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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98화 (1,098/1,108)

1098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3)

등 대가 부인은 무언가 어렴풋하게 알아차린 듯 어디론가 가려 했다. 임완아도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씨 집안에 있는 가족들은 어디론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범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범약약에게 급히 입궁하라는 교지가 내려졌을 때 임완아는 곧장 그 이유를 알아챘다. 왜냐하면, 최근 황제 폐하의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은 와중에 급히 입궁하라는 교지가 내려졌다는 건 한가지 이유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경도 안에서 어젯밤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살아 돌아왔으면서 어째서 집으로 오지 않은 거지? 외삼촌이 상공을 죽이려 하고, 상공도 외삼촌을 죽이려 한다는 건 알지만…… 그렇지만…… 마지막에 일지도 모르는데, 얼굴도 보려주려 하지 않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한 임완아는 마음이 더없이 슬퍼졌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이 아무것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량의 앳된 얼굴로 떨어졌다.

* * *

슬픔에 잠김 임완아가 무기력하게 앉아 범한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을 무렵 어젯밤에 입궁한 범약약은 황궁 안에서 궁정 고수들의 감시를 피해 몸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지금 황궁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서 궁정 고수들이라 해도 당장은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범씨 집안 아가씨는 푸른 산에서 의술만 배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오죽이 과거 창산에서 눈이 내렸던 밤에 범한 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그녀를 훈련했었다.

범약약은 지금 궁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 약간 어색해 보였다. 그녀가 입은 옷이 비바람에 살짝 펄럭였다. 그녀는 황궁 벽을 따라서 천천히 태극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태감과 궁녀들은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태감과 궁녀들은 싸우는 소리와 비명소리에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후궁 방향으로 도망을 치느라 그녀를 보아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수상한 모습에도 뭘 하려 하는 건지 신경 쓰지 않았다.

태극전 뒤 외진 곳에 문 앞에서 그녀는 태감 홍죽과 만났다. 홍죽은 그녀가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홍죽을 바라보는 범약약의 표정을 아주 침착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태감이 왜 갑자기 몇 개월 전부터 자신과 암암리에 연락을 취하려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홍죽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그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이유는 작은 범 대인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한 홍죽은 자신의 비밀을 마음속 깊이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렸음에도 범씨 집안 아가씨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은, 잠시나마 자신과 작은 범 대인의 관계를 털어놓을까 생각을 했던 건 아마도…… 깊은 황궁 안에서 홀로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게 외롭고 싫기 때문이었다.

한편 범약약은 오라버니가 아직 살아 있으며, 이 태감의 도움으로 황궁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황궁 안으로 잠입한 이유가 뭔지, 앞으로 하려 하는 일이 뭔지 떠올리자 기쁨은 곧 걱정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문 옆에 놓인 커다란 물항아리 옆으로 걸어갔다. 그때 멀지 않은 황성 위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을 뚫고 뼈를 부수고 살을 찌르는 쇠막대기의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에 오늘 사부도 이곳에 왔다는 걸 알게 된 범약약이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이후 그녀는 문틈으로 멀리 태극전 정전 앞에 있는 옅은 황색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 * *

황제 폐하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소매 안에 감춰진 손이 하얀 명주 천을 꽉 쥐었다. 그는 흰 명주 천에 복숭아꽃을 수놓은 것처럼 빨간 핏자국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침을 할 때 피가 같이 나온 거였다.

‘짐은 이미 틀린 것인가?’

줄곧 옆에 있던 요 태감까지 멀리 보낸 황제 폐하의 곁에는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황제 폐하가 바라보고 있던 빗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죽이 마침내 오는 것이었다.

오죽의 눈을 가린 검은 천에서 연신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고, 손에 꽉 쥐고 있는 쇠막대기에서는 핏물이 섞인 붉은 빗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진한 피비린내가 그가 입고 있는 무명옷에서 진동했다.

오죽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금군 병사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오죽은 마침내 두꺼운 포위망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너무나도 견고해서 절대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쇠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쇠막대기는 무수히 많은 단단한 갑옷을 뚫고 사람의 목을 뚫느라 날카로운 끝이 이미 평평하게 닳아 있었고, 막대기 몸통 부분도 약간 휘어 있었다.

오죽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신도 아니었다. 금군 병사들은 동료들이 죽는 걸 보면서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오죽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황성에서 펼쳐진 살육전에서 중무장한 금군 병사들은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서 돌벽처럼 오죽을 포위했고, 그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금군 병사들의 장렬한 희생에도 오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죽은 결국 앞을 가로막은 모든 병사들을 죽이고 포위망을 돌파했다.

