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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93화 (1,093/1,108)

1093화 황성 앞 광장에 쏟아지는 폭우 (2)

오죽의 앞길을 막은 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붓는 폭우가 아니었다. 빗속에서 온몸에 갑옷을 두른 금군 병사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빗물이 ‘툭툭’ 소리를 내며 경국 금군의 갑옷을 때리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때렸지만, 금군 병사들은 조금의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의 얼굴에도 감정의 변화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퍼붓는 폭우가 얼굴에 떨어지지 않도록 머리를 살짝 숙여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오죽은 금군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인 채 걷고 있는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속도를 높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익숙한 속도에 맞춰 터벅터벅 광장 정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오죽은 황궁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폭우가 내리는 광장을 지나 황궁 정문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오죽에게 황궁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으로 간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막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죽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 황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금군에게는 너무나도 대담하고 위협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범한이 경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어젯밤에 섭씨 집안을 통해서 알려진 뒤 빠르게 퍼져나갔고, 지금은 경국 고위층 사람들은 모두가 이 경천동지할 만한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궁의 경비도 어젯밤부터 훨씬 삼엄해져 있었다.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엄격한 수색을 받아야 했고, 방어 수준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황궁 주변에는 긴장된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심지어 이전에 경도 수비사가 감찰원 전임 원장인 진평평을 경도로 호송해 왔을 때보다도 황궁 경비는 삼엄해져 있었다. 모두가 이렇게 긴장한 이유는 범한이 경도로 돌아온 이유가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분명 다시 황궁에 침입해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할 거였고, 조정은 그런 반역 무도하고 경천동지할만한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볼 수 없었다.

순찰하는 금군의 인력도 이전보다 3분의 1정도 더 증가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내리는 폭우가 내리면서 습하고 차가워진 날씨는 금군 병사들의 경계심을 더욱 높이고 긴장시켰다. 모두들 범한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황궁 안으로 들어오려 할지 알지 못해서 더욱 불안해했다.

천하대도 길목에서 일어난 소란도 금군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군에게는 황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무예 실력을 미치광이를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물론 사갓을 쓴 맹인 미치광이가 예상보다 훨씬 강한 실력을 갖춘 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금군도 약간의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후 그 맹인 미치광이가 황궁을 향해 터벅 터벅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삿갓을 쓴 맹인의 오른발이 빗물이 고여 있는 황성 광장의 청색 돌판을 밟을 때 금군은 첫 번째 경고를 했다. 그리고 병력을 모아 단순에 그를 잡을 준비를 했다.

금군의 경고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지만, 오죽은 아니었다. 그는 경고를 전혀 듣지 못한 듯 차분하게 광장을 걸어갔다. 오죽은 황성 성벽 위에 서 있는 금군 고위 장군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과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금군 병사들이 살기등등한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경고를 세 번이나 했음에도 폭우 속에서 걷는 맹인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건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척이나 침착한 걸음걸이로 어느덧 광장 중앙에까지 온 그는 황궁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맹인이 터벅터벅 광장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금군 병사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자객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객의 행동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실력을 갖춘 자객이라도, 설사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사고검이라 할지라도 정정당당하게 황궁 정문을 지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천하의 자객 중에서 모두의 시선을 끌면서 등장해 살벌한 금군의 포위망을 뚫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황궁 성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늘에서 사신이 등장한다면 모를까 일반 사람 중에서는 금군의 방어망을 정면으로 뚫고 황궁에 잠입해 황제 폐하를 시해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금군은 정체 모를 맹인을 그저 운이 몹시 나쁜 미치광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늘처럼 긴장된 상황 속에서 눈치 없이 황궁 앞에 나타났으니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 * *

오죽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금군 병사들이 보이지 않은 듯 태연히 걸어갔다. 이때 하늘 가득 쏟아지는 비는 거세질 데로 거세져서 동해 위 거친 파도처럼 홀로 걸어가는 오죽의 몸을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죽은 태연하게도 그 빗속을 뚫고 걸어갔다.

“죽여라!”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광장에 서 있던 금군 교관은 뼈를 찌르는 듯한 강한 한기를 느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맹인의 모습이 보였다. 맹인은 벌써 일반인은 진입이 금지된 지역까지 들어와 있었다. 위협을 느낀 교관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명령을 내렸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오죽 앞을 막고 있던 금군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이 폭우가 내리는 황성 앞에서 번쩍였다.

하지만 칼날이 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죽이 허리춤에 찬 쇠막대기를 뽑아 들고는 자신을 공격하려 하는 금군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폭우 속에서 오죽의 속도는 빠르지도 않았고, 쇠막대기를 다루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쇠막대기는 한 번 휘둘려질 때마다 정확하게 금군의 목을 찔렀다.

정확하고, 깔끔하고, 안정적인 공격이었다. 오죽의 더없이 간단한 동작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관의 입에서 죽이라는 말이 나온 뒤 오죽이 자신의 앞을 막은 금군 병사를 모두 죽일 때까지는 겨우 몇 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죽의 뒤에 쓰러진 시체의 목 부분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붉은 피는 미친 듯이 퍼붓는 빗물에 씻겨 어느새 사라졌다.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도 오죽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빗속에서 전진하는 두 발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고 걷고 있었다. 오죽은 마치 그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듯 폭우를 뚫고 걸어가며 자신을 가로막는 건 모두 쓰러뜨렸다.

