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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96화 (1,096/1,108)

1096화 경국 12년에 핀 무지개 (1)

경국 경도에 비가 내리고 있을 무렵 북제 남경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공중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지자 천지 사이에 한기가 가득해졌다. 하지만 기온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떨어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남경성의 웅장한 성벽 위에서 북제 남쪽 방어선을 책임지는 남경 통병사 대장 상삼파가 차가운 눈빛으로 서남쪽 평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평원에는 아직 눈이 쌓이지 않은 상태라서 겨울에는 쉬고 있는 비옥한 검은 흙을 볼 수 있었다. 상삼파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곳에서 앞으로 수십 년을 버티고 있을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경국 군영을 바라보았다.

경국 군영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깃발 아래로는 병영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사방이 온통 검게 보였다. 경국 군영은 눈바람에 잠시 가는 길을 멈춘 채 엎드려 숨을 고르고 있는 맹수처럼 보였다.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이들은 남경성을 정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국은 두 변방군인 연경 대영과 정북 진영의 힘을 하나로 합치게 해 총공격에 나섰고, 며칠 만에 북제 군대가 지키던 세 곳의 방어선을 뚫고 맹렬한 기세로 북쪽을 향해 진격했다. 그 길에서 죽어 나간 북제 병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지금 어느덧 남경 방어선을 20리 앞둔 곳까지 다가온 경국 군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진영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제 천하에서 가장 강국인 두 나라 사이에 유례없이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공성전이 이곳 남경성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상삼파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허리에 찬 칼집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주변에서 병사들이 개미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상삼파가 고개를 돌려 추운 날씨에도 곧 있을 공성전을 대비해 무기를 준비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성안에 자욱하게 깔려 있는 긴장과 두려움이 섞인 분위기를 느끼는 그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만 명의 경국 기마병이 맹렬한 속도로 공격을 퍼붓는다면 북제 남쪽 첫 번째 요충지인 이곳을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상삼파가 고개를 저으며 옆에 서 있는 부하 교관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할 일을 마친 뒤 몸을 돌려 성벽을 내려간 그는 아래 임시로 마련해 둔 전선 막사로 들어갔다.

이곳 막사는 외진 구석에 있어 무척이나 조용했고, 밖은 그의 친위병이 지키고 있어 다른 사람이 접근할 걱정이 없었다. 막사 안에 들어간 상삼파의 눈에 평민 복장이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위엄을 풍기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를 본 상삼파가 한쪽 무릎을 꿇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부님, 왕지곤이 며칠 전에 일어난 매복 공격에 겁을 먹었으니 앞으로 3일 동안은 공성전을 할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북제 군대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경국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인 상삼호 대원수가 아직도 경국 군대의 허리 부분인 송나라 주성에 버티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상삼호는 남경에서 큰 전투가 일어날 걸 대비해 쥐도 새도 모르게 혼자 남경성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상삼파의 말을 들은 상삼호가 미간을 살짝 떨면서 엄한 말투로 말했다.

“왕지곤이 수비적으로 움직인 건 사실이지만 매복 공격에 겁을 먹고 움츠러들 사람은 절대 아니다. 경제가 그에게 연경 군대를 십여 년 동안 이끌게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며칠 동안의 자잘한 싸움으로 우리 북제군이 이익을 얻은 것 같지만, 왕지곤은 거북이 같은 인물이니 네가 원하는 데로 병력을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상삼파는 막사를 쟁쟁 울리는 의부의 목소리를 들자 자신도 모르게 경외감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의부는 아무도 모르게 남경성 안으로 들어온 지 몇 시간 만에 벌써 곧 있을 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의부가 암암리에 귀신 같은 용병술을 부리지 않았다면, 세 방어선을 대신해 경국 군대를 매복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미 경국 기병은 남경성을 정복했을 거였다.

“왕지곤은 가만 보면 후안무치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경국 군대의 기세가 맹렬하고, 병력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굳이 평원에서 성을 바라보는 모양을 취하니 말입니다.”

상삼파의 투덜대는 목소리에 상삼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잘못이 없기만을 바라는 게지. 왕지곤의 대단한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상삼호가 갑자기 지도에서 눈길을 거두고는 막사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병력과 장군이 저렇게나 많으니 나도 가볍게 볼 수 없겠구나.”

북제 일대 명장의 얼굴에서 순간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송나라 주성에 있던 그가 남경성으로 돌아온 이유는 이곳 방어선이 안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경국 기병이 남경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북제의 복부가 직접 타격을 받게 되는 셈이니 조정에 큰 혼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뻔했다.

상삼호는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움직였으니 경국 군대는 아직도 그가 송나라 주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경계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상삼호는 모두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남경성 안에서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 안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특출난 능력을 지닌 상삼호라도 이번 전쟁은 쉽지 않았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경국 군대는 십여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게다가 경국 군대는 엄격한 규율과 훈련으로 잘 조직이 되어 있었고,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 전투력에서도 북제를 훨씬 넘어섰다.