다만 치열한 싸움으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쇠막대기는 망가져 있었고, 깔끔하게 빗어 묶었던 검은 머리도 산발이 되어 있었다. 입고 입은 무명옷에는 무수히 많은 구멍이 났고, 바지도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죽의 모습 중 사람들을 가장 소름이 끼치게 느꼈던 건 그가 여전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가 이미 어떤 무기에 의해 망가져 버렸음에도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사람은 뼈가 으스러지고 뒤틀린 다리로는 절대 걸을 수 없었다.

오죽은 망가진 다리로 여전히 걷고 있었다. 곧 떨어질 것 같은 검은 천 너머로 태극전 앞에 서 있는 경제를 노려보며 그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모양이 변형된 쇠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빗속에서 힘겹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빗줄기는 이미 가늘어져서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지만, 태극전 앞에 청색 돌판에는 여전히 빗물이 고여 있었다. 오죽의 뒤틀린 왼쪽 다리가 빗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끌리면서 괴상하고 섬뜩한 소리를 냈다.

왼쪽 다리가 바닥에 끌릴 때마다 고통이 느껴지는지 오죽의 얇은 입술이 살짝 씰룩였다. 하지만 오죽은 이미 고통을 잊은 상태였다. 그가 태극전 앞에 서 있는 경제를 향해서 한 발짝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오죽을 바라보던 경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 선생이 죽은 사물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확인하는 군……. 죽은 사물이라면 저렇게 강렬한 애증을 가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때 줄곧 굳게 닫혀 있던 황성 정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더니 오물을 뒤집어 쓴 섭중이 말을 탄 채 금군의 남은 병사들과 자신의 친위 기병들을 이끌고 태극전 앞으로 달려왔다. 천둥처럼 맹렬한 말발굽 소리에 땅에 고여 있던 빗물이 조금씩 진동했다.

잠시 뒤 수백 명의 경국 정예 병사들이 다시 한번 오죽을 포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위한 오죽의 한쪽 다리가 뒤틀린 채 억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조금도 기쁘거나 안도감을 느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더욱이 이때 갑자기 황제 폐하 주변에 열댓 명의 경묘 고행자들이 출현했다. 삿갓을 쓰고 강력한 무예 실력을 갖춘 고행자들은 오죽을 본 뒤, 더욱이 오죽의 상처에서 흐르는 액체 색깔을 본 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죽의 몸에 흐르는 피는 뜨겁고 붉었다. 하지만 약간 황색을 띤 붉은 색이었다. 가랑비 속에서 느리게 걸어오는 오죽의 피 색깔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삿갓을 쓴 고행자들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든 고행자들이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빗속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은 대상은 바로 오죽이었다. 이들은 경제의 곁을 따라다니며 세력을 지켜왔지만, 이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맹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 인간 세상에 왕림한 사자에게 어찌 무례를 저지를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하늘이 경국에 신벌을 내리시지 않겠는가?

* * *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삿갓 위를 가볍게 때렸다. 얼굴을 창백하게 질린 고행자들은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검은 천을 눈에 두른 맹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들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행자들은 경제가 가진 최후 방어 수단이었다. 십여 명의 고행자들이 힘을 합치면 범한과 그림자도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힘이 강력했다. 하지만 이때 오죽을 마주하자 고행자들은 오히려 반대편에 가담할 기색을 보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천천히 내리던 차가운 빗물이 바람에 날려 태극전 앞 긴 복도에 서 있던 황제 폐하가 있는 곳을 덮쳤다. 황제 폐하의 턱수염을 적신 빗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고행자들의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던 황제 폐하의 눈빛에서 한기가 갈수록 짙어지더니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

“쓸모없는 것들. 반역자 하나 때문에 겁을 먹다니.”

황제 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행자들이 자신을 배신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신묘에서 온 사자는 섭경미가 이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황제 폐하와 모종의 협의를 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경묘와 왕래해오던 대륙 남쪽 고행자들은 황제 폐하를 하늘이 선택한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하늘이 선택한 사람과 신묘에서 온 사자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고행자들을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침묵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미 노쇠한 기색이 보이는 고행자들은 오래전부터 신묘가 사자를 통해서 세상에 뜻을 전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자가 타락한 사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사자가 과거 신묘의 뜻을 전달해온 사자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황제 폐하는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고행자들을 무시한 채 오죽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오죽을 바라보던 그가 읊조리듯이 말했다.

“이 세상에 신은 없다. 짐도 신이 아니고…… 오 선생, 자네도 신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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