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화 서서히 궁전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2)
경제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이유는 몇 년 전에 직접 눈으로 확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경묘 뒤쪽 황무지에서 경제는 신묘의 사자가 큰불 속에서 ‘탕, 탕’ 소리를 내며 점점 녹더니 마지막에는 기괴한 사물로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었다.
지금 황성 성벽 위에 서 있는 궁전은 경제가 세운 계획을 집행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금군은 오죽이 언제 나타나든 바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며칠 전부터 이미 불화살과 기타 장비들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경력 13년 가을날 하늘은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경제를 버리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오죽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황궁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날 하늘은 무심하게도 가을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폭우를 내렸다.
유례없는 가을 폭우에 궁전이 준비해둔 장비들이 모두 젖고 말았다. 마치 하늘이 경국 조정이 과거를 모두 깨끗하게 청산하기 위해서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에게 이제 그만 떠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궁전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오죽을 바라보았다. 그가 병사들에게 화살 쏘는 걸 중단하라고 명령한 뒤 쉰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불과 기름을 준비해라!”
궁전은 황성 아래 있는 오죽을 포함해 그 주위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분명 4년 전에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감찰원이 준비한 화약을 폭발시켰던 범한의 계획 다음으로 강력하고 악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4년 전에 범한은 감찰원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대량의 화약을 전부 황궁 안으로 옮겨 작은 전각 아래 묻은 뒤 황제 폐하와의 싸움 때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 화약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물론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건…… 하필이면 오늘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는 거였다. 그래서 궁정은 기름과 불을 같이 사용해서 황성 아래 있는 오죽을 죽일 생각을 했다.
병사들이 기름을 가져와 성벽 아래 뿌렸지만, 오죽의 몸에 뿌리지는 못했다. 오죽은 느리고 안정적인 발걸음으로 어느덧 황궁 문 앞까지 걸어왔다.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자 황성 성벽 위에 있는 금군 병사들이 수십 발의 불화살을 전부 쏘았다. 불꽃이 황성 성벽 아래 뿌려진 기름과 만나면서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어서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더욱 거세진 불길이 오죽의 몸을 덮쳐 버렸다.
바로 그 순간 오죽이 날아올랐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걷고 있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쇠막대기를 황성에서 약 두 장 정도 높이에 있는 틈에 꽂더니 몸을 활시위에서 발사되는 화살처럼 튕겨 올려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죽이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절벽 위를 뛰어다니는 영양처럼 두 발을 계속 교차해 뛰면서 반들반들한 황성 성벽을 올랐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오죽은 황성 성벽 위에서 비가 내리는 하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오죽의 헝겊신을 신을 발이 황성 성벽 위에 오르는 걸 바라보는 궁전은 대세가 이미 완전히 기울어졌다는 걸 알았다. 이제 천하를 통틀어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누구도 오죽이 입궁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가을비가 내리는 광장에서 갑자기 천둥처럼 거센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기병이 나타났다. 비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살기등등한 사기를 내뿜고 있었고, 기병들 맨 앞에는 추밀원 정사이자 경국 군대의 최고 일인자인 섭중 대원수가 있었다.
섭중은 지금의 상황에 몹시 놀랐는지 안색이 검퍼렇게 변해 있었다. 비를 맞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얼굴에 찰싹 붙어 있어 섭중의 당황한 표정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는 멀리 황성 성벽 위에 서 있는 맹인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병력을 데리고 최대한 빨리 달려온 거였다. 미끄러운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린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도 비틀거리는 말 위에서 섭중이 소리쳤다.
“오 대인, 소란 피우지 마시오!”
* * *
‘신묘가 황폐해지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짐은 오 선생은 신묘에서 온 사람이니 신묘라면 돌아온 그를 묶어둘 방법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가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인가?’
‘하늘도 무심하시구나. 하늘은 왜 하필 오늘 폭우를 내린 것인가? 어째서 오 선생이 오는 날에 비가 내린 거지?’
‘천하를 마음에 품고 만 리 강산을 손에 쥔 짐이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용상을 위협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누가 짐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세상이 어찌 이리도 불공평한 것인가? 짐에게 며칠만 시간을 더 준다면, 아니 그날 짐이 그 상자 때문에 다치지만 않았다면, 짐이 오 선생이 이곳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 같은가?’
‘하지만 설사 오 선생이 이곳에 온들 뭘 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황궁 밖에서 급보가 전해져 왔지만, 황제 폐하는 입가에 냉소만 지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용상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는 서더니 옆에 있는 요 태감에게 용포에 주름이 있는지 살피게 했다.
종류가 다양한 용포 중에서 오늘 경제가 입은 용포는 몸에 딱 달라붙어 활동하기 편했다. 그러니 좀 있다가 싸우더라도 불편하지 않을 거였다.
다만, 다만…… 황제 폐하의 눈가에 주름에서 지친 기색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어째서 그의 입가에 핀 옅은 미소에서 처연한 기색이 보이는 걸까?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태극전에서 경제가 뒷짐을 지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빗어서 옅은 황색 비단에 물러 묶으니 더없이 말쑥해 보였다.
