픔이 터져 나올 통로를 찾은 것 같았다.
오죽은 이씨 황제는 죽이고 싶었다. 이게 오죽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오죽은 계속 몸을 움직였다. 손에든 쇠막대기에 몸을 지탱하고 망가져 버린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힘겹게 걸어가면서도 강렬한 살기를 내뿜어 냈다. 한 걸음, 한 걸음 빗물이 고인 땅에 발을 질질 끌고 가면서 그는 뛰어가지 못해 한이라는 듯이 잠시도 쉬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서 있는 돌계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오죽이 움직이는 찰나의 순간에 그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경국 군대도 움직였다. 하늘이 진동할 만큼 큰 괴성을 지르며 무수히 많은 무기가 동시에 오죽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오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던 고행자들은 마음을 짓누르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움직였다. 일부 고행자들은 비바람 속으로 물러났고, 일부 고행자들을 오죽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행자들의 마음속에 경제는 더없이 숭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행자들 중 일부는 오죽이 신묘에서 온 사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반역자라 칭한 경제의 말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포위를 당한 오죽이 다시 몸을 움직이는 순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오죽에게 집중을 하느라 황제 폐하와 오죽 사이에 있는 고행자들 중 대부분이 홀연히 비바람 속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죽이 황제 폐하에게 곧장 향할 수 있도록 고행자들이 길을 열어줄 때 삿갓을 쓰고 삼베 옷을 입은 고행자 한 명이 비스듬히 옆으로 향하는 것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 고행자는 고의인 듯 아닌 듯 슬며시 옆으로 날아가더니 군대 쪽 고수들의 공격을 방해했다.
무신처럼 위풍당당하게 창을 들고 말 위에 앉아 있던 섭중은 오죽이 움직이는 순간 살의를 번뜩이며 말의 배를 찼다. 말이 ‘힝’하고 크게 우는 것도 동시에 정기가 잔뜩 모인 창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오죽의 등을 찌르려 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섭중은 아주 오래전 경국 경도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죽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죽은 섭류운과 정면으로 대결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절세 강자였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섭중은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서자마자 자신의 체내 안에 있는 정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했다. 그는 이후 오죽의 반격을 어떻게 피할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정신을 집중해 온 힘을 다해 일격을 날리지 않는다면 오죽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레와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빛을 받아 은색으로 번쩍이는 매끈한 창끝이 오죽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섭중은 지금껏 살면서 가장 강력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모든 힘과 정기를 창끝에 모았다. 오죽을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섭중은 홀연히 빗속으로 물러선 고행자 중 한 명이 자신에게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껏 무기를 보이지 않고 있던 고행자가 섭중에게 가깝게 접근하면서 소매에서 독을 묻힌 비수를 꺼냈다. 그리고는 빗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섭중에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섭중이 오죽의 등을 찌르려는 찰나의 순간에 고행자가 가지고 있는 비수로 섭중의 옆구리를 찔렀다.
* *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섭중이 모든 힘과 정기를 모아 일격을 날렸다. 창끝이 바닥을 때리자 빗물에 씻겨 더없이 깨끗한 청색 돌판이 산산이 부서졌다. 섭중의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두부를 부수는 것처럼 가볍게 단단한 돌판을 부순 창끝이 땅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그리고 독을 바른 검은색 비수는 섭중이 일격을 날리는 순간에 이미 그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