이에 상삼호는 귀신과 같은 전술과 용병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더욱이 이번 싸움은 야전이 아니라 공성전이었다. 양 대국의 군대가 남경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충돌을 한다면 최후에는 국력과 기세의 싸움이 될 거였다.

상삼호는 자신과 맞붙을 상대인 왕지곤이 두렵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지금 남경에서 경국 군대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왕지곤 장군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북제 남쪽 군대를 책임져온 상삼호의 시선은 항상 멀리 남쪽 경도 황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경제의 군대 운영 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약 경국이 북벌을 단행한다면, 모든 나라의 힘을 모아 전력을 쏟을 것이며, 최소한 세 로의 변방군을 한 곳에 집결시켜 도저히 막기 힘은 기세로 강력한 공격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상삼호의 예상과는 달리 남경서 밖에는 두 로의 변방군만 있었다. 아무래도 경제의 패기가 상삼호가 예상했던 것만큼 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상삼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근심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남쪽에 있는 군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설마 내가 알아채지 못한 함정이 있는 건가? 나는 과연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을까?’

전투를 앞둔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경국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 상삼호는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경국 군대가 북쪽으로 진격해오는 발걸음 속도를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얼마나 오래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상삼호는 온몸을 감싸는 피로감에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황제 폐하가 며칠 전에 보낸 밀지의 내용이 생각났다. 경국 범한이 신묘에서 살아서 돌아왔으며, 이미 경도로 돌아갔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밀지 내용을 떠올려보던 상삼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북제의 명운을 경제의 사생아 아들에게 맡기려는 것인가? 범한이 경제를 죽일 수 있을까? 경제를 과연 죽일 수 있단 말인가?’

* * *

상삼호가 남경성 안에서 수십 리 밖에 있는 경국 군대의 군영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도 남경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십여 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경국 군대 군영 안에서 왕지곤도 차가운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성만 정복한다면 경국 군대는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기병을 앞세워 북제 중부 요충지에 진입할 수 있었고,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상경성까지 도달하려면 방어선을 두 곳 더 상대해야 했지만, 남경성보다는 훨씬 상대하기가 쉬울 거였다.

다만 남경성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뒤에 송나라 주성에 머물고 있을 상삼호를 경계해야 했기 때문에 경국 군대의 공세는 변경 지역을 점령하던 기세와 비교하면 약간은 약해져 있었다.

“사비 장군은 언제 도착한다고 하던가?”

왕지곤이 묻자 옆에 있는 부장이 단숨에 대답했다.

“대장군은 4일 뒤면 도착하실 겁니다.”

왕지곤이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는 북벌을 시작할 때 이미 모든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멀리 남경성 안에 있는 상삼호와 마찬가지로 왕지곤 역시 황제 폐하의 패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제 폐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 폐하가 사비 장군을 보내 정북 진영 쪽 야군을 맡기려 하는 것에 대해 왕지곤은 전혀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비 장군은 과거 왕지곤 밑에서 부장으로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비 장군에게 공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거나 황제 폐하가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 북벌은 천하 통일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만큼 어느 장군도 자신의 힘만으로 이 엄청난 공적을 모두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다.

왕지곤은 가끔 자신이 최소한 섭 대원수보다는 나은 상황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 대원수는 지위가 너무 높아져서 경도 추밀원에 틀어박혀서 명령만 내릴 뿐 그처럼 직접 전쟁터에서 병력을 이끌 수 없으니 말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준비했던가?’

막사 입구에 서 있는 왕지곤은 갑옷 위에 눈이 쌓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멀리 남경성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발이 이미 북제 땅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격한 감정에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지난 십여 년 동안 연경을 지켜온 왕지곤은 오늘을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자신의 삶이 후회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 감격에 겨운 눈빛을 짖고 있던 왕지곤의 눈동자에서 한줄기 한기가 번쩍 빛났다. 그가 몸을 살짝 떨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날씨가 추워지고 있기는 했지만, 경국 후방 보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여전히 드높았다. 하지만 왕지곤은 계속 강렬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작은 범 대인이 경도로 돌아왔다고 하던데. 황제 폐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 * *

북제 황궁이 세워져 있는 산속에는 맑은 계곡물이 흘렀다. 산세를 타고 흐른 계곡물은 가장 아래 있는 맑은 못에 고였다. 청색 돌을 쌓아서 만든 이 연못 안에 고인 계곡물은 뚫어놓은 수로를 통해서 황궁 밖으로 흘러갔다.

용포 위에 크고 두꺼운 외투를 걸친 북제 황제가 양 눈썹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치켜세우고 입을 꽉 오므리고 있었다. 그렇게 북제 황제는 연못 옆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북제 황제 뒤에 서 있는 해당은 연못의 맑은 물이 아름다운 황궁 밖으로 흘러가 겨울 상경성에 흐르는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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