두 눈을 감고 있던 경제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천천히 눈을 떴다. 눈동자에서는 방금 전 스스로 자문했을 때 보이던 자조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호수처럼 잔잔한 침착함과 흔들림 없는 자신감만 보일 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침착한 눈빛은 활짝 열려 있는 태극전 문 너머로 보이는 광장을 가로질러 참혹한 비명소리가 연실 들려오는 황성 정문에 향해 있었다. 그는 잠시 뒤 오 선생이 그곳을 지나 여기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오 선생의 성격과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직선으로 이어진 가장 짧은 길을 따라서 걸어오리라는 걸 알았다.
“범한은 아직 찾지 못했는가?”
그가 눈꺼풀을 살짝 내려뜨리고 손가락으로 옥반지를 굴리며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요 태감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범씨 집안 아가씨가 어젯밤에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가 두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짐이 아직도 많은 사람을 얕잡아 봤던 것 같군. 범약약같은 사람을 너무 얕잡아 봤어.”
요 태감은 마른침만 꿀꺽 삼킬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요 태감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범한이 경도로 들어왔다는 확실한 정보가 황궁에 전해지자 황제 폐하는 곧바로 범씨 집안 아가씨에게 입궁하라 교지를 보냈다. 범한의 약점인 범씨 집안 아가씨를 곁에 데리고 있을 생각인 거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어젯밤에 황궁에 입궁한 범씨 집안 아가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요 태감이 어젯밤 일들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범씨 집안 아가씨도 실력을 감춘 고수였던 건가? 그럼, 어젯밤 황궁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궁정 사람들이 저택을 찾아갔을 때 바로 도망을 치지 않고 굳이 황궁 안에서 도망친 이유는 뭐지?’
* * *
황성을 지키는 만 명이 넘는 금군 병사들은 자신의 몸과 목숨을 바쳐 가까스로 오죽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사방이 모두 피바다가 되었지만, 금군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사고검이 과거 크고 푸른 나무 아래서 나뭇가지고 개미들을 짓이겨 죽일 때도 시간이 필요했었다.
하물며 오죽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앞을 막는 병사들을 죽였지만, 사람의 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반 시진은 더 걸릴 것이다.”
황제 폐하는 마치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파악해둔 사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태극전 밖으로 나가더니 긴 복도에 서서 갈수록 약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황궁의 태감과 궁녀들을 잔뜩 겁을 먹고는 멀리 뒤로 물러나 있었고, 요 태감 한 사람만 외롭게 황제 폐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 폐하게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자 요 태감이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명주천을 건네주었다. 황제 폐하가 입가를 닦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지가 만일 이대로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일이 재미있어지겠군.”
* * *
황궁 안의 무거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활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 하고 스산한 분위기였다. 지금 범한은 태극전 긴 복도 끝에 서 있는 태감들 무리에 끼어 있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멀리 서 있는 중년 남자를, 아니 이제는 마땅히…… 나이 든 노인이라고 해야 할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제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 범한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에 숨어 혼자 황궁 안으로 침입했다. 이번에는 과거 잔뜩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시를 읊었던 그 날밤처럼 황궁 벽을 기어오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경도는 북쪽에서 기세등등하게 진행되는 전쟁 상황과 범한이 돌아왔다는 소식 때문에 경계가 높아진 상태고, 황궁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범한이라도 황궁 벽을 기어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이 가장 오래도록 비밀리에 숨겨둔 비장의 패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범한이 이번에 동원하려는 비장의 패는 그와 왕계년만 알고 있고 등자월이 어렴풋하게 추측하고 있는 패인 홍죽이었다.
지금 어서방으로 돌아가 있는 홍죽은 다시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이 받고 있었다. 이처럼 황궁에서 가장 잘나가는 태감인 홍죽의 도움을 받아 범한은 겉보기에는 가장 조용하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경로인 완의방을 거쳐 황궁 안으로 잠입했다.
범한은 홍죽이 지금 자신을 팔아넘길 수 있다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고, 만일 그럴 경우를 대비해 계획을 세워두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난 뒤 온갖 시련을 겪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여기까지 도달한 이상 실패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몰래 황궁 안으로 잠입한 범한은 누이가 황궁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황제 폐하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무래도 상대방이 죽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사생결단의 상황이 되자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는 드디어 거짓의 가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범약약의 목숨을 쥐고 범한을 위협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건 이전에 범약약이 인질이 되었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황제 폐하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성군의 모습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범한도 누이의 목숨이 위험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황제 폐하는 늙고 쇠약해져 있는 데다가 다친 몸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아마 황제 폐하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죽음의 냄새를 내쫓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려 할거였다.
범한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궁녀들 뒤에 서 있는 그는 사람들의 옷 사이 틈으로 태극전에 있는 황제 아버지를 주시했다. 이미 늙은 황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범한은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범한 역시도 황궁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 오죽 아저씨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범한은 오죽 아저씨가 정말 깨어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쩌다가 오죽 아저씨가 황궁에 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절세 강자인 오죽 아저씨의 무예 실력과 경국의 강력한 전투력을 비교해 봤을 때 오죽 아저씨는 금군의 방어막을 돌파할 수는 있겠지만, 아마 태극전 앞에 도착할 때면 분명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일 거였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아는 황제 아버지가 다친 오죽 아저씨가 상대한다면 얼마나 승산이 있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며 범한은 더욱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었다. 그는 멀리 황제 폐하가 작게 두어 번 기침을 한 뒤에 흰 명주 천으로 입가를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