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정오 (2)
전쟁 상황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답보 상태에 빠지자 결국 사비 장군이 북쪽으로 파견되었고, 즐겁던 경국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황제 폐하는 과거 혈혈단신으로 정북 진영을 찾아가 흉흉한 군심을 단번에 수습했던 사비 장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왕지곤 대원수를 보좌하고 북벌을 책임질 적임자로 임명했다. 이와 같은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사비장군은 가슴 속에 원대한 포부를 품고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사비 장군이 북쪽으로 떠나면서 경도 수비사 통령직이 공석이 되자 젊고 실력 있는 장수들음 모두들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곧이어 발표된 황제 폐하의 고지를 본 이들은 모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셔야 했다.
정식으로 추밀원 참모직에서 벗어나게 된 섭완은 무예 태부직과 함께 경도 수비사 통령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번 임명에 대해서 누구도 반대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섭완은 1년 동안 경국 서쪽 토벌을 진두지휘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인 만큼 경국 조정 대신들이나 백성들도 그가 언젠가는 중요한 요직이 앉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섭완의 아버지 섭중은 아주 젊은 나이에 경도 수비사 통령직을 맡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와 매일 갈등하던 아들도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 젋은 나이에 경도 수비사 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깊은 가을날 정오의 맑은 햇살이 섭완의 소박한 갑옷을 비췄다. 이 젊은 고위 장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발로 말의 배를 살짝 때렸다. 정양문 밖으로 천천히 나가던 그가 곁눈질로 옆을 지나는 백성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드넓은 초원 위를 날아다니면서 사냥감을 찾는 매처럼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섭완의 이런 행동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작은 범 대인을 만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인물인 작은 범 대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살피게 된 거였다. 물론 황제 폐하는 그에게 범한을 만나면 반드시 먼저 세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진시를 내렸지만, 혈기 왕성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섭관이 과연 그 말을 따를지는 알 수 없었다.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청량한 햇빛이 성문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비췄고, 그 사이에서 섭완은 살벌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뺨은 햇볕에 살짝 검게 그을려 있었고, 눈가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주름이 몇 가닥 있었다. 머릿속으로 석양이 지던 날 태극전 앞에서 황제 폐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던 그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째서 가을에 북벌을 시작하신 걸까? 곧 다가울 겨울 추위가 걱정되지 않으시는 건가?’
이것은 북제 황제와 북제 조정 대신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일이었고, 경국 조정 대신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사 일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마침내 황제 폐하가 북벌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흥분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군대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라 북제를 정복하기 위해 묵묵히 전진했다. 누구도 왜 지금 북벌을 시작했다고 묻지 않았다. 더욱이 이상했던 점은 군사 일을 잘 알고 있는 대신들도 침묵했다는 점이었다. 섭완을 중심으로 한 추밀원 관리들이나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경국 중신들은 지금은 북벌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황제 폐하에게 이 사실을 간언하지 않았다.
‘수천수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걸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전진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지. 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인하기 위해서야.’
말 위에 앉아 있는 섭완이 청량한 가을 햇살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범한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범한을 유인해 죽이기 위해서 경제가 경국 병사들에게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섭완은 생각에 잠긴 채 남몰래 탄식하느라 자신이 죽이고 싶어 하는 인물인 범한이 경제가 대륙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인 오죽과 함께 성문을 이미 지나 경도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이 지난 성문은 정양문이 아니었다.
정오의 청량한 가을 햇살은 서성문에도 비추고 있었다. 경도 안팎을 분주히 오고 가는 인파 속에서는 두 사람도 끼어 있었다. 한 명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명옷 차림이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에 삿갓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은 채 성문을 지났다.
분장한 범한은 경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오죽을 바라보았다. 오죽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은 넓은 삿갓이 만들어낸 그늘에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오죽이 눈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에 섭경미는 오죽을 데리고 여행객처럼 경국 경도로 왔다. 섭중이 지키고 있던 경도 성문을 지난 그녀는 섭중을 웃음거리로 만든 뒤에 한 남자가 파란만장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아무 반응도 없는 오죽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경도 안으로 들어왔다. 섭완이 직접 지키고 있는 정양문을 피해 귀신처럼 인파 속에 몸을 숨긴 채 들어온 범한은 그 남자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자연의 순환이었다.