이 모습은 절세 고수들에게서 보이는 초탈한 모습과는 달랐다. 황궁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금군 병사들이 차분히 걸어오는 정체 모를 고수를 보며 느낀 것은 서늘하고 차가운 기운이었다. 모두가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왜냐하면 맹인의 행동은 너무 침착하다 못해서 냉담하고 무관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금군 병사들은 심지어 자신의 동료들이 쇠막대기에 죽은 이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삿갓을 쓴 장님에게는 앞을 가로막는 건 모두 쓰러뜨리겠다는 강렬한 기세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쇠막대기에서 한층 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빗속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쇠막대기는 마치 모든 각도와 가능성을 계산한 다음 가장 최적의 틈을 노린 것처럼 보였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만한 실력이었다. 이에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들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죽이라고 명령한 교관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끙’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삿갓 쓴 맹인의 손에 죽은 부하들을 본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가을비보다 더 추운 한기를 느꼈다.

오죽이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교관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맹인이 입고 있는 무명옷의 색깔이 약간 짙게 변한 게 일반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게다가 맹인이 들고 있는 쇠막대기도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다. 맹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천지 사이의 모든 현묘함이 응축되고 천지 사이의 모든 한기를 흡수한 괴물이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교관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칼을 뽑으려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쇠막대기가 자신의 턱 아래를 찌르고 순식간에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나 빠른 데 아까는 왜 느리게 보였던 거지? 나는 왜 봤으면서도 피하지 못한 걸까?’

교관은 속으로 이렇게 물으면서 천천히 빗속에서 쓰러졌다. 겁에 질린 그의 눈동자에 빗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이후 그는 흠뻑 젖은 헝겊신이 자신의 머리 옆으로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헝겊신을 신은 발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황궁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 *

그칠 줄 모르고 퍼붓는 빗속에서 금군 병사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삿갓을 쓴 살신이 내뿜는 한기와 위협에도 황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금군 병사들은 용감하게 앞으로 뛰어나갔고 죽었다.

하지만 이러한 금군 병사들의 희생도 오죽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몸을 돌리고 무릎을 꿇는 오죽의 몸놀림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침착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고, 동작도 일반 사람들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무기의 공격을 침착하게 피한 뒤 정확하고 빠르게 쇠 막대기로 공격하며 오죽은 가을비의 장막을 찢고, 두꺼운 포위망을 돌파하며 걸어갔다.

오죽의 머릿속에는 황궁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쓰러졌고, 곳곳에 피가 섞인 붉은 빗물이 고이게 되었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죽어갔다. 무자비하게 내리는 빗물 속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끓이질 않았다.

무슨 연유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인간 세상에 등장한 신의 사자는 가장 침착하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을 사용해 제왕을 보호하려는 금군 병사들의 목숨을 거둬들였다. 세상의 속되고 비천한 목숨들을 거둬들였다.

오죽 앞에 있는 사람의 수는 갈수록 적어졌고, 땅 위에 쓰러진 시신은 갈수록 많아졌다.

* * *

광장 정중앙에서 오죽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백 명의 금군 병사들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핏물이 모여 생긴 피바다는 강렬하게 내리는 가을비에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오죽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바로 앞에 있는 황성을 바라봤다.

성 위에서 금군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황궁 문 앞에 있는 오죽을 겨냥한 화살은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핏물 위에 서 있는 오죽이 고개를 들고 검은 천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보이는 황성을 바라보았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화살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얼굴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침착한 얼굴을 한 오죽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손에 있는 쇠막대기를 폭우 속에 뻗었다. 그러자 내리는 비에 쇠막대기에 묻어 있던 피가 씻겨 내려갔다.

비가 ‘툭 툭’ 쇠막대기를 때렸다.

쇠막대기의 엄청난 공격에 겁을 먹은 금군 병사들은 이미 명령에 따라 황궁 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붉은색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장에는 거센 파도처럼 세차게 퍼붓는 가을비를 맞으며…… 삿갓을 쓴 맹인이 외로이 서 있었다.

황성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이 장면을 바라보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한기를 느꼈다. 일반 사람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실력을 가진 맹인은 도대체 누구인 걸까?

금군 고위 장군인 궁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성벽 위에 서서 빗속에 홀로 서 있는 맹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아주 오래전에 한 여자와 그 여자를 따르던 소년 종이 떠오른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채자마자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이끄는 만 명이 넘는 금군 병사들로 저 맹인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죽이 왔다. 결국 오죽이 이곳에 왔다. 오죽이 섭씨 아가씨의 복수를 하기 위해 왔다.’

궁전의 머릿속에서 간담 서늘한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비바람 속에서 홀로 서서 쇠막대기 하나로 강력한 경국의 방어력에 도전하려 하는 오죽은 복수 같은 걸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황성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안에 사는 사람이 아무래도…… 이씨 황제였던 것 같은데.”

비바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오죽은 천만 명이 길을 막더라도 뚫고 나아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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