* * *
범한과 오죽이 경도로 돌아왔을 때는 북쪽에서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어 있었고, 매비가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며칠이 지나 있었다. 범한은 현재 경국의 반역자로 모든 관직과 권력을 빼앗긴 상태였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강력한 정보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경도의 한 객잔 안에서 범한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매비가 죽은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이 미리 세워둔 계획을 분석하던 그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어서 며칠 동안 범한은 경도 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천한 옷을 입은 남자 종으로 변장해서 각 부 사이를 오고 가고 거리 찻집을 쏘다녔다. 그는 자신을 아는 사람은 찾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정체가 탄로라서 사람들이 원성을 내지르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범한이 소리 없이 찾아다니는 건 상자였다. 아주 아주 묵직한 상자였다. 눈이 내리던 날 황제 폐하를 암살하는 데 실패한 범한이 황궁 앞 광장에서 경국 군대에게 포위를 당해 죽을 상황에 처했을 때 천둥과 같은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제 폐하가 저격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만약 상자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후 일은 아주 쉬워질 거였다. 다만 범한은 상자가 누구 손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이 문제는 오죽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간단했지만, 지금 오죽은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 석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잠재의식이 이끄는 데로 범한을 따라 신묘를 떠났고, 신묘 밖에 세상을 여행하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체험했다…….
그 며칠 동안 범한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황제 폐하와의 약속을 위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적성루(摘星樓) 부근에서 흔적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자신을 제외한…… 오죽 아저씨의 가장 큰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당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범한은 생각하는 방향이 어긋나 있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여자가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방향을 모른 채 광야를 떠도는 사람처럼 의미 없는 탐색을 계속하던 그는 결국 지치고 절망에 빠져 가을이 깊은 경도 하늘을 바라보며 아우성 지르고 싶었다.
범한은 지금 경국 조정이 가장 경계하는 반역자였다. 경도 안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소란이 일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한에게는 자신의 흔적을 최대한 감춰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감찰원의 오랜 부하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의미 없는 탐색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 경도는 이미 1년 전에 경도와는 달랐다. 이미 버린 자식 취급을 받고 있는 감찰원은 비참하고 처량한 대접을 받으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황제 폐하가 모호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조정 대신들은 진작에 감찰원을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거였다.
범한은 지금까지 살면서 항상 자신에게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이후로 어떤 난관을 만나도 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섭류운의 검과 마주했을 때나 황제 아버지의 손가락을 마주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매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보배는 바로 상자, 독이 발라진 비수, 오죽 아저씨였다. 하지만 지금 오죽 아저씨는 백치나 다름없었고, 상자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 * *
범씨 집안 저택, 유씨 국공 저택, 정왕부, 언씨 집안 저택, 화친 황부, 천하대로에 위치한 감찰원 본부, 대리사 옆에 위치한 1처 관아, 성 남쪽에 위치한 작은 저택까지 범한이 찾아올 가능성이 있는 곳들은 모두 조정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여러 차례 삿갓을 쓴 고행자들과 마주칠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 상자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범한에게는 황제 페하의 몸 상태와 심리 상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게 가장 중요했다.
비록 일부 정보를 입수하기는 했지만, 범한은 이런 정보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가 가장 잘하는 것이 본심을 숨긴 채 적을 유인해서 죽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동산 정상에서 대종사들을 유인했던 것처럼 황제 폐하는 적을 유인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이 만일 실수를 한다면, 황제 폐하는 절대 자신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금의 실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황제 폐하와 범한 모두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떠올릴 때면 마음이 더없이 냉정하고 침착해지면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 해와 달에게 맹세할 필요도 없었다.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두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과 같았다. 그리고 이런 힘으로 살아간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었다.
한참 동안 객잔 안에서 가장 정확한 황궁의 정보를 얻을 방법을 고심하던 범한은 섭씨 집안 저택을 찾아가기로 선택했다. 섭씨 집안은 섭중이 추밀원 정사를 맡고 있었고, 섭완이 경도 수비사 통령을 맡고 있을 정도로 충신 집안이었다. 황제 폐하는 아마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곳에는 감시자를 배치하지 않았을 거